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 칼빈주의에서의 14년 여정②
BSF 성경 공부 사역의 고충
칼빈주의에 중독된 그 몇 년 동안 나는 BSF 성경 공부 교제 모임에 더 깊숙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거기의 리더가 되어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들을 맡았고 15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그룹의 지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늘 감사하였습니다.
나의 훈련 및 지도력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 일들을 하면서 보낸 나의 여러 해 동안의 시간이 내게 많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나는 교제, 성경 공부, 기도, 조직 및 리더십 기술을 발전시키는 훈련, 찬양, 그리고 내 그룹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내는 것 등을 다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BSF 성경 공부 반이 로마서에 대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완전함을 느꼈습니다. 그 로마서 공부가 매주 진행될 때마다 강의에 동반되었던 주석 노트들은 매우 칼빈주의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때는 내가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더 심각하게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들의 견인이라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이 내게는 전체적으로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무조건적 선택을 믿었지만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강의 노트들에는 즉각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교리는 나를 매우 큰 혼돈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 노트들은 칼빈주의의 이런 주된 교리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과 관련이 있는 다른 것들도 가르쳤습니다.
논란이 많은 이런 가르침들로 인해 결국 BSF 지도자들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선택 교리 쪽으로 심하게 치우쳤지만 또한 믿음 이전에 중생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으므로 뭔가 중간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확실히 이렇게 영향력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 좋은 평판이 있는 BSF 사역이 이런 분열을 초래하는 교리를 가르치는 데는 성경적으로 합당한 이유들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롬16:17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우리의 지도자 그룹과 토의 그룹들은 칼빈의 교리, 다시 말해 ‘믿음에 앞서 다시 태어남, 즉 중생이 있다’는 교리가 소개되어 서로를 나누어 놓을 때까지 큰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마다 성경이 말하는 절대적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을 옹호하기 시작하면서 가끔 뜨거운 논쟁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나는 그런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어떤 성경적 증거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형제들을 위해 저녁에 강의했던 성경 공부 지도자들 중 한 분에게 전화를 하면 이 논쟁에 대해 어떤 영적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심각하게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분이었으므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그분이 무슨 합당한 답변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믿음에 앞서 중생이 있다’는 주제에 대해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구절은 요한복음 3장 3절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므로”
분명히 이 구절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인데 그분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재의 왕국을 인식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 그분의 이런 영적 해석이 제한 속죄를 포용하는 곳으로 나를 이끌고 감을 알고 당시에 나는 재고의 여지없이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습관적으로 해 오듯이 나는 거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왜 그것이 혼동과 분열을 가져오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그 주제를 철저히 조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탐구를 위해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최근에 개점한 크리스천 서점으로 갔습니다. 유타주의 쏠트레이크시티는 주민들의 대다수가 몰몬교도이기 때문에 크리스천 서점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 작은 가게로 들어가 주인인 조지와 그의 형제를 만난 뒤 우리는 크리스천 소매 서적 장사를 시작하는 그들의 새로운 노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벽에 붙어 있는 아이콘들(종교적 상징물)을 보며 나는 그가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 정교회를 다닌다고 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 정교회와 성경적 기독교 사이에 중요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지만 그의 책장 선반들이 당시 유명한 크리스천들의 책들로 쌓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때까지 더 이상 그들을 압박하며 묻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미 칼빈주의로 꽉 차 있었습니다. 가게 안을 둘러보면서 나는 다양한 개혁주의 학자들의 카세트테이프들이 숨겨진 작은 선반을 발견했습니다. 이 테이프들은 분명히 조지가 돈을 받고 빌려주거나 할인된 가격에 구매하도록 내놓은 개인 수집품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워 담았습니다.
내 차로 돌아와서 나는 가장 흥미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테이프를 녹음기에 넣었습니다. 나는 내가 연루된 BSF 성경 공부반이 왜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수용했는지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믿어야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에 앞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왜 그리 그들에게 매력적이었을까요? 나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가르치면서 구원 이전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라고 속으로 말하였습니다.
이 테이프들은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카톨릭주의를 벗어난 종교 개혁으로부터 생성된 신학의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시 그것을 몰랐지만 BSF 이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많은 사람들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의 5개 강령(포인트) 전체를 믿는 분들이었습니다.
주의 깊게 이것들을 들으면서 나는 16세기 천주교에서 나온 유명한 종교 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칼빈의 신학은 초기 로마 카톨릭 신학자 어거스틴에 의해 대부분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인 TULIP의 다섯 가지 강령들이 어떻게 통합되었고 서로에게 어떻게 의지하고 있는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나는 칼빈이 구원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 앞에는 칼빈의 복음과 천주교를 개혁하려는 그의 사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칼빈주의의 다섯 요소, 즉 5대 강령을 발견함
칼빈주의 5대 강령, 즉 TULIP을 세로로 놓고 각 단어를 풀어 보면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들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 나오며 이 5대 강령은 사람의 타락이 전적으로 완벽하여 사람이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믿는 분들은 죄성이 있는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거나 깊이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하며 - 이것은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조건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는 않으므로 이 사실은 곧 분명하게 칼빈주의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지는 않음을 증명해 줍니다.
