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판 것을 이제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소서.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음이니이다.
6 이 두 해 동안 이 땅에 기근이 들었으나 아직도 오 년이나 이삭이 패지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 것이니이다.
7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당신들에게 후손을 보존하시고, 당신들의 생명을 큰 구원으로 건지시려고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나이다.
이처럼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분의 독생자의 십자가 처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행2:23)
행2:23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을 따라 내어주신 그를 너희가 붙잡아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요셉은 하나님의 긍정적인 목적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5절) * 후손을 보존하시는 것(7절) * 당신들의 생명을 큰 구원으로 건지시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비록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팔려 온 것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요셉은 그 사건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니”(8절)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분명히 공존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적이요, 상호보완적이고, 뒤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두 가지 모두 그 기본 속성은 그대로 독립적으로 유지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요셉의 해석 그대로 적용된다. 바로 이것이 이 두 가지 주요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이다.(눅17:1) 칼빈(1509-1564)이나 아르미니우스(1560-1609)는 이 두 교리와 해석에 기여한 바가 없다. 우리는 성경이 이 두 가지 교리에 접근하는 그 방식을 채택하면 된다.
눅17:1 그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 있으리라!
8 그러므로 이제 나를 여기에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니, 그 분이 나를 파라오에게 아비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가 되게 하시며, 온 이집트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8절은 삿17:10과 비교해 봐야 한다. 두 경우 모두 아버지란 제사장 혹은 종교적 조언자를 의미한다. 두 경우 모두 이 세상의 이교적 우상숭배와 관련된다. 두 경우 모두 아버지란 기독교가 등장하기 이전의 이방 종교들과 연관되어 있다.
삿17:10 미카가 그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그리하면 내가 해마다 은 열 세켈과 옷 한 벌과 네 양식을 주리라." 하니 그 레위인이 들어가더라.
파라오의 눈에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창41:38) 요셉은 그의 수호신이 아니다. 그는 파라오의 두 번째 생명의 창시자 즉 영적인 제사장이었다.
창41:38 파라오가 그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으리요?“
이 사실은 요셉에게 있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요셉은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분의 예표이기 때문이다.(히3:1-2) 요셉은 제사장일 뿐 아니라(창41:45) 또한 선지자이며(창41:25-31) 어느 정도는 왕이기도 하다.(주와 치리자라는 용어가 창45:8에 나와 있다.)
히3:1-2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기를 마치 모세가 그분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창41:45 파라오가 요셉의 이름을 사프낫파아네아라 부르고, 또 온의 제사장 포티페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요셉이 나가 이집트의 온 땅을 치리하니라.
창41:25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파라오의 꿈은 하나니이다.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그 분이 하실 일을 보여 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버지께 말하소서.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이렇게 말하더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온 이집트의 주로 삼으셨으니 지체하지 말고 내게로 내려오셔서
10 아버지께서는 고센 땅에서 거하소서.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녀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떼와 아버지의 소떼와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나와 가까이 있게 하소서.
11 기근이 아직도 오 년이나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혹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궁핍에 이를까 함이니이다. 하더이다' 하소서.
12 보소서, 당신의 눈들이 보고 있고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데서 당신들에게 말하는 것은 내 입이니
13 당신들은 이집트에서의 나의 모든 영광과 당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을 내 아버지께 말씀하시고 속히 내 아버지를 여기로 모시고 오소서." 하고
14 그가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그의 목을 안고 울더라.
15 또 그가 그의 모든 형들과도 입맞추며 안고 울더라. 그제서야 그의 형들이 그와 이야기하더라.
요셉은 이제 형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대려오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고센 땅을 주고자 함이었다. 고센땅은 이집트의 동북쪽 끝에 있는 비옥한 땅으로 비돔과 라암셋(출1:11)을 포함하고 있다. 어쩌면 헬리오폴리스(온 창41:45)도 포함될지도 모른다.
출1:11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장할 공사 감독자들을 세우고 무거운 짐을 지워 그들을 괴롭히니라. 그들은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성읍들로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더라.
창41:45 파라오가 요셉의 이름을 사프낫파아네아라 부르고, 또 온의 제사장 포티페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요셉이 나가 이집트의 온 땅을 치리하니라.
이곳은 비옥한 초장으로(창47:6,11) 람세스의 땅으로 불린다. 요셉은 흉년이 아직 5년이나 더 남았으며 그 기간동안 자기가 형들의 가족들 전부 부향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베냐민을 부등켜 안고나서 모든 형제들에게 진정한 화해의 표식을 보여주었다.(15절 아1:2 시2:12)
창47:6 이집트 땅이 네 앞에 있으니 이 땅의 가장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제들이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라. 그리고 만일 그들 가운데 활동력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을 네가 알면 그들로 내 가축을 돌보는 관리자로 삼으라.
