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6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
문맥상 6절에서 언급되는 생명은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을 말한다. 그리고 사망 역시 실제적인 죽음을 일컫는다.
이런 글이 있다. ‘속도제한 표지판은 네가 잘못하고 있다고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네 대신 벌금을 물어줄 수는 없다.’
3절에서 우리는 율법이 잘못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그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읽었다. 율법은 이와 같이 시속90km라고 쓰인 속도제한 표지판과 같다. 그것을 위반하면 딱지를 떼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딱지를 보고 주님께로 감다면 그분께서 당신 대신 벌금을 물어주신다. 얼마나 멋진가!
7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적인 생각이란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생각이 아니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런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복종할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이렇다.
8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혼이 여전히 육신에 밀착되어 있어 육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영 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처해 있는 어쩔 수 없는 위치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신다. 행10장의 코넬료는 그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이었던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행10:2)했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다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태양을 악인과 선인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심이라.”(마5:45)
무엇인가로부터 구원받은 바가 없다면 구원받은 게 아니다. 물에 빠졌는데 물에서 건져냄을 받지 못했다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았다는 말인가? 지옥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은 적이 없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구원받지 못한 자의 딱한 사정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자비를 베풀이 주신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그들이 육신 안에 있는 한 이것은 절대로 불간능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당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자.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의 사람이 아니니라.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다. 그런데,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이라는 조건에 100% 맞아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if)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당신은 더 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한다.
당신은 육신으로부터 도려내져 육신과 분리된 것이다. 물론 지리적 위치로는 육신 속에 머무르고 있으되,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각 얼음 틀을 비틀어 거기서 떼어낸 얼음처럼 얼음 틀에 늘어붙어 있지 않고 다만 그 틀 속에 담겨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당신 안에는 성령이 거하므로 당신은 더 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고 당신은 그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의 사람이 아니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는 잃은 자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의 아버지요, 인류는 모두가 한 형제라는 말은 국제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이교도적 정치선전 문구이다. 이런 구호는 성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10 만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령은 의로 인한 생명이니라.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성령 안에 있고 성령께서는 또 당신 안에 계신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신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당신의 몸은 어찌 되었다고 말씀하는가? 당신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당신의 몸이 죄로 인하여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죄의 몸으로부터 벗어나 해방되었다. 앞서 2절 말씀대로 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여 당신의 육신을 죽여 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더 이상 육신 안에 갇혀 있지 않게 되었고, 죄와 사망의 법은 효력이 정지되었으므로 당신은 그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이다. 당신의 몸은 이제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입장에 놓여 있게 된다. 그 하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죽음을 죽어가고 있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죽여 땅에 묻혀 있는 입장이며, 나머지 하나는 다시 일으켜진 입장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상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장사되어 무덤 속에 있다. 나는 죽고 장사까지 치렀다. 한편, 나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지금 좀처럼 숨을 멈추지 않고 아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죽음을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 태어난 새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다시 일으켜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상이한 복합적 삶이 공존하는 아주 복잡하고도 미묘한 상황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당신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며 또 세상도 당신에 대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둘러싸고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는 셈이다. 한 십자가 위에는 당신을 위해 죽은 그리스도께서 달려 있고, 한 십자가 위에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당신이 달려 있으며, 나머지 한 십자가 위에는 당신에 대하여 죽은 세상이 매달려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령은 의로 인한 생명이니라.” 그러니까 지금 당신에게는 “죽은 시체”로서의 옛 본성과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본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11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의 영으로 인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당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몸, 즉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다. 왜 그런가? 죄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그 몸은 죽을 몸이되, 그분께서 살리실 것이다. 그분이라니 누가 말인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말이다.
어째서 그분께서 당신의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인가? 당신 안에 그분의 영이 거하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 주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이것이다. 당신이 구원받았으므로 당신은 이미 영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므로 당신의 몸까지 다시 소생되어 당신의 영적 생명은 이제 실제적 영생으로 구현될 것이다.
언제 말인가?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함께 당신이 휴거될 때 당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은 영원히 죽지 않아도 될 몸으로 변모될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지 말라. 당신이 지성인이라면 당신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의 위대하심이 그야말로 지극히 위대하다는 것을 알 만한 지성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이것을 조금도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간구했다. 엡1:18-19를 읽어보자. “너희의 지성의 눈을 밝히셔서 너희로 하여금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또 그의 강력한 능력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향하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께서는 당신의 지성을 밝혀 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러내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당신 안에 약속 돼 있는 그의 유업과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신다. 당신이 이것을 알고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이 어떤 것인가”(엡1:19)를 알기에 충분한 지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모두 그렇게 되기를 간구했다. 그는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그분의 강력한 능력이 과연 어떤 능력이기에 지극히 위대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가?
