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주의에서의 14년 여정④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9. 10:17

로드십 구원에 사로잡힘

내게 로드십 구원은 항상 혼돈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보통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주인(Lord 혹은 Master)과 구원자로 따라야만 한다는 의무로서 설명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주인과 구원자이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참 믿음을 평가하기 위해 순종, 즉 노예로서 주인에게 항상 순종해야만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는 만일 어떤 사람이 순종할 수 없으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받지 않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리의 혼돈 속에서 참 성도가 어떤 죄라도 짓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로드십 구원은 그것의 추종자들에게서 용서와 소망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죽은 율법주의’를 설립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확신은 아니라는 것을 그 추종자들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로드십 구원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유의 길이 그들 앞에 준비되어 있지만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잘못 해석된 구절들에 의해 이미 다 막혀 있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다시 칼빈주의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니 내가 테이프들을 통해서 배우고 있는 참 믿음의 시험들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믿은 사람들도 항상 그 교리에 맞게 처신하거나 교리를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여부를 알아내려는 이 막중한 시도는 내 안에 구원의 확신이 심히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내가 정말로 구원받았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기도했지만 내 마음은 내가 구원받았는지를 알아내는 일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충분히 믿었지만 내 믿음이 칼빈이 가르친 것과 같은 가짜 믿음이었는지 혹은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진짜 믿음이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확실하게 알 수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 나는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고민들은 내가 여러 가지 성경 공부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나의 두려움들을 물리치기 위해 내 앞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붙잡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속임수의 계략은 내 앞에 답들을 제시하고는 동시에 내가 그것들을 붙잡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 속임수의 계략은 마치 자기가 사로잡은 포로가 도망치리라는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은 채 대중 앞에서 그를 자유로이 행진하게 하는 포획자와 같았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에 사로잡힌 죄수로서 나는 성경기록들로 돌아가서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지만 칼빈주의식 설명들로 인해 성경기록들이 너무나 왜곡되어 해석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기록들은 나에게 더 많은 두려움을 심어 줄 뿐이었습니다.

내가 진짜로 믿었다고 어떻게 내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떤 종류의 믿음으로 내가 믿었습니까? 회개를 지속하면서 내가 열매를 생산하고 있습니까? 성경기록들에 대한 칼빈주의의 합리성에 대해 내가 너무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성경 말씀은 내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사랑, 긍휼, 부드러움, 친절 등을 내게 전해 주지 않았고 오직 칼빈주의의 신이 가져다주는 혹독함과 매서움 등만 전해 주었습니다, 급기야 성경기록들은 칼빈주의라는 전통을 위해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6절에서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든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전통으로 이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가 되게 하였느니라.

내게 잘못 설명된 성경 말씀들, 바로 그것들이 나를 옥죄는 감옥의 창살이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라는 견해를 통해 인간의 철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칼빈에 의해 공식화된 기독교식 숙명론을 배웠습니다. 나는 복음을 믿는 것은 피상적 믿음일 수 있으므로 구원받으려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내가 사람들과 그들의 학자적 성경 해석을 믿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을 신뢰하고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으며 마음이 주로부터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

결국 나는 그들이 성경 강해라고 한 것이 실제로는 가면을 쓰고 자기 생각을 집어넣은 사적 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칼빈주의가 모든 것의 핵심 문제였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나는 방향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내가 청취하던 오디오 교사들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교사들은 나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부분을 지킬 것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구원받은 뒤에는 율법이 믿는 성도의 삶을 위한 인생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 전까지 이 땅에서 삶을 사시면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실 때 보여 주신 의(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라고 부름)가 선택받은 자들에게도 주어져서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 준다고 내게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설명한 십자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한 측면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이고 다른 측면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실 때 보여 주신 의, 즉 선택받은 자들에게도 주어져서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 준다는 의였습니다(다시 말해 그들은 이 두 개의 의가 있어야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함). 이런 가르침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새 본성이 믿는 자 안에 있는 유일한 본성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는 자의 내부에 있는 죄의 본성 혹은 육신의 본성은 완전히 죽어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것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는 더 이상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결코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성도들(혹은 본인들이 성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를 지으면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새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선택받지도 않았고 구원받지도 않았음을 보여 준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판단하다 보니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나 죄에 대해 염려할 때마다 자기가 칼빈주의식으로 제대로 구원받았는지를 의심하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이런 믿음 체제 안에서 칼빈주의로 한참 동안 떨어지게 되면 자기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은 순종에 의해 증명되지만, 믿음에 의한 구원은 확신을 얻기 위해, 죄들의 용서를 얻기 위해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봅니다.