더 나가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받도록 미리 예정된 그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제한 속죄). 왜냐하면 그분께서 선택받지 않은 자들을 위해 자신의 피를 낭비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그분의 피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 선택받은 자들의 의지, 지식, 동의, 인식과는 상관없이 성취됩니다. 믿음에 앞서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이 은혜는 그들이 믿은 뒤에 그들이 끝까지 믿음과 순종 면에서 견딜 수 있게 능력을 부여합니다.
이런 개념들의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한 속죄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나의 지속적인 지지와 결합되어 나만의 독특한 칼빈주의 브랜드를 창출하게 하였습니다.
많은 편파적 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개인적 믿음을 이 다섯 가지 요소들과 함께 합성해서 자기에게 합리적으로 보이는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칼빈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뭉쳐서 함께 서든지, 아니면 함께 넘어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즉 다섯 가지 중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네 가지는 자동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칼빈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카톨릭주의’가 설명하는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 생각을 이 주장들과 함께 섞지 말고 그것들이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 저자는 칼빈주의를 ‘개혁된 혹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카톨릭주의’(reformed catholicism)라고 생각한다.
칼빈의 가르침, 즉 위에서 TULIP으로 요약된 가르침의 다섯 가지 요소들은 도미노 게임(연속으로 무너뜨리는 게임)과 같다. 그것들은 함께 서 있거나 함께 넘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이 가운데 한 요소 - 예를 들어 ‘전적 타락’ - 를 믿는 칼빈주의자라고 주장하고 또 그가 그 교리를 칼빈이 가르친 대로 믿는다면 그는 반드시 나머지 네 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 http://www.biblebelievers.net/Calvinism/kjcalvn1.htm
이 모든 가르침들을 정리해 나가면서 나는 혼자 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샌드라는 장로교 학자인 제임스 케네디(D. James Kennedy) 목사님의 가르침을 통해 칼빈주의로 개종했는데 우리는 매주 토요일 아침에 만나서 기독교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추세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매주 우리는 지난주에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칼빈주의의 5대 강령에 대해서도 자주 논의하였으며 성경이 실제로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사람의 ‘전적 타락’이라는 칼빈주의 견해를 가르치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일부만 선택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선택받지 않는 것도 추론해 보았는데 그것은 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하는지 그리고 왜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런 것들이 이슈가 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둘은 요한일서 2장 2절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분명히 가르치는 것을 기억하면서 제한 속죄는 거부했습니다.
요일2:2 그분은 우리 죄들로 인한 화해헌물이시며 우리 죄들 뿐만 아니요 또한 온 세상 죄들로 인한 화해헌물이시니라.
제한 속죄를 거부하였으므로 우리는 칼빈주의 진영에서 네 가지 요소(4대 강령)만을 믿는 네 포인트 칼빈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러면서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의미를 알려고 씨름했고, 그것을 복음이 제시될 때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은혜라고 보았지만 이 은혜가 믿음에 앞서 중생을 가져온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일단 구원받으면 선택받은 자들이 믿음 면에서 인내한다는 것은 그들이 결코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 은혜가 순종도 가져다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믿음과 행위 면에서 끝까지 인내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칼빈주의를 공부하고 발전시켜 가면서 칼빈주의 5대 강령인 TULIP을 통해 추론하게 된 결론입니다.
믿음의 딜레마
하나님의 선택과 개개인이 믿는 것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것이 여전히 우리를 혼돈 속으로 넣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하나님의 선택, 이 둘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샌드라와 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오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믿음이 생기도록 하실까?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까?”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가 매주 참석하는 세대주의 예언 연구 그룹에서 어느 날 밤에 갑작스럽게 왔습니다.
세대주의를 가르치는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이 그룹은 세대주의의 기본적 교리들을 지지합니다. 그분은 분명하게 교회는 오순절 날에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기관이 아니며 또 교회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은 성경에 약속된 미래의 천년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며 성경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유명한 예언 전문가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항상 올바른 궤도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지 그가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가르쳤을 때 우리의 딜레마는 해결되었습니다. 나는 “물론, 바로 그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주의 퍼즐에 이 조각을 더하니 내가 쌓아 온 나의 강한 요새가 더 강하게 되었습니다. 내 요새를 쌓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벽돌들은 오류와 진리가 혼합된 것들이었습니다. 거짓에 대해 조사할 때마다 그 거짓에 동반된 일부의 진리가 그것이 노출되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즉 진리가 그런 거짓을 포장해 주는 절반의 진리로 작용하였습니다. 비록 칼빈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이 그것에 대한 나의 믿음을 강하게 해 주었지만 오래전에 내가 처음 칼빈의 예정설을 접한 이후로 내 생각에는 구조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주권적 선택이라는 칼빈주의 구조 안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내게는 다 불합리하게 보였습니다. 칼빈주의의 영향이 나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고 그런 자만심 속에서 나는 내가 진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가르침을 평가하면서 나는 에베소서 2장 8-9절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시금 성경기록이 나를 위해 잘못 해석되었고 나는 계속해서 나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고전3:10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 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