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주의에서의 14년 여정③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9. 10:12

반대를 꺾음

때로 어떤 사람들은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나는 대개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미소를 띠면서 그들을 정중히 무시하는 태도로 그들의 도전에 답을 하였습니다. 칼빈주의 교사들의 말을 오랫동안 들었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적 선택’을 반대하는 어떤 말에도 즉각적으로 외워서 대답할 수 있는 레퍼토리 대사가 있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 구절들에 대해 칼빈주의 교사들이 말하는 것들에 조직적으로 중독이 되었는데 이 구절들은 대개 문맥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칼빈주의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실제로 내가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다수 말씀의 참된 의도 혹은 의미를 파악하는 일에 찬물을 부었습니다. 칼빈주의 교사들의 가르침은 너무나 완벽해서 궁극적으로 나는 네 포인트 칼빈주의를 대적하는 견해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칼빈주의의 선택 교리라는 요새는 그 거짓 교리를 깊게 심어 주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므로 거의 난공불락의 교리였습니다.

딤후2:24-26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말아야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실 수도 있으니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찾게 하려함이라.

따라서 나는 성경기록들을 상세히 보여 주면서 구원을 다른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호소를 다 거부하였고 이와 관련된 성경의 모든 것을 나의 편협한 칼빈주의적 이해에 따라 해석하였습니다. 나는 칼빈주의의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를 대적하는 공격들을 기계적 반응들로 방어했는데 이것은 결국 나의 중독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함

나는 ‘무조건적 선택’과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자시라면 그분은 모든 사건들을 전적으로 통제하셔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전적 주권을 갖지 않은 분이 되고 맙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실제로 그것은 나를 통해 그분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결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전적 책임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개인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복음을 믿었다면 그것은 실제로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믿음의 창시자이셔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구원에 기여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서 기인하는 자주권은 그 어떤 것이라도 칼빈주의적 사고에서는 육신의 죄였습니다. 나는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받은 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수여된다고 믿었습니다. 스프로울은 다음 인용문에서 칼빈주의적 예정 교리를 잘 요약합니다.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 바로 그 핵심부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영원 전부터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들이 단지 허구에 지나지 않는 속임수이고 이미 예정된 것들에 대한 헛된 놀음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본을 자세하게 써 놓으셨고 우리는 단지 그분의 시나리오 대본에 맞게 현 세상에서 그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R. C. Sproul, 「Chosen by God」, p. 51.

슬프게도 이제 나는 당시에 내가 사람의 능력을 높이려는 모든 시도를 대적하여 논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의 능력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을 대적하여 바쁘게 논쟁을 하다가 결국은 내가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을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분의 다른 속성들 중 어느 것도 결코 위반하거나 축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어렵게 배웠습니다. 나는 그분의 주권을 그분의 사랑과 또 다른 모든 속성들보다 과도하게 강조하고 과장하였습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엘리트 의식을 가짐

과거를 돌아보니 나는 그때 ‘사랑’을 소모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실제로 모든 사람을 한 가지 기준으로 사랑하는 동안에는 또 다른 기준으로는 그들을 깊이 돌봐 줘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그리하시지 않았나요? 그분은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내가 엘리트라는 미묘한 느낌이 내 생각 속에 슬며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더 높은 진리라 불리는 것들(칼빈주의 5대 강령 같은)과 성경의 진리로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차별 의식과 편견이 슬며시 내 안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내게 수여되었으므로 나는 배우는 것이 느리고 어눌한 사람들에 대해 은연중에 무관심해졌습니다. 그들에 대한 잘못된 동정심을 보이는 내 태도를 숨기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베푸는 척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에게 연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비슷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과 교제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성도들에게 한 번 전해 내려온 믿음은 오직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신비하고도 주권적인 목적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들을 선택하셨을까요? 실제로 그들은 진정으로 믿었을까요? 그들은 거짓으로 회심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들은 믿음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그런 열등한 믿음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을까요? 예정은 하나님을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그분은 모든 일, 심지어 버림받은 자들의 불신으로 인해서도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칼빈주의로 빠져들던 이 당시 나의 생각은 콘트리트처럼 아주 단단하게 굳어졌습니다. 누구도 내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성경기록의 증언과 학자들, 목사들, 지도자들 그리고 다른 크리스천들의 증언에 의해 나는 이런 가르침들이 진리라는 사실을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예정의 목적들은 부인할 수 없으며 우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동기들을 의심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하나님 위에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모순이 발견되면 나는 ‘그분의 길들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라는 칼빈주의자들의 진부한 표현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아무도 풀 수 없는 신비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선택이 정말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가 하는 의문이 가끔씩 내 마음속에 생기면 나는 재차 내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성경기록들로 돌아갔지만 성경기록들은 그저 칼빈주의를 내게 다시 가르쳐 줄 뿐이었습니다. 이런 시도는 단지 칼빈주의를 재확증해 주었을 뿐이고 거기서 벗어나거나 잠시라도 반대하는 것을 저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예정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궁극적으로 사람들 [즉 구원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칼빈주의가 가르치고 있음을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도록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자신을 대적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 내 마음의 생각이었습니다. 믿음에 다다르지 못한 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의 추정에 따라] 그분을 거부하는 선택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나는 버림받은 자들, 즉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어쨌든지 이런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내 양심에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는 성령님의 경고라는 것을 당시에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칼빈주의 서클에 만연한 이 은밀한 엘리트주의는 슬며시 내 생각 속으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작동하는 마음의 통제(심리학의 마인드 컨트롤 같은 세뇌 작용)는 처음에는 단순한 제안을 통해 그리고 나중에는 거짓 지식을 통해 이런 생각들을 내 안에 심었고 이런 가르침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나를 통제하였습니다. 한 기준에서 보면 나는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기준에서 보면 일들이 바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생기는 혼동은 의문들을 가져왔지만 슬프게도 다른 칼빈주의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들을 가장 먼저 내 안에 속임수를 심어 준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찾았습니다.

