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나는 왜 칼빈주의를 믿지 않는가?④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4. 11:13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이제 칼빈주의의 네 번째 강령인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즉 거력할 수 없는 은혜 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워낙 권능이 크시므로 사람들에게 그 큰 힘을 발휘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사람이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어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의 구원의 은혜를 이런 사람들에게 베푸신다. 그 결과 그들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즉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

다음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런 주장에는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초기의 청교도들 즉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믿는 사람들 중에 많은 자들이 유니테리언 신자가 되었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① 어떤 사람이 믿기를 거부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하여 그 사람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신다.

②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 둘을 합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 모두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이들의 교리를 다시 정리합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믿기를 거부해도 그의 의지에 반하여 그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하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 극단적 칼빈주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창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 교리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탄 마귀가 있고 마귀의 천사들이 있으며 이들은 다 지옥으로 갑니다.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다 지옥으로 갑니다.

마23:37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해 논박하십니다.

마23:37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모아 구원하려 하셨지만 즉 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보여주고 메시야 왕국을 주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 일을 원치 않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분의 은혜에 저항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서 그들 모두의 죄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영접하라고 구원의 초청을 하셨지만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창조물들이 있습니다.

이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이 원치 않는 일, 즉 그 사람이 선택하려 하지 않는 일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어떤 처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는 그 처녀에게 구애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처녀가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존중하며 좋아하지만 당신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말합니다. ‘저는 이런 이유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는 간절히 요청합니다. 선물을 주고 꽃을 보냅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러나 처녀는 같은 말을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이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이 청년은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강제적으로 저를 사랑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하며 자기와 결혼해 다라고 요청하다가 그녀가 거부하자 끝에는 강제적으로 그녀의 몸을 취하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강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 주면서 늘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서 사람이 자기 의지에 반하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하나인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반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런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위대한 분리 혹은 분열(The great Divor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맨 마지막에는 단지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남게 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다른 한 부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뜻이 이러어지기를 원한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들의 뜻대로 스스로 지옥을 택하였습니다. 사람이 선택할 수 없다면 지옥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기쁨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구원)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찾는 자들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입니다.”

이 자유로운 세상에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진저어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그 사람의 뜻에 반하는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뜻을 존중할 뿐입니다.

밀턴의 실낙원에는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아주 심오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천국에서 섬기는 것보다 차라리 지옥에서 통치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결코 이를 막지 않으십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즉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과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속성과도 배치됩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음이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스데반은 마음을 딱딱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거부하는 저들에게 5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7:51 너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한 것과 같이 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resist)

유대인들과 그들의 조상들은 항상 성령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은혜에 저항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정확하게 저항하다.(resist)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분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의 멱살을 잡고 강압적으로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는 분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성경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이 의존하는 성경 구절을 롬9:13,20,22-23입니다.

롬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롬9:22-23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 대해서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으니

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칼빈주의자들의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미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주성경이 있으면 이 구절의 관주를 보기 바랍니다. 이 구절은 말1:2-3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말1:2-3 주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주가 말하노니,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과 그의 기업을 광야의 용들을 위하여 황폐하게 두었느니라.

말라기서를 보면 지금 주님께서 야곱이라는 어떤 한 개인과 에서라는 다른 어떤 한 개인에 대해 말씀하지 않음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그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께서 야곱이라는 어떤 한 개인을 예정해서 천국으로 보내시고 에서라는 다른 어떤 한 개인을 예정해서 지옥으로 보내는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야곱에게서 나온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그의 형제 에서에게서 나온 에돔이라는 국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국가가 오랫동안 이 땅에 거하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특별히 에돔은 이스라엘에 행한 여러 가지 악한 일, 특별히 그들의 구원을 막으려 했던 악한 일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서라는 한 개인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에돔이라는 국가를 미워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악한 일들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첫째로 개개인의 예정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지 영원히 하늘에서 일어날 일 즉 구원에 대해 말씀하지 않습니다.

말1: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곤궁하게 되었으나 우리가 돌아가서 황폐한 곳들을 세우리라." 하였으나,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그들은 쌓을 것이나 나는 헐어낼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을 "악의 경계라", 또 "주께서 영원한 진노를 품으신 백성이라" 부르리라.

즉 이 말씀들은 개인의 예정에 대한 것도 아니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구원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내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구분하시고 에돔이라는 국가는 몇백 년 동안의 악행을 보신 뒤 땅에서 멸망시키겠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진짜로 혐오한다는 말이 아니라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눅14:26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정녕,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은 채 내게로 오면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여기서의 미워하다는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혐오한다는 말이 아니고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부모보다 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창29:31 주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주께서 그녀의 태를 열어 주셨으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더라.

미움받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30절을 보겠습니다.

창29:30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갔고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으며 다시 칠 년을 라반을 위하여 봉사하였더라.

그러므로 레아가 미움받았다는 말은 라헬보다 덜 사랑받았다는 뜻이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대로 증오하는 것 혹은 혐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아주 이상하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역성경> 창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번역하면 독자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에돔이라는 국가를 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지난 몇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향해 사악한 일들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서 에돔이라는 국가를 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에돔이라는 국가를 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에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신뢰하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예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에서의 국가, 즉 에돔은 하나님께 덜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모든 개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칼빈주의자들이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롬9:22-23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 대해서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으니

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긍휼의 그릇이 될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그분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고 기다렸습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은 그들을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진노의 그릇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롬9:15의 파라오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롬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가엾게 여길 자를 가엾게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일으키고 강제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구약성경 출애굽기를 잘 보기 바랍니다. 신약 성경이 무언가를 말하면 우리는 그것의 인용 출처인 구약 성경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7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데도 있고(4:21 7:3,13 9:12)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데도 있습니다.(7:14,22 8:15,19,32 9:7,34)

출4:2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너는 내가 네 손에 준 그러한 모든 이적들을 파라오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리니 그는 백성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출7:3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나의 표적들과 나의 이적들을 이집트 땅에서 늘려 행하겠으나

출7:13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므로 그가 그들에게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더라 .

출9:12 그러나 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그들에게 듣지 않았으니,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더라.

출7:14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여 백성이 가는 것을 거절하는도다.

출7:22 이집트의 마법사들이 그들의 마법으로 그렇게 행하니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주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그들에게 듣지 아니하고

출8:15 그러나 파라오가 한숨 돌리게 되자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그들에게 듣지 않았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더라.

출8:19 그러자 마법사들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니이다." 하나,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에게 듣지 않았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더라.

출8:32 파라오가 이번에도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백성을 가게 하지 아니하더라.

출9:7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니, 보라, 이스라엘인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래도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가 백성들을 가게 하지 아니하더라.

출9:34 파라오가 비와 우박과 천둥이 그친 것을 보고 다시 죄를 지어 그의 마음이 완악해졌으니, 그와 그의 신하들이 그러하였더라.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말이 출4:21에 가장 먼저 나오므로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를 강퍅하게 하심이 나옵니다. 3:19을 보기 바랍니다.

출3:19 내가 확실히 아노니, 어떤 강력한 손으로도 이집트 왕이 너희를 결코 가게 하지 아니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파라오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를 강퍅하게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파라오가 마음을 연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궁극적 파멸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