그 다음 엡1:20-21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게 하사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천상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사”, 즉 당신의 죄들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분의 본향인 하늘로 승천하게 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다스림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이름 지어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몸의 부활과 관련하여, 당신의 죽을 몸도 살리실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함을 설명하면서 이만큼 이해하기 평이한 설명을 하고 있는 바울의 말뜻을 그래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당신은 지성의 눈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며 한층 더 매달려야 한다. 당신 안에 성령이 들어와 계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런 지극히 위대한 능력이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당신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리라는 것을 믿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들이나 육신에 져서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육신에 빚진 것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당장 그것을 무시해 버려라. 육신에 진 빚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차피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에 진 빚은 빚이 아니다. 당신은 육신에 대해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 당신이 구원받은 순간 육신에 지고 있던 모든 빚은 소멸되었다. 만약 당신이 아직도 육신에 대해 정말로 빚지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그것은 죽음으로서만 변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구원받고 육신에 대하여 빚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구원받는 순간 육신에 대한 빚은 자연 소멸된다. 어떻게 말인가? 다음 구절을 읽어 보라. 구원받은 당신이 지금 빚지 있다면 그 빚은 성령에 대하여 지고 있는 빚이다.
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다. 이 구절 말씀은 “땅 위에 있는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골3:5)는 말씀이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애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였느니라.”(갈5:24)는 말씀 등과 함께 암흑시대 카톨릭교에서 널리 이용되었던 구절인데, 4세기에 걸친 긴 암흑시대 동안 그들은 다른 모든 반성경적 관행들과 함께 육신에 대해 가혹행위를 가하는 것이 가장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권장하는데 이용했다.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는 말씀을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영이 살아난다.’로 해석한 그들은 이것을 몸소 실천하려고 애썼고 이것이 지나쳐 극도의 고행을 수행하려고 애쓴 결과 육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고통을 견뎌 내며 육신을 자랑하고 육신을 내세우는 웃지못할 아이러니를 연출했는데, 실을 카톨릭에서 행하는 이런 관행의 뿌리가 중세 암흑시대 훨씬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예컨대 2,3세기경의 오리겐 같은 사람도 몸소 이런 자학행위를 통하여 자기 행위로 차원 높은 영적 수준에 도달해 보려고 애를 썼다. 카톨릭에서 미혼자가 기혼자보다 한결 수준 높은 영적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표방하게 된 이유도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고전7장에서 바울이 혼인에 대해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한다지만, 그것은 바울의 언급을 곡해하면서 나온 것이다. 결혼하여 가족을 거느린 사람보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아무래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그만큼 더 기회가 많고 시간 여유가 많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 독신으로 사는 것이 영적 삶에 더 도움이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독신자가 가정을 거느린 사람보다 시간 여유가 더 많다는 것도 그 시간을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사용할 때나 그렇지, 그 시간과 기회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극단적 사례로 중세 시대에 “주상고행주의파”(柱上苦行主義派, stylite)라는 인습적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4세가 말에서 5세기 중엽까지 살았던 시리아의 시몬 스타일라이트라는 카톨릭 성인이 30년 동안 기둥 위에 올라가 살면서 설교를 했다고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 밤이 되나, 날이 새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고 많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놓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앉아 고행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이들을 두고 주상고행주의파라고 일컫는다.
시몬 스타일라이트는 처음 12피트 높이의 기둥에 올라앉아 있다가 그 다음에는 15피트로 높이고 나중에는 20피트로 높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서 그만큼 더 하늘에 가까이 접근함으로서 선과 은혜를 더 누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마지막 기둥 위에 올라갔을 때 그 꼭대기에 사방 3피트 넓이의 널빤지를 놓고 앉아 거기서 먹고 자고 싸기를 계속하며 20년을 보냈다. 목욕도 비가 와야만 그 빗물로 몸을 적시는 것이 고작이었고, 비바람 눈보라를 고스란히 다 맞고 내려쬐는 직사광선과 밤이슬 찬 서리를 가릴 만한 덮을 것 하나 없이 살았으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한 그가 하던 일이라곤 죄를 회개하고 애통해 하면서 속죄는 것이 전부였고,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성경을 읽으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설교하면서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즐거움과 소망의 기쁨은 조금도 누리지 못한 아주 불쌍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만약 당신이 경건주의나 거룩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지상에 살았던 인물들 중 당신에 대하여 이 사람만큼 거룩하게 여겨질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그는 거룩하지만 했던 게 아니라 또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죽은 뒤 기둥꼭대기를 보니까, 긴 머리, 긴 수염으로 뒤덮인 더러운 몰골 위에 구더기와 파리 떼만 우글대고 있었더란다. 그는 마약에 도취된 사람이나 다름없이 머리가 돈 사람이었다.
성경 어디에 이런 삶을 두고 거룩하다고 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도들 가운데에 누가 이런 따위 미친 짓을 했던가? 사도들은 시장거리를 누비고 다니거나, 집집마다 찾아다니거나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황야를 넘어 먼 곳까지 찾아가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복음을 전하였으되, 혼자 구석방에 틀어박혀 오줌똥을 깔아뭉갠 채 도사리고 앉아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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