뒤돌아볼 때 그것은 더 많은 질문들을 생산하는 해답들을 가져다주는 질문들의 사이클이었습니다. 새롭게 무엇을 이해할 때마다 나는 나의 신학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이 중대한 가정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내가 새롭게 배우는 모든 것과 새롭게 성경을 이해하게 된 모든 것은 항상 무조건적 선택과 같은 방향으로 이해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무조건적 선택은 내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내 마음에 들어오면 그것은 전에 형성된 내 생각의 구조와 맞아야 했습니다.

당시에 나는 신학의 스프레드시트를 합성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와 일치하도록 나의 모든 교리들을 수정했습니다. 그 결과 내 모든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다.”는 복합 구조체를 만들었습니다. 한 구절이 더 완전하게 이해될 때 내 신학의 자료집 내의 다른 항목들이 조정되어서 내 신학의 전체 시스템은 하나님이 내 삶에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조정하신다는 견해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모순이 되는 구절들은 내 시스템에 맞도록 재해석되었고 결국 이 신학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같은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하나를 수정하면 다른 것을 수정하게 되고 또 다른 것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새로운 조명 없이 논리와 이성적 해석의 늪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나?

이런 강해들과 설교들을 통해 칼빈주의 교육을 계속 받으면서 나는 이런 교사들이 **구원을 주는 참된 믿음(saving faith)을 정의하는 데 집착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결국 모든 의문을 함축하는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즉 그들은 결국 ‘누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을 미리 정하신다면 그분께서 순종도 미리 정하지 않으실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예정하신다면 또한 선택받은 자들의 복종(혹은 순종)도 미리 계획하지 않으실까요?

** 칼빈주의자들은 꼭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자기들의 신학을 유지하려 한다. 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말만 나오지 ‘구원하는 믿음’ 혹은 ‘구원을 주는 믿음’(saving faith)이라는 말은 없다. 저자의 간증을 통해 곧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신조어이다.

