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을 처음 만남
내가 칼빈을 처음 소개받은 때는 적막한 와이오밍의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었던 어느 봄날의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때는 초저녁이었고 도로 상황은 그 지방의 도로에서 늘 그렇듯이 약간 붐비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나는 스프로울(R. C. Sproul)의 로마서 8장 28-30절에 대한 주석 테이프를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자신이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이것은 14년 동안 칼빈주의에 빠졌다가 성경 말씀으로 성경 신자가 된 브렌다 니켈(Brenda Nickel)이 기록한 증언이다. 브렌다는 지금 <더 이상 칼빈주의는 그만!>(Calvinism No More!>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https://www.calvinismnomore.com/
나는 그 순간을 잘 기억합니다. 보름달이 초원의 낮은 언덕 사이를 비추고 있었고 눈발이 도로에서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경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분위기였지만 내 마음은 달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몇몇 사람들만을 선택해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셨을까?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만 선택하셔서 구원하셨을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에 대해 더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 그 시점에 사실 나는 칼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교리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 봄날의 어느 저녁 이 일이 있기 몇 년 전에 나는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성도가 되었습니다. 나의 삶은 새롭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돕기 위해 가능한 한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성도로서 나는 내게 스프로울의 강해를 알려 주었던 내 담임 목사님이 오직 건전한 성경적 교리를 가지고 나를 인도해 주리라 믿었지만 그분은 사람들의 가르침으로 나를 인도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그 목사님이 추천한 가르침이 내가 벗어나기 심히 어려운 길로 나를 인도한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봄날의 바로 그 저녁에 나의 생각은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에 의해 즉각적으로 사로잡혔습니다.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 원리들을 따르는 것들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들이 아니니라”(골2:8).
그날 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죄들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또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위해 지정받기도 전에 내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께서는 내가 수태되기도 전에 이미 나를 구원의 길로 미리 예정하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그분의 선물로 인해 내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내 얼굴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의 눈물로 시작되었던 것은 14년이 지난 뒤에 절망의 눈물로 마감을 했습니다. 몇 년 후에 나는 “이런 절망이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리고 “칼빈이란 이 사람은 진정 누구였던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주의에 매료됨
하나님께서 자신이 구원하기 위해 선택할 자들을 ‘미리 예정하신다’는 개념을 테이프들로 소개받은 뒤에 내게는 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테이프들을 돌려드리기 위해 목사님의 사무실로 걸어가서 이런 가르침들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것들이 내게 준 충격을 논의하기 위해 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는 그분께 나의 생각이 온전히 새롭게 방향 전환을 해서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가지 문제로 질문을 하자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며 “그럴 줄 알았어요.”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당시 내게는 보이지 않는 이 숨겨진 비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꺼려하신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의 이런 ‘선택적 구원’이 성경에 따른 진실인지를 나 스스로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내 의문들에 대해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으셨으므로 나는 목사님이 그런 것들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그분이 동의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하나님의 선택적 특권이 진짜로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프로울의 강의에서 내가 들었던 선택의 형태를 지지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구절들을 발견하고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가르친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 친구들에게 그날 밤 고속도로에서 내가 ‘회심’했음 - 즉 이전과 달리 생각하게 됨 - 을 말하자 그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예정을 지지하는 구절들을 나를 위해 찾아 주었습니다. 내가 얼굴을 돌리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깊이’ 이해하는 것이 강화되었고 그것은 내 생각 속에서 더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나와 내 생각을 그 틀로 빚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목적들 속으로 들어가는 이런 새로운 통찰력을 발견한 것에 대해 특권 의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사실 내 생각은 학자들의 단순한 제안들에 불과한 것들에 완전히 사로잡혔고 이것들을 지지하는 듯한 성경 구절들이 제시되자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새로운 조명하에서 성경 말씀들을 완전히 새로운 틀에서 보고 이해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칼빈이라는 학자의 그럴듯한 지적 솜씨를 신뢰하였고 나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채 이 새로운 해석 시스템에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의 논리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잘못된 교리들에 대해 성경이 경고를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딤후3:6-7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기어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까지 도달할 수 없느니라.
