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②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0. 13:26

교묘한 속임수의 희생자? 

버트의 관심은 이전에 도움을 받았던 칼빈주의 계통의 저자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들은 버트의 구원에 대해 혼란과 의심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중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이트(James White)와 같은 학자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화이트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적 죽음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없애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단지 자기 자신을 그 복음에 복종시킬 수 없을 뿐이다.**

** James R. White, 「The Potter’s Freedom」(Amityville, NY: Calvary Press Publishing, 2000), pp. 100-101.

이러한 글을 읽는 것이 실제로 버트를 괴롭게 했습니다. 만일 영적으로 죽어서 구원받지 못한 혼으로 있는 동안 그가 복음을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가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구원을 줄 수 없는 것, 즉 순전히 인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을까요? 버트는 자신이 복음을 이해하고 믿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적으로 죽은 사람,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에 의해 믿음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의 상태에서 그것을 이해했다면 그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자였을 것입니다!

한때는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결실이 많은 듯했지만 지금 버트는 더 이상 자신의 회심을 확신할 수도 없었고 또한 자신의 회개와 또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순전히 인간적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는데도 그가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인간적 감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기억이 전혀 없으며, 자신이 항상 회심이라고 언급해 왔던 것이 존재하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먼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스스로에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무조건적 선택’의 영향

버트는 만일 자신이 구원받도록 선택받았다면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이며 따라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가졌던 ‘믿음’과 완전히 별개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자신이 구원받은 뒤에(중생한 뒤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셔야 했기 때문에 버트 편에서는 의지적으로 믿는 것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버트의 경우 이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한때 자기가 생각하던 것을 되돌아볼 때 그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음으로써 복음에 반응했다는 것이어서 그의 혼란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원받은 날(저녁)을 기억했습니다(혹은 칼빈주의 식으로 말하면 그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날).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던 목사가 로마서 1장 16절 말씀 즉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라는 말씀을 인용할 때 그것은 마치 한줄기 빛이 지나가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평생 동안 행하던 천주교회의 각종 성례전, 고해 성사, 고행과 마리아에 대한 기도, 메달과 성의 착용 같은 것들이 갑자기 모두 다 소용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복음은 혼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며 그가 해야 할 것은 오직 믿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믿었고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알았으며 8년의 행복한 기간 동안 자신의 구원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버트는 사람들이 단지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것이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바로 그 복음을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든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거짓말을 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속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 있었다면 그들은 구원받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어떻게 믿느냐와 관계없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진실한 제안이었다고 상상했으니 그는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그 당시 그가 그렇게 상상한 것은 얼마나 주제넘은 일이었던가요? 바로 이것은 그가 비칼빈주의자들로부터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생긴 비극적 결과였으며 이제 그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성령님의 확신 속에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제안이었다는 착각 속에 지내던 시절에 자기를 통해 자기의 이런 잘못된 견해를 전달받았던 사람들도 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사는 버트가 가지고 있는 의심들이 좋은 것이라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 의심들은 “더욱 열심을 내어 너희가 부름 받은 것과 선택받은 것을 확고히 하라. 너희가 이것들을 행하면 결코 넘어지지 아니하리라.”(벧후1:10)는 베드로의 권면에 그가 순종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 즉 ‘베드로가 말하는 선택받은 것’을 과연 확고히 할 수 있을까?” 버트는 절망 속에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면 “버트, 나는 당신의 행위를 꾸준히 보아 왔어요.”라고 목사는 늘 반복되는 말을 내게 해 주었습니다. “당신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던 여러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있어요.”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다고요? 그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상이 아닌가요?”

버트는 절망적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선택받은 자들은 그리스도께 인도될 필요가 없고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그들 편에서 무엇을 이해하거나 믿지 않아도 다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목사님은 내가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복음을 통해 구원의 선물을 나에게 줄 수 있습니까?”

“그 당시 나는 칼빈주의자가 아니었어요.” 목사가 어색하게 답했습니다. “어쨌든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내가 선택받은 자들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을 확고히 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선택받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그것을 확고히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버트는 진지하게 대답을 요청했습니다.

“당신은 열매를 맺었습니다.”라고 목사가 말하기 시작했지만 버트는 자신의 시계를 쳐다보면서 양해를 구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문을 향해 나갔습니다.

‘제한 속죄’가 그를 더 절망하게 하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세 번째 강령인 제한 속죄는 버트가 한때 그리스도 안에서 가졌던 단순한 믿음을 더 심하게 무너뜨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죄인들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들로 인한’ 희생 제물이었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자신의 죄들로 인한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쉽게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속임수에 속았는지요!

그런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는 제한 속죄 교리가 버트에게 ‘진실’이 되었습니다. 이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분의 피의 일부는 낭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에 이미 다수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분의 피는 그들을 위해 흘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버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어떻게 자기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생각은 바로 자신의 교만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솔직하게 버트는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이었다는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증거를 찾으리라는 희망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버트는 그동안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죄들로 인한 죗값을 완전히 치르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실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어떻게 그분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이 지구상에 거하는 유일한 사람이라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위해 죽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버트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였는지를 생각하니 몸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누가 선택받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든지, 안 믿든지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버트는 자기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들을 하늘에서 만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 한때는 그에게 큰 기쁨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이끈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상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속였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전보다 더 나쁜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다. 버트는 이제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가 분명히 타락으로 이끌었던 사람들 때문에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전에는 자기가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였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도’나 ‘영혼 구원’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예” 또는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한 망상입니다. 그가 구원받을지, 영원히 버림받을지는 영원 전에 하나님에 의해 모두 정해졌으며 어떤 것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파이퍼(John Piper)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큰 위로와 기쁨에 대해 아주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버트는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기뻐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 적어도 선택받은 자들만 천국으로 미리 예정된다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 - 버트에게 절망만 가져다주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 - 마지막 강타

칼빈주의의 네 번째 강령인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한때 그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믿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처음에는 참으로 그럴듯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그를 몹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회심’을 뒤돌아볼 때 버트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회심’을 돌아보며 자기가 죄 속에서 즐겁게 살면서 몇 년을 보낼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살지 이 둘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재어 보며 고민하던 때가 있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그는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도 복음을 수용하는 것을 늦추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의사는 그가 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그에게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모닝콜’이 되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버트는, 지금은 자기의 담임 목사가 된 어떤 남자가 자기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저는 제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말하며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버트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스도의 약속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이것이 모두 육신적이고 사탄적인 망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그는 복음이 참된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였고 자신이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값을 치르셔야만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도 그러한 이성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 즉 자기가 선택받은 자들 중 하나라는 것에 대한 어떤 증거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해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림을 받았다는 어떤 표시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지금 그는 믿기를 원했고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희망 사항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회심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자기가 다시 태어났어야 하는데 그때가 언제인지 그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지금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