예정론 교리는 그것의 지지자들 위에 군림하는 잔인한 감독자가 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단순한 믿음에 의한 구원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풍성히 줍니다. 칼빈주의 선택 교리란, 전면에서는 좋게 보이고 성경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후면에서는 사람을 정죄하는 심문자로 돌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드십 구원을 뜻하는 ‘성도들의 견인’ 교리의 최종 결과입니다. ‘성도들의 견인’은 실제로 믿음 면에서의 인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순종과 행위 면에서의 인내와만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칼빈주의 영향 아래에 있던 나의 마지막 몇 년은 내게 두렵고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잠 못 이루고 비평적이고 자기혐오와 절망을 가져다 준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가끔 눈물을 흘리며 구원의 확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바랄 때 깊은 절망이 내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할까? 나는 나의 객관성을 잃었나? 내가 본 모든 것이 실패로 드러날 때 그들은 내 안에서 믿음을 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이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정죄의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는 망가진 음반이 “어떻게 내가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을까?”라고 계속 물으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 구원의 확신의 자유를 만끽하던 때, 즉 근심이 하나도 없던 날들은 지나갔습니다. 나는 주변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프로그램 속에 갇혔기 때문에 다른 크리스천들을 만나는 기쁨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언제 믿을지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것도 이제는 긴박감을 잃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으라고 강하게 촉구했지만 그들이 진리를 거부하면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린 뒤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얄궂게도 그토록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던 시기에 나는 내가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거부한 바로 그곳에서 나 자신을 고립 상태에 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라는 나의 우상이 동일한 믿음과 간증을 가진 자들과만 교제해야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교제를 나눌 때 통과해야 할 기준은 대다수 사람들이 맞추기 어려운 칼빈주의의 네 가지 요소에 대해 상대방이 개인적으로 나와 동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다 믿는 칼빈주의자들과의 교제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제한 속죄를 제외한 나머지 네 요소만을 믿는 자들을 만나는 것은 심히 어려웠습니다. 칼빈주의 선택의 교리가 율법주의를 통해 내 인생을 망치고 있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그것을 붙잡았고 그것이 내 모든 어려움의 원인이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주의에서 구출을 받다

이런 어두운 시기에 칼빈주의에서 벗어나는 일이 기대하지도 않은 소포 박스처럼 내게 배달되었습니다. 쏠트레이크시티에서 내가 처음에 속했던 교회가 담임 목사 후보로 최근에 트리니티 신학 대학원을 졸업한 분을 세웠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인위적 교회 성장 방법 때문에 교회를 떠났던 여러 성도들은 흥분이 되어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큰 희망이 있었습니다. 나는 믿는 자들과의 이 교제에 연합할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어떤 격려가 내게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모임에는 칼빈주의 4대 강령 신봉자들도 있었으므로 그들과 다시 연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후보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진술문을 제출하였고 내 절친한 친구는 그것을 검토해 보라고 내게 복사본을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가정들이 다시 연합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녀는 내 소파에 앉은 채 내가 흥분해서 그의 진술문의 앞부분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내 마음은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대주의와 환난 전 휴거를 지지하지 않는가?”

** 역사적 전천년설은 7년 환난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7년 환난기 전에 성도들의 휴거가 있다는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달리 성도들이 7년 환난기를 통과한 뒤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즉 환난 통과설) 그 뒤에 천년 왕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개 장로교회나 개혁 교회 안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주장하지만 장로교회나 개혁 교회의 주류 사상은 천년 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주의이다.

불행히도 지난 몇 년 동안 성경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거기에 남게 된 사람들은 ‘성경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세대주의’를 믿지 않았고 따라서 칼빈주의를 신봉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인정하는 이런 후보자를 선택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나의 옛 친구들이 이 후보자의 교리적 견해에 대한 나의 의견을 알려고 할 때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종말론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우리들을 하나로 연합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당분간 칼빈주의는 우리를 나누는 사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칼빈주의에 대해 내게 도전했던 한 친구도 이제는 그 목사 후보의 교리적 입장에 대해 내 의견을 구했고 또한 자기가 새롭게 채택한 관점들을 가진 ‘논쟁이 되고 있는 책’에 대해서도 나의 의견을 구하면서 ‘거저 주어지는 은혜’(Free grace)라는 교리적 견해에 대해 내게 상세히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내게는 낯선 교리로 보였으므로 나는 그것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조사해 보니 ‘거저 주어지는 은혜’라는 교리는 수정된 칼빈주의와 세대주의를 특이하게 섞어놓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희한하게도 나는 이 책의 논쟁이 되는 가르침들을 폭로하는 기사를 발견했고 그것은 내가 전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칼빈주의 믿음의 견해에 대해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나는 칼빈주의의 언어로 표현된 믿음이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받기 훨씬 전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선물은 선택받은 자들이 믿기 전에 그들 안에 놓이며 그것이 활동하기 전에 아마도 몇 년 동안 동면 상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선택받은 사람이 복음을 만나면 위에서 주어지는 믿음이 발동하여 그는 믿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칼빈주의식 해석은 선택받은 자들이 복음을 듣기 전에 혹은 복음을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순식간에 믿음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위에서 거저 주어지는 믿음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즉 중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선택받은 자들이 스스로 믿기도 전에 다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제 나는 내가 칼빈주의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진짜 칼빈주의가 아니었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4대 강령만 믿는 칼빈주의와 5대 강령을 모두 믿는 칼빈주의 사이에 엄청난 심연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시작했습니다. ‘무조건적 선택’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에게 요구되는 ‘기초적 믿음’(belief)이지만 ‘믿음’(faith) 특히 ‘구원을 주는 믿음’(saving faith)에 대해서는 그들이 심히 큰 편차를 가지고 서로 달리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토요일에 나는 칼빈주의의 새로운 면을 잘 이해하기 위해 샌드라의 사무실에 갔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개혁주의 칼빈주의의 견해에서 ‘믿음’이란 선택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도 전에 이미 그들 안에 놓인 채 동면 상태에 있다가 그들이 복음을 접하는 순간 살아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분명히 샌드라도 이에 대해 스스로 조사를 한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에베소서를 펴고 [‘구원’이 아니라] ‘믿음’이 에베소서 2장 8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로 보인다고 말하였습니다.

엡2: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사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 2, 7, 8절과 4장 7절에서 자기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으로 인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우리는 둘 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앉아 있었습니다. 믿음이 선물이 아니고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우리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에베소서 2장 5절을 읽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이것을 읽고 나니 갑자기 에베소서 2장 8절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믿음이 선물이 아니고 구원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에베소서 2장 8-9절은 ‘가장 가까운 선행사 규정’에 따라 절대적으로 믿음이 선물을 의미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더 조사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