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시편 1권(1-41)

시32편 1절 - 11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1. 8. 10:39

1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2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

처음 두 구절은 시33:12, 34:8, 40:4에 있는 것처럼 구약 팔복의 일부분이 들어 있다.

시33:12 자기들의 하나님이 주이신 민족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자기 유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34:8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40:4 주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를 존경하지 않으며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바울은 2절을 신약의 롬4:8,11에서 인용했다. 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의 모형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율법 하에서의 구원이 은혜 아래에서의 구원과 동일하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구별되는 언약(구약과 신약)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이라면 어째서 그것들이 서로 구분되며, 정통 유대교인 중 아무도 신약에 있는 역사적인 일들을 받아들이기조차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것인가?

롬4: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롬4:11 그가 할례의 표적을 받은 것은 무할례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서 믿는 모든 자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함이요, 그들도 의롭게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며,

주목해 보라. 성경을 아주 조금만 공부해도 그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① 구약 성도들의 죄들과 죄과들은 가려진 것이며, 구속된 것이 아니다.(히9:15)

히9:15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영원한 유업의 그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

② 그들의 죄들과 죄과들은 용서받았으나 범법자가 깨끗하게 되지는 않았다.(출34:7)

출34:7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행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죄악이 결코 깨끗케 되지는 아니하리라. 아비들의 죄는 그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리라.

③ 그들은 정죄 받지 않았으나 그 죄들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히10:4)

히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어진 전가된 의가 신약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이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시는 사람은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받은 수백만 명의 죄인들에게는 분명 수많은 간사함이 있다. 구약적인 의의 기준과 신약적인ㅇ 의의 기준은 이처럼 다르다.

3 내가 침묵을 지킬 때 온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4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짓누르니 내 원기가 여름철의 가뭄으로 바뀌었나이다. 셀라.

3절은 분명 비유적이다. 감정적인 의기소침과 긴장이 관절염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기서 그것은 뼈 안에 있는 수분이(4절) 말라버리는 것을 말한다. 4절에 다시 셀라가 나타나며 이것은 우리에게 재림에 관한 교리를 상기시킨다.

5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

5절에 있는 셀라와 7절에 있는 셀라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다윗의 개인적인 죄들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회개일 뿐 아니라 환란 때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신30:1-6 렘33:6-16 롬11:26-27 겔36:19-26)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단9:4-15에 있는 위대한 참회기도를 할 때 민족의 죄들을 자백했다.

다윗의 이 교훈시에서 사용된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① 죄과(transgression) ② 죄(sin) ③ 죄악(iniquity) ④ 간사함(guile)

죄과는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이고, 죄는 모든 종류의 불의이며(요일5:17) 목표를 빗나가는 것이다. 죄악은 죄의 뿌리 또는 근원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왜곡되고 비뚤어진 죄인의 본성으로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요일5:17 모든 불의가 죄이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느니라.

루터가 좋아하는 시편 중에는 시51,130,143편과 이 시편이 있다. 물론 그는 바울서신들의 내용을 가지고 이 시편들을 판단했으며, 그것은 바람직한 방법이다. 시편에 있는 것 중 바울 서신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든 에베소서 3장의 한 몸의 신비(교회)를 위한 현재적 진리가 된다.

6 이로 인하여 경건한 자는 누구나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니, 진실로 큰 물들의 홍수들일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시니, 주께서 고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이로 인하여 경건한 자는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자는 용서를 얻게 위해 그분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사항들이, 우리가 다루는 내용이 교리적으로 교회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해 준다.

①큰 물들의 홍수들 ②주는 나의 은신처시니 셀라 ③경건한 자는 누구나

베드로후서 2장의 롯이 경건한 사람의 예다. 바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경건한 성실함”(고후1:12), “하나님의(godly 경건한) 방식”(고후7:9), 경건한 질투(고후11:2), 그리고 경건한 세움과 경건하게 사는 삶이(딤전1:4 딤후3:12) 제시되기는 했지만 그들 자체가 경건한 자들인 것은 아니다.

고후1:12 우리의 자랑이 이것이니 우리의 양심의 증거라. 이는 우리가 진지함과 경건한 성실함으로 하되 육신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서 행하고 또 너희를 위하여 보다 풍성히 행한 것이라.

고후7:9 이제 내가 기뻐하는 것은 너희가 슬퍼하게 된 것 때문이 아니요, 너희가 슬퍼하여 회개에 이른 것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슬퍼하게 된 것은 우리로 인하여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후11:2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키나니, 이는 한 순결한 처녀로 너희를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이라.

딤전1:4 꾸며낸 이야기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경건한 덕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의문을 일으킴이라.

딤후3:12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

경건한 자들은 율법 하에서 있었다.(시4:3 12:1) 율법 이전에 있었다면 그것은 롯의 날들이고, 이 날들은 재림의 날들과 같을 것이다.(눅17:28)

시4:3 그러나 주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따로 세우셨음을 알라. 주께서는 내가 부를 때에 들으시리로다.