벧전5:8-9 정신을 차리라. 깨어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칼빈주의 방식의 선택적 예정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꼈다는 것은 내가 성경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얼마나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나는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기를 갈망했고 그것이 내 삶에 미칠 영향들에 대해서도 알기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씨가 내 생각 속에 뿌려진 뒤에 나는 칼빈주의 교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5:7)
칼빈주의의 기초를 놓음
내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믿기로 한 뒤부터 내 성경 공부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공부할 나의 새로운 친구들을 모으려고 와이오밍의 눈길, 바람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와이오밍의 이 작은 교회는 나에게 마치 집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성경기록들을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예정을 말하는 듯한 구절들이 나오면 더욱 기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새로 발견한 지식에 대한 확신을 갈망하였으므로 이런 주제가 조금이라도 언급되기만 하면 매우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스펀지처럼 선택에 대한 구절들을 빨아들였고 이 교리에 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을 찾아서 즐겼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암기하는 것이 내게는 쉽고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추적하는 것은 내게 스포츠와도 같았습니다. 나는 카드 파일 암송 시스템을 만들고 인덱스카드에 대문자 ‘P’로 표시된 곳에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구절들을 모두 뽑아서 모았습니다.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가운데 나는 그런 구절들이 나오는 곳에서 그것들을 임의로 뽑아내어 벽돌을 쌓듯이 하나하나 쌓으면서 선택에 대한 개혁주의 관점에 관하여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정, 선택, 부르심, 택하심, 미리 아심 등을 언급하는 구절을 볼 때마다 그것들은 다 내게 단 한 가지, 즉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를 선택하셨다.”를 의미하였습니다. 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예정되었다고 말하는 성경기록들도 오해했습니다. 나는 로마서 8장 29절을 읽고는 내가 구원에 이르도록 미리 예정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나는 성경기록들을 그것들의 문맥 안에서 읽기보다는 항상 칼빈주의 틀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롬8:29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초기의 신학 형성 단계에서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내가 늘 사용하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게 이질적 단어였지만 상황은 곧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내 가족들은 유타주의 쏠트레이크시티로 이사했습니다. 우리는 쏠트레이크시티가 깨끗하고 또 우리가 사는 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계 최상급 스키 코스가 있어 매우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한 뒤 우리는 인생이 상쾌하고 기쁘고 아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와이오밍 교회 친구들을 떠나는 것이 내게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우리는 바람 많은 와이오밍을 뒤로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유타주의 혹독한 여름 더위조차도 우리에게는 환영할 만한 변화였습니다. 유타주에서의 삶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쏠트레이크시티에서의 나의 첫 임무 중 하나는 내가 섬길 교회와 성경 공부를 할 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은 좋은 교회를 찾았는데 그 교회의 여러 성도들은 매해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7년 동안 진행되는 성경 공부를 제공하는 **성경 연구 펠로우십(Bible Study Fellowship, BSF)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 Bible Study Fellowship은 구조화된 성경 공부 시스템을 제공하는 평신도들의 국제 기독교 교파 간 교제 또는 파라 교회(Para-church) 교제이다. 1959년 영국의 전도사인 존슨(Audrey Wetherell Johnson)이 이를 설립했다. <위키백과>
쏠트레이크시티에서의 첫 해에 나는 모든 범주의 새로운 사람들과 배우고 섬기게 되면서 새로운 기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주의 예정 교리에 대해 아직 공개적으로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나는 선택에 대한 암시들이 그들의 성경 공부 노트에 전체적으로 고루 퍼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들을 선택하심’,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 등에 대한 언급 그리고 그와 비슷한 말들은 BSF 회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믿는 성향을 가진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의 귀는 이런 교리의 조그만 부분에도 예민하게 대응했습니다. 당시 나는 “아마도 칼빈주의의 이 교리가 내가 처음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여러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교리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 나는 주저하였지만 점차로 다른 사람들과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쪽으로 조심스레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가능한 모든 곳에서 나는 그 주제를 조용히 꺼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와 예배 사이에 복도에서, 주차장에서, 친구들과 전화로, 성경 공부 논의 그룹 사람들과 일대일로 나는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누구와 선택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안전한지, 누구와는 안전하지 않은지 등을 알아내기 위해 악의 없는 질문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내가 믿게 된 형태의 칼빈주의의 선택 교리에 동의하였습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나의 확신에 대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 가르침이 인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게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큰 실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나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그레이스 교회의 유명한 칼빈주의 목사인 맥아더 목사의 가르침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에게 물어본 결과 그가 건전하고 안전한 성경 교사라는 확신이 들어서 나는 테이프 대출 도서관에 등록을 하고 한 번에 6개의 설교 테이프들을 빌릴 수 있었고 곧바로 이것들을 듣고는 또 다른 6개의 테이프들을 빌려서 듣곤 하였습니다. 나는 심지어 두 사람 이름으로 회원 등록을 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한 세트 6개를 듣는 동안 다른 세트가 준비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집안의 잡일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쓰면서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런 ‘좋은’ 가르침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퍼가 달린 작은 주머니와 워크맨뿐이었고 그것들은 항상 내 엉덩이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맥아더 목사님이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관한 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 있는 설교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테이프 도서관의 목록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테이프를 대여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였습니다. 물론 내게 최우선 순위는 칼빈의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를 다루는 테이프들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선택의 어떤 요소에 대해 질문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단순히 도서관 목록에 나와 있는 소개 글들을 보고 내가 들을 필요가 있는 설교 테이프를 요청했습니다.
이런 테이프들을 듣다 보니 더 많이 들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겨서 나는 칼빈의 선택 교리에 호의를 보이는 다른 설교자들로부터도 더 많은 것들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 많은 테이프들을 주문해서 들었습니다. 수백 개의 강해들과 설교들이 내 머릿속으로 펌프질되어 들어오면서 칼빈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많은 양식을 주입해 주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칼빈주의의 선택 교리를 나누는 데 조심하며 주저하던 나는 이제 힘차게 그것을 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와이오밍주에 있을 때 담임 목사님께 물었던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이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내게 들렸습니다. 나는 훈련받은 칼빈주의자가 모든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시기적절한 대응책들로 내 믿음을 강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 역시 네 포인트 칼빈주의자 - 즉 칼빈주의 5대 강령(Five points of Calvinism) 중 네 개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 - 처럼 말하고 생각하였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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