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이제 나는 칼빈주의자들의 5대 강령 중 세 번째 강령 즉 제한 속죄 교리의 오류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먼저 제한 속죄 교리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비평을 시작하겠습니다.
칼빈주의 제한 속죄 교리 :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들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지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속죄값을 치르셨다.
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은 제한 속죄 교리를 지지합니다. 사실 나는 제한 속죄 교리를 믿는 분들을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이와 다르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적 속죄 교리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면 누구나 이런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같은 말을 우리와 달리 읽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이나 모든 사람 등의 말이 나오면 있는 그대로 세상이나 모든 사람으로 읽지 않고 세상의 일부나 일부 사람들로 읽습니다. 예를 들어 요3:16을 보겠습니다.
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여기의 세상을 그냥 세상이 아니라 구원받은 세상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의 세상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낸 것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자기의 생각을 성경 본문에다 집어넣는 것이며, ‘아이서지시스’(eisegesis)라고 합니다. 즉 이것은 자기 해석 혹은 자기 사상을 구절에 삽입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해석입니다.
반면에 내 생각을 접어두고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을 끄집어내어 그대로 해석하고 믿는 것은 엑서지시스(exegesis)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미를 밝히는 것이란 뜻인 그리스어 ‘엑세게시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성경 본문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본문을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이서지시스’는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독자의 신학을 그 안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절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요3:16-18을 보기 바랍니다.
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하려 하심이라.
요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
이제 롬5:6-8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롬5:7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르지만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 즉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선택받은 자들만 경건하지 않은가요? 아니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경건하지 않은가요? 만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경건하지 않다면 또 예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면 논리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고후5:14-15를 보겠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라.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몇몇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죽었다고 하면 말이 될까요? 성경이 모든 사람이라고 하면 말씀 그대로 모든 사람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상한 색안경을 쓰고는 여기의 모든 사람이 실제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성경이 온 세상이라고 하면 온 세상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부를 말하지 않습니다.
딤전2:4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주님께서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성경 해석의 황금률은 있는 그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딤전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
벧후3:3-4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고 멸망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니 하나님은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사람들, 어떤 부류의 사람들, 선택받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실까요? 선택받은 몇몇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일까요?
그런데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심지어 자신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멸망하였습니다. 요일2:1-2을 보겠습니다.
요일2:1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2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이시고 속죄를 이루셨습니까? 오직 선택받은 자들인가요? 아니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인가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믿는 분들은 여기의 세상이 온 세상이 아니라 크리스찬 세상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사실 우리 마음대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요일2: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여기의 세상은 결코 크리스천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세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이것을 크리스천 세상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더러 선택받은 크리스천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꿀이 되니까요?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여기의 세상은 결코 구원받은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요한일서 2장의 세상은 명백하게 온 세상을 말합니다. 여기의 세상은 하나님과 정반대가 되는 세상 시스템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잗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전체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고 그들만을 위해 속죄사역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한 속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들로 인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일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고 믿는 것은 성경과 다른 주장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분의 속성이 그분에게 허용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절대로 의로우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지은 자들에게 형벌을 주어야 합니다.
또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그분의 속성입니다. 그분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은 반드시 사랑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분은 모두를 사랑해야지 일부만 사랑하시면 안 됩니다. 그분의 속성상 그분은 그런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위배되는 일을 결코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위배되게 어떤 사람은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미워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어느 농부에게 깊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근처의 소년들을 거기서 수영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이 수영하다가 익사하면 안 되므로 농부는 거기에 울타리를 두르고 접근 금지, 수영금지 표지판을 크게 만들어 붙였습니다.
어느날 농부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와와 보니 동네 소년들이 거기 와서 수영하다가 익사하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농부가 트랙터를 멈춘 그 표지판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애들아, 이 표지판에 무어라고 적여 있냐? 접근금지, 수영금지라고 적혀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가 이것을 위반하고 여기에 들어와서 수영하다가 빠져 죽게 되었으니 빠져 죽오도 싸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그 세 소년이 빠져죽는 것을 보고 있다면 과연 이 농부는 사랑이 있는 사람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 농부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전혀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성경의 하나님과 이것을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법을 주셨습니다. 즉 선악과 먹는 것 금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명령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법을 어겼으므로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실 아무도 구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을 하면 사실 반만 맞고 반은 틀립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동시에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 죄로 인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절반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분명히 법을 주었는데도 그들이 그것을 어기고 죄를 지었으니 그들을 무조건 지옥에 넣어야 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면 즉 하나님이 그 일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 농부처럼 이아들이 빠져죽는 것을 기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면 그분은 무자비한 하나님이 됩니다. 이런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일 수는 있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닙니다.
지금 세명의 아이들이 법을 어기고 죄를 지어 빠져 죽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의 하나님은 이 세 아이들 가운데 하나에게만 구명줄을 던집니다. 그리고 줄을 당겨서 그 아이를 구출해 줍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아이가 빠져 죽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바로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씀드렸듯이 나는 성경에서 이런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도덕적 윤리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면 전적으로 그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분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전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나는 나의 모든 사랑을 그분께 바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단지 일부만을 사랑하는 하나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구조하려 하지 않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전적으로 사랑이신 성경의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세 아이들처럼 온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어 타락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 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물에 빠진 세 소년 모두에게 구명줄을 던져 주십니다. 그리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들을 구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 명 중 하나는 그 구명줄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두 명을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다가 빠져 죽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느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요한복음 16장에 있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에게, 즉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증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구명줄을 던지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명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자기가 던지는 구명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줄을 받게 하실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강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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