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①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0. 13:21

이번 장에서 우리는 버트와 제니라고 하는 가공의 부부를 통해 칼빈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의 고민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문’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결혼한 지 거의 10년이 되었고 두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버트는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로서 사제가 된 두 명의 동생과 수녀가 된 여동생이 있었지만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면서 그것과 자신이 평생 알고 있었던 카톨릭 교리 사이에 명백하게 다른 모순들을 해결해 보고자 그는 6주 정도 고군분투하다가 마침내 카톨릭교회를 떠나서 믿음을 가지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인 가족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 이 글은 칼빈주의 비평서 중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진 헌트(Dave Hunt)의 책 「대체 이게 무슨 사랑인가?」(What love is this?)의 30-31장을 번역한 것이다. 헌트의 책은 아마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한편 제니는 전형적 뉴에이지 신봉자(New Ager)로서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에 개방적이었지만 예외적으로 성경적 기독교 사상만큼은 ‘지나치게 편협하다’는 이유로 몹시 싫어했습니다. 버트가 회심한 지 6개월쯤 지나서 제니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는 것은 그 두 사람에게는 영광스럽게 보이는 기적이었습니다.

한 8년 동안 버트는 크리스천 신앙 안에서 행복했으며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여 그중 몇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과 자신의 구원의 기초 면에서 아주 확실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 있을 심판에 대하여 성령님에 의해(요16:7-11)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버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고 신뢰하였습니다.

적어도 그는 한때 바울이 빌립보 감옥 간수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행16:30-31)라고 권면했던 것처럼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변했고 이 사실은 그가 교회에서나 혹은 개인적 교제를 통해 열정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언할 때 공개적으로 나누었던 간증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면서부터 버트에게는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겠다는 갈증이 생겼습니다. 그는 아주 흥미를 가지고 기쁘게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와 제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한 성경 신자들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가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함께 누렸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의 삶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들었던 전형적 형태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버트와 제니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어느 칼빈주의자의 정직한 의심들 >

버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그와 제니는 어느 때보다도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또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매일 헌신하는 삶을 살며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의 아이들도 아주 활동적인 교회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교제를 나누며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천주교를 믿는 다른 가족들이 주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려는 버트의 시도를 계속 거부함으로써 가족들의 모임을 무겁게 만드는 긴장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방해물이 그들의 삶에 끼어들었습니다.

거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버트가 참석하고 있던 형제들의 성경 모임에 칼빈주의가 들어왔습니다. 활발하게 토론이 이어지면서 그는 지적 호기심으로 인해 도전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와 동시에 목사의 설교에서도 칼빈주의 교리가 조금씩 더 강하고 더 빈번하게 안으로 파고들어 왔습니다. 목사는 드러내 놓고 모든 교인들이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 많은 가족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매료시켰던 ‘제대로 된 성경 해석’을 더 이상 자기들의 목사에게서 받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대신에 목사는 아무 때나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아무 균형도 없이 강조하는 것 같았습니다(물론 목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단순히 제시해 줄 뿐이었지만 그 내용은 과거에 그의 설교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80권 이상의 기독교 서적을 저술한 맥도날드(William MacDonald)가 말한 것이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교회를 분열시키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혹독하게 주입하는 것이 대다수 칼빈주의자들의 관행이다. 그들의 경우 칼빈주의라는 이 ‘신학적 틀’, 즉 ‘신학적 시스템’이 그들의 대화, 설교, 공적 기도, 사역에서 주요 강조점이 되었고 다른 주제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들의 시스템 자체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몇몇 특정 구절들에서 그들이 유추해 낸 것이다.**

** William MacDonald to Dave Hunt (marginal note in review copy). On file.

버트는 목사의 새로운 통찰력과 사고에 휩쓸려 갔습니다. 사실 그 목사는 버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제자 훈련을 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지금 버트는 성경의 진리를 더 깊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 열심을 내며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제니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 미리 예정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 등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니는 이러한 가르침이 자신의 양심과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니는 버트가 행복해하고 예전보다 더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고 있기에 속으로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골치 아픈 불확실성으로 들어가다

목사는 버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맥아더(John MacArthur), 파이퍼(John Piper), 스프로울(R. C. Sproul) 등이 지은 여러 권의 책과 테이프를 빌려주었습니다. 버트는 칼빈주의에 대한 스프로울의 라디오 설교를 매일 청취하고 「제네바 스터디 성경」이라는 책을 구매하였습니다.

이 성경책의 주석들은 그에게 칼빈주의가 개혁주의 신앙이며 참 복음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점점 새로운 ‘진리’가 마음에 더 와닿게 되자 버트는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이 논리상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이 이제 눈을 뜨게 된 이 교리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무시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버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빠져 들게 되었고 밀른(Bruce Milne)의 책에 의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밀른은 그 책에서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들의 확정적 원인이다.… 심지어 그 뜻은 삶에서 일어나는 가장 작은 것에 대해서도 확정적 원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우주를 통치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는 이러한 말이 그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온 메아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최고의 저자는 핑크(A. W. Pink)였으며 곧 버트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핑크가 지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책을 구매하여 거기에 빠져 들었습니다.