창47:11 요셉이 파라오가 명령한 대로 그의 아비와 형제들을 정착시켰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소유를 주었으니 가장 좋은 땅 라메세스의 땅을 주었더라.
아1:2 그로 그의 입맞춤으로 내게 입맞추게 하소서. 이는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니이다.
시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노하실 것이요, 그가 조금만 격분하셔도 너희가 그 길에서 망하리라.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신중한 독자들은 1절-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21가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구원받은 죄인이 가서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라는 명령을 받았다는(9절) 사실은 가장 축복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는 계시를 받고 그분을 영접하기 전에는 결코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이다.(15절)
16 파라오의 집에 소문이 들려 말하기를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 하니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매우 기뻐하며
17 파라오가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라. 너희는 너희 짐승에다 싣고 가서 카나안 땅에 도착하면
18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들을 데리고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이집트 땅의 좋은 것으로 주리니 너희가 그 땅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분문의 내용은 읽으면 금방 이해가 되는 내용으로 별 주석이 필요없을 것 같다. 파라오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의 재회에 대해 들었고 이에 야곱을 데려오려는 계획을 승인한다.
19 이제 네가 명을 받았으니 너희는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수레들을 가져다가 너희 자녀들과 아내들을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리고 오라.
20 또한 너희의 물건들을 중히 여기지 말라. 이는 온 이집트 땅의 좋은 것이 너희의 것임이라.'하라" 하더라.
21 이스라엘의 자식들이 그렇게 하니 요셉이 파라오의 명대로 그들에게 수레들을 주고 길에서 먹을 양식을 주더라.
22 그가 그들 모두에게 옷 한 벌씩을 각자에게 주었으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 개와 의복 다섯 벌을 주더라.
23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와 같이 보냈으니 즉 수나귀 열 마리에 이집트의 좋은 것들을 싣고 암나귀 열 마리에는 아비가 길에서 먹을 곡식과 빵과 음식을 실었더라.
“또한 너희의 물건들 중히 여기지 말라.”는 말은 카나안 땅에 혹시 뭔가응 남겨두고 오게 될지라도 걱정하지 말하는 뜻이다. 이집트는 내려오면 모두 보상해 주겠다는 약속이 뒤이어 나온다.
베냐민이 다시 5이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나오는 것을 주목하지 바란다.(창45:22 창5:5)
창45:22 그가 그들 모두에게 옷 한 벌씩을 각자에게 주었으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 개와 의복 다섯 벌을 주더라.
창5:5 아담이 살았던 모든 날들이 구백삼십 년이었고, 그가 죽으니라.
21절의 수레들은 바퀴가 4개 달린 것이 아니고 2개 달린 수레를 보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문에 부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집트에는 부추가 없었다고 추정해야 하는가?
만약 이러한 논리가 올바른 논리라고 한다면 칠십인역은 A.D.200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주석에서든 칠십인역이 인용될 때는 항상 오리겐, 유세비우스, 발렌티우스 혹은 말시온이 사도 요한이 죽은 후 60-400년 사이에 만들어 낸 그 필사본에서 인용하기 때문이다.
24 그가 그렇게 해서 자기 형들을 보내니 그들이 출발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당신들은 길 가다가 다투지 마소서." 하더라.
요셉은 형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잘 알고 있다. 11명의 어른과 그들의 가족들이 긴 여행길에 서로 부딪치고 다투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것이다.
25 그들이 이집트에서 올라와서 카나안 땅으로 들어와 그들의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26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요셉이 아직 살아 있고 그가 온 이집트 땅을 다스리는 치리자가 되었더이다." 했으나 야곱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으니 이는 그가 그들을 믿지 않았음이더라.
27 그들이 야곱에게 요셉이 자기들에게 했던 모든 말을 하였더니,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들을 보고서야 그들의 아비 야곱의 정신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도다.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더라.
요셉의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 약간의 다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야곱은 머리를 저으면서 비틀거린다. 아마 기절할 것 같다. 부축을 받고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간 야곱은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자식들의 말은 믿지 않았지만 눈으로 실제 보니까 정신이 든 것이다. 옥수수, 콩, 밀, 보리.
'강 해 > 창세기(37-5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46장 28절 - 34절 (2) | 2025.06.29 |
---|---|
창세기 46장 1절 - 27절 (4) | 2025.06.29 |
창세기 45장 1절 - 4절 (1) | 2025.06.28 |
창세기 44장 9절 - 34절 (2) | 2025.06.27 |
창세기 44장 1절 - 8절 (2) | 2025.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