칼빈주의 비평 - 극단적 칼빈주의는 무엇인가?
극단적 칼빈주의는 무엇인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는 일부 칼빈주의자들이 다른 칼빈주의자들에게 붙여 준 명칭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 칼빈주의 검증」이라는 책에서 제프리 구 박사 - 장로교 칼빈주의자로서 그리스어 공인 본문과 킹제임스 성경을 철저히 옹호하며 그래서 내가 존경하는 분 - 는 자신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라는 명칭을 붙인 자들의 입장을 분석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주의는 프랑스의 대신학자 칼빈으로부터 나온 교리 체계이다.… 그렇다면 극단적 칼빈주의란 무엇인가? 여기서 접두사 ‘극단적’(hyper)은 ‘초월하는’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극단적 칼빈주의는 칼빈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친 것을 넘어서는 왜곡된 형태의 칼빈주의이다.
구 박사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두 가지 특징이 ① 일반적 은혜를 부정하고 ② 값없이 제공되는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적 은혜와 구원하는 은혜, 사랑의 등급
구 박사는 칼빈이 ‘일반적 은혜’와 ‘구원하는 은혜’가 있다고 가르쳤으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구원하는 은혜는 ‘복음을 통해 죄인을 다시 살리시는 성령님의 활동’이며 일반적 은혜는 ‘죄로 오염된 이 지구에서 창조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호의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 박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일반적 은혜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택받지 않은 모든 자들을 미워하시고 모든 것이 그들의 파멸을 향해 활동하게 하신다.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이 선택받지 않은 자들을 미워하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는 그분께서 그들에게 ‘일반적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들에게 일반적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은 사랑하신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말하는 마가복음 10장 21절을 설명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사랑의 등급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때로 하나님은 자신이 인정하지도 않고 의롭다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언급되어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무어라 말해야 할까? 만일 내가 선택받지 못한 자라면 내가 구원받고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는지, 어떤 종류의 사랑을 주셨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일반적 은혜’와 ‘사랑의 등급’은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귀에는 즐겁게 들릴지 모르지만 ‘버림받은 자’(유기되어 영벌에 처해진 자)를 천국에 들어가게는 하지 못한다.
복음을 값없이 보편적으로 제공하시는 것
구 박사는 복음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선포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시게 모든 사람, 즉 선택받은 자나 버림받은 자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구원에 이르도록 초청하신다는 것을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면에 그는 칼빈식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구 박사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나누도록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초청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부르실 때 온 세상을 친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며’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으며’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칼빈이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칼빈의 요한복음 3장 16절 주석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한다.
이런 인용구를 읽을 때 모든 사람이 복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칼빈이 진짜로 믿었다고 잠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사실 그가 의미한 것이 전혀 아니다! 한편으로는 복음이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칼빈은 주권적 선택이라는 자신의 교리를 가지고 실제적으로는 복음이 보편적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고 다시 태어나서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일하시지 않으며 성령님이 내적 교사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때만 일하신다.… 참으로 복음은 구원을 위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지만 [사람을 살리는] 그것의 권능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을 해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멸망하는가?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는 성경 신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복음의 문제에서 선택권을 갖는 존재로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여 죽는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주권적 선택에 대한 자신의 교리에 의지해서 답을 해야만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파멸에 들어갈 존재로 만드신 ‘은밀한 작정’에 대해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자신의 손을 내미시지만 그분께서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자신이 미리 선택하신 사람들만 붙잡으신다(자신에게로 그들을 이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어느 면에서 궤변이다.]
소망적 의지 대 결정적 의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받는 것으로 작정하셨는데 어떻게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구 박사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이런 문제를 하나님이 ‘소망적 의지’(desiderative will)와 ‘결정적 의지’(decretive will)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는 죄인들을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그분의 주권적 선택이며 ‘소망적 의지’는 모든 죄인들을 위한 그분의 일반적 관심 표명이다. ‘소망적 의지’ 대 ‘결정적 의지’라는 개념에 따르면 구원은 모든 인간에게 제시되지만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어거스틴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유효하다.’
나의 친구여, 만일 이것이 마술적 주문이나 헛소리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면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가게를 열고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구원의 선물을 제공한다. 반면에 ‘칼빈식 칼빈주의자들’은 가게를 열어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구원을 제공하되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준다. 당신은 이 두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결 론
내 판단에 따르면, 칼빈은 하나님을, 선택받지 못한 자나 ‘버림받은 자’를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잔인하게 농담조로 이야기하는 분으로 믿은 것 같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진심으로 초청하시지만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 따라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보편적으로 제시되는 구원’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자신의 불신앙과 버림받은 상태만 확인하게 된다.
나는 극단적 칼빈주의나 칼빈식 칼빈주의는 ‘언어학 게임’이라고 본다. ‘칼빈식 칼빈주의자’는 ‘어떤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누구라도’ 복음의 부르심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2장과 베드로후서 3장이 말하는 것을 자기가 믿는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입장을 자세하게 분석해 볼 때 그는 실제적 측면에서 그러한 것을 믿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들은 여전히 주권적으로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죄인들이다. 버림받은 자들은 여전히 주권적으로 버림을 받아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고 천국 문이 그들에게는 영원히 잠겨 그들은 결코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
‘칼빈식 칼빈주의’는 극단적 칼빈주의만큼이나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 이 둘 모두 자신의 신학에 따라 성경기록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신학으로 성경기록의 명백한 말씀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