시12:1 주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신실한 자도 사람의 자손 중에서 사라지나이다.

눅17:28 그것은 또한 롯의 날에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라.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살았으나

큰 물들의 홍수들은 단9:26에서 발견되고, 그 다음으로는 계12:5에서 다시 발견된다.

단9:26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하리니 그 끝은 홍수로 뒤덮일 것이요, 그 전쟁의 끝에는 황폐함이 정해졌느니라.

계12:15 그 뱀이 여인 뒤에다 자기 입에서 물을 홍수같이 쏟아 그 여인을 홍수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6절을 슬픔의 홍수들이라도 경건한 자를 덮치지 못할 것이라고(“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함으로써 누구든지 영적인 적용을 할 수는 있지만, 교리적 적용에 있어서는 문제가 다르다.

지상에 있는 은신처(7절)는 셀라, 페트라이며(시31:21 60:9) 하늘에 있는 은신처는 사26:20에서 말하는 곳이다.

시31:21 주를 송축할지어다. 이는 그가 견고한 성읍에서 그의 놀라운 자애를 내게 보이셨음이라.

시60:9 누가 나를 견고한 성읍으로 데려가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 것인가?

사26:20 내 백성아, 오라, 네 방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그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잠깐 동안 숨으라.

8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네게 지시하고 가르치리니, 내가 너를 내 눈으로 인도하리라.

8절과 9절은 분명히 실제적인 말씀이다. 그 구절들은 - 율법 이전이든지, 이후든지, 율법 하에서든지 간에 - 신구약 어느 시대에 사는 어떤 성도에게나 적용할 수 있다.

①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시하실 것이다.

②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③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 지시와 가르침과 인도는 그 사람이 가야 할 길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징계와 훈계를 통해 지시하시고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며, 섭리적인 다루심 속에서 그분의 영으로 인도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는다면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다. 사람이 징계와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 보기를 거절한다면 그분의 지시 밖에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찾지 않고 거부하면 도랑 속으로 걸려 넘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가고 있는 길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9 너희는 지각이 없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말에게 지각이 없다고 하신다.

①말은 자동무기의 화염 속으로도 돌진한다.

②말은 부러진 다리가 낫도록 충분한 시간을 누워있지 않는다.

③말은 우연히 생각지 않은 때에 자기 주인을 발로 차서 죽인다.

④말은 나비나 굴러가는 모자를 보고서도 놀라며 뛰어올라, 자기에게 타고 있던 사람을 던져버린다.

⑤말은 한 무리의 말들을 향해서도 정면으로 돌진하도록 몰 수 있다. 그러면 자기와 함께 두 마리 내지 다섯 마리가 동시에 중상을 입는다.

⑥사륜마차나 역마차에서 도주한 말은 분별력이 없어서 속도를 늦추지조차 못한다. 노새는 말보다는 분별력이 좀 있다.

그들은 입이 재갈이나 굴레로 꼭 물려지지 아니하면 네게 가까이 오지 않느니라.

<뉴 킹제임스성경>은 이 구절을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네게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고쳤다. 그러나 여기에 담긴 뜻은 여러분이 그것들을 가까이 오게 하려고 그것들에 재갈과 굴레를 물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여러분이 그것들에 재갈과 굴레를 물리지 않으면 그것들이 여러분을 물거나 발로 찰 것이라는 말이다. “가까이 오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들에 탈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여러분을 물고 발로 차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문맥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동물 위에 타신 후에 그것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겔38:4와 사37:29를 보라. 만약 말이나 노새가 재갈이나 굴레로 꼭 물려지지 않으면, 그것은 네가 가까이 올 뿐만 아니라 소총과 총검으로 무장한 10열의 군인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할 것이다.

겔38:4 내가 너에게 돌이켜 네 아가리에 갈고리를 꿰어 너를 끌어내리니,

사37:29 나를 거스른 너의 분노와 교만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내 갈고리로 네코를 꿰며 네 입술에 재갈을 물려 네가 왔던 길로 너를 돌이키리라.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자비가 그를 두르리라

11 너희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이 정직한 너희는 모두 기쁨으로 소리칠지어다.

이 구절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악인과 의인들에게 해당한다. 다시 그 양극성을 주목하라.(악인과 의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이것은 율법 하에 있는 구약 성도들에게 교리적으로 해당된다. 하나님께서 율법 하에서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않으시나(출23:7) 은혜 아래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

출23:7 거짓된 일을 멀리하고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이는 내가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않을 것임이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대상이 되시는 주님을 선택함으로써 기뻐한다는 말이다.

스펄젼은 “마음이 정직한”이 엎드리거나 굽히거나 기울어지거나 완전히 누워버린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서 있는 마음을 뜻한다는 것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