** Bruce Milne, 「Know the Truth」(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n. d.), p. 66.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모든 것을 예정하셨으며 심지어 **‘가룟 유다가 주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영원부터 작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버트를 괴롭혔습니다. 핑크는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 중 어떤 것에게서 발견되는 ‘죄로 가득한 속성들’을 만들어 내시지 않는다.… 그분은 죄를 만드시는 분도 아니며 죄를 승인하시는 분도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버트는 오랫동안 그 사상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그분이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의 확정적 원인이 되시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짓게 만드시고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지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가르침 앞에서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어떤 것들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라고 설명하며 변명하기도 하였습니다.

** Arthur W. Pink, 「The Sovereignty of God」(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4th ed., 2nd prtg. 1986), p. 155.

** 동일 문서, p. 156.

버트가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간의 의지라는 문제는 점점 더 수수께끼가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그 주제에 대한 많은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핑크는 **자유 의지(free will)라는 개념을 반대했는데 이 개념은 그가 지속적으로 비난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 동일 문서, p. 1.

그러나 ‘하나님의 더 깊은 것들’ - 예를 들면 칼빈주의 교리 - 에 대한 연구를 권하기 위해 그는 **“뜻(의지)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여전히 사실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의지(뜻)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통해 그들이 의지적으로 구원을 받기 원하도록 만드셔야 했다면 왜 그들의 의지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가?”

** Pink, foreword to 1st ed. 1918, 「Sovereignty」

이러한 질문들은 버트를 순간적으로 괴롭히긴 했지만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개혁주의와 그것이 창출해 낸 신조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탐색한다는 즐거움으로 인해 곧 잊혔습니다.

혼란이 가중되다

자신의 새로운 믿음을 제니와 함께 나누고 그녀를 이 고무적인 배움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 버트는 TULIP이라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공부하는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믿음을 추락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적 타락에 대한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버트가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안전 보장’ 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는 자신이 진짜로 구원받았는지 확신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 자기를 하나님께서 먼저 주권적으로 다시 살리지 않으셨다면 그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버트는 자신의 회심을 되돌아보면서 바로 그 일, 즉 하나님이 자기를 먼저 살려 놓으신 일이 실제로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스스로 확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는 그런 식으로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기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믿으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당연히 그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그가 복음을 믿을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매우 확고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이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결국 다시 태어나는 것(중생 혹은 구원)은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기 전에 슬며시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자기에게 일어났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즉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실한 제안이라면(한때 그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지만 칼빈주의에 매료된 뒤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믿는 것을 통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가 실제로 ‘선택받은 자들’을 의미하고 구원이 그들에게로만 제한되어 있다면 그의 유일한 확신은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데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는 선택받은 자였을까요,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을까요? 이 질문이 밤낮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일으키는 두려움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요한일서 5장 10-13절 말씀, 즉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가 그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는 종종 이 구절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갖도록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칼빈주의 구원 교리를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사도 요한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이것을 썼으며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면 자신이 믿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 편지는 사람이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계속 말하고 있으며 선택받은 자들 중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버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자기 목사에게 갔지만 목사는 요한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이 편지를 썼기 때문에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킬 필요는 없었다고 버트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버트는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수많은 질문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 의해 온다고 말하고 있으며 믿으려는 믿음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 따르면,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시 태어난 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복음을 믿어야 하는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고 구원받기 전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수수께끼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중생’이었는가?

버트가 형제들의 성경 공부 모임에서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하자 칼빈주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짧지만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칼빈주의 저자들의 책들을 연구하고 자신들이 모두 매일 읽는 「제네바 스터디 성경」을 중심으로 그 안의 주석들을 탐독했습니다. 사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일, 즉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는 것은 칼빈주의 권위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사항일 뿐만 아니라 만장일치를 본 사항이었습니다. 저녁 모임이 끝나기 전에 친구들은 버트가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이 있다고 비난했지만(본인은 물론 이것을 부인함) 불확실한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버트는 자신의 의심들이 사탄으로부터 오는 공격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쓴 마귀의 공격이 될 수 있을까요? 버트가 그곳을 찾아 다음의 말씀을 접했을 때 그는 오히려 더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해 그것으로 너희가 능히 그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며

“믿음의 방패를 취하라니?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면 왜 우리가 그것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

며칠 후에 토론 그룹에서 이 질문이 나왔을 때는 만장일치 의견이 없었습니다. 버트는 믿음의 방패를 취한다는 것은 믿음에는 반드시 인간 편에서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편지가 믿는 자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며 물론 우리가 다시 태어난 뒤에 믿어야 할 책임을 갖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버트가 물었습니다. “왜 맨 처음 믿음에는 의지가 없는데 나중 믿음에는 의지가 있어야 할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 믿음이 우리가 책임을 지고 믿어야 하는 믿음보다 더 좋은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장시간의 토론은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점이 없이 끝났고 그에게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이 있다는 등의 어떤 비난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버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