이런 성가시고 진이 빠지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은 복종(순종)을 잣대로 사용함으로써 선택받은 자들을 확인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이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선택을 옹호하는 칼빈주의자들은 사람이 어떤 종류의 믿음으로 믿어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개인적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까? 슬프게도 칼빈은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수백 년 동안 모방해 온 선례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는 ‘덧없이 사라지는 믿음’(evanescent faith), 즉 거짓 믿음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덧없이 사라지는 믿음’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고 칼빈이 말하는 것을 다음 인용문에서 보기 바랍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믿기 어려운 것임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이 때로는 선택받은 자들이 영향을 받는 것과 비슷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행13:48). 그래서 심지어 그들이 판단해 봐도 그 두 부류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늘의 선물을 맛본다고 한 것(히6:4-6)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잠정적 믿음’(temporary faith)이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하신 것(눅8:13)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권능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참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더 잘 확신시키시고 그들이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게 하시며 또 양자 삼으시는 성령님이 없이도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선하심과 같은 것을 그들의 마음속에 주입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과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믿음’(fading faith)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유사점이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바울이 칭송한 확신, 즉 큰 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갈4:6; 롬8:15 참조) 부르는 확신이 풍성하게 자란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화해의 호의를 베푸신다고 믿는다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이는 그들도 혼란 속에서 합당한 분별도 없이 스스로 하나님의 화해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런 정도의 조명의 빛을 주시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들이 그분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확신은, 이 점에서 그분께서 자신의 선택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증언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버림받은 자들은 결코 온전한 결과나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화해의 호의를 보이실 때 이것은 결코 그분께서 그들을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보호 아래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잠시 동안 베푸는 긍휼’(present mercy)을 나타내실 뿐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살아 있는 믿음의 뿌리를 심으시고 이로써 그들은 심지어 끝까지 견디며 인내할 수 있다(마24:13). 그러므로 반대 주장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은혜를 보이신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잠시 동안 베푸는 은혜’(present grace)의 감정으로 조명의 빛을 주시지만 그것은 후에 ‘사라져 버리는’(evanescent) 빛으로 드러나고 만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전혀 없다.**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erdmans Publishing Co., 1989, translated by Henry Beveridge. 3.2.11.

참 믿음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칼빈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이것은 TULIP의 마지막 요소인 ‘성도들의 견인’ 교리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순진하게도 나는 ‘성도들의 견인’이란 성도가 믿는 일에 인내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참 믿음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인지 혹은 그것이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거짓 믿음인지를 검토하느라 심히 분주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은 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거의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만일 선택받은 자들이 ‘위에서 주어지는 믿음’의 은혜와 믿기도 전에 중생하는 은혜 둘 다를 받았다면 그들은 분명히 삶에서 순종을 위해 필요한 은혜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견인’은 성도가 믿음 면에서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 면에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즉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야말로 한 사람이 위에서 주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는지 혹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서 나오는 거짓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실제적 시험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 경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혹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매사에 주님께 복종하는 것 혹은 복종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소유한 믿음이 어떤 종류인지를 드러냅니다.

일단 누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는가에 대해 내가 깊이 생각하다 보니 칼빈주의로 빠져드는 일이 가속화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질을 조사하면서 그들에게 향했던 손가락이 이윽고 내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원동력을 로마서 2장 1절에서 확인해 줍니다.

그러므로, 오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 변명할 수 없나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들을 행하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너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참 믿음의 증거를 수집하면서 동시에 나에게서도 참 믿음의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위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종하는 것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내가 항상 참 믿음에 필요한 ‘매사에 순종(복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선택은 이해하기 쉬웠지만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미묘하게도 구원의 확신의 기준이 내가 믿는 것으로부터 내가 늘 순종하는지 여부로 옮겨졌습니다. 나는 밤새도록 침대에 누운 채 그날 내가 행한 일을 자세히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일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죄를 지었는가? 그것은 내가 선택받지 않았음을 입증하지 않는가? 내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지 않는가? 나는 충분히 고백했는가? 나는 진정으로 고백했는가?

분명하게도 나는 완전하게 믿음으로 걷고 있지는 않았습니다(즉 거의 완벽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나의 구원에 행위들을 더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바르게 행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나 자신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순종이 없었으므로 위로나 용서의 느낌 혹은 구원의 확신이나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셨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내가 완전하게 순종했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확신을 내게 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불순종에 따른 정죄라는 두려움, 즉 나를 쇠약하게 하는 두려움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나에게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 모든 죄들의 값을 다 지불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왜 나는 왜 이리 죄 짐에 눌려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칼빈주의가 범인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주의의 이런 유인 상술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것과 늘 막판 싸움을 일으킵니다.

‘성도들의 견인’이라는 칼빈주의의 마지막 요소는 궁극적으로 칼빈주의자가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선택을 입증하고 확신하게 하는 방향으로 그를 몰고 가는데 이것은 보통 **‘로드십 구원’(Lordship salvat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로드십 구원’(Lordship salvation)은 로드십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예수님이 성도의 주인이시고 성도는 주인의 뜻에 100% 복종해야 하는 노예이므로 성도의 삶에서 주님의 뜻에 거의 완벽하게 맞는 순종이 이루어져야만 그가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성도를 ‘종’(servant)이라 부르지 않고 ‘노예’(slave)로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서도 꼭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며 성경을 번역할 때도 ‘종’이 아니라 ‘노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드십 구원’을 외치는 대표적인 분이 존 맥아더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