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③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0. 13:34

칼빈에게 도움을 청하다

그렇게 도전적이고 지적으로 매력적인 책인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를 읽었다는 것이 버트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그를 칼빈주의로 이끈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는 칼빈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일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지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선택에 대해 말할 때 그런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는 선택받은 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즐거워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거스틴에 의해 발견되어 칼빈에게로 이어져 온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어떤 동지애 같은 고양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위로를 얻기 위해 칼빈의 책 「기독교 강요」로 돌아와서 그 책이 자신의 의심을 가라앉혀 줄 뭔가를 줄 것이라고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보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의문들에 대한 칼빈의 대답, 즉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잠시 동안 존재하는 은혜의 감정으로 빛을 주시지만 그것은 후에 사라져 버리는(evanescent) 빛으로 드러나고 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에게 거의 사악한 수준의 속임수를 쓰고 계시는 것으로 비쳐졌습니다.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MI: W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8 ed.), 3.2.11.

버트는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속이셨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왜 자신이 전에는 칼빈의 그러한 말에 주목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습니다(물론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런 사상 역시 사탄의 또 다른 미혹일 뿐입니다).

칼빈이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속임수는 버트에게 거의 마귀의 말처럼 들렸으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에 몹시 흔들렸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해 아주 적은 양의 지식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흠뻑 적실 수 있는 지식을 주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전혀 없다.…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반짝이는 그 빛은 나중에 꺼져 버린다.**

** 동일 문서, 3.2.12.

따라서 전적으로 타락하여 불법들과 죄들로 죽은 도덕적 시체들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며 복음에 대해 ‘약간의 지식’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그 지식의 빛은 희미하게 가물거리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꺼져서 그들이 구원받을 정도로 [복음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는 빛입니다! 이 말은 사실 마귀에게서 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버트의 체험과 맞물리며 사실처럼 들렸습니다. 그것 말고는 그가 한때는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지만 이제는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버트는 절망적으로 성경을 탐구했으나 선택받은 자들과 선택받지 못한 자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을 찾지 못하였고, 특히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속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영벌(유기)에 처하기로 예정하셨던 자들에게 거짓된 빛을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구절도 찾지 못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이 복음의 빛에 눈멀게 하는 자는 사탄이 아닙니까?

버트는 요한복음 1장 9절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핑크(Pink)의 「하나님의 주권」, 화이트(White)의 「토기장이의 자유」, 파이퍼(Piper)의 「하나님의 칭의」와 다른 칼빈주의 저자들의 책들을 찾아보았으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이 중요한 구절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이 구절을 피했을까요?

마침내 그는 슈레이너(Schreiner)가 이것을 자세하게 다룬 책을 찾아냈습니다. 버트는 흥분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이 빛의 조명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구원을 선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계속 읽다 보니 기쁨이 절망이 되었습니다. 슈레이너는 요한 웨슬리의 관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헐뜯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확실히 칼빈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 Thomas R. Schreiner, “Does Scripture Teach Prevenient Grace in the Wesleyan Sense”, in 「Still Sovereign」, p. 237.

** 동일 문서, p. 240.

버트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영벌(유기)에 처하도록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 중 여러 사람을 속이셔서 그들이 구원받지 않았는데도 진짜로 구원받았다고 상상하도록 만드신다고 칼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버트는 그러한 교리를 지지하는 어떤 구절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없었으며 칼빈이 자기가 말한 것을 지지해 줄 어떤 성경적 근거를 대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버트는 이제 가학적 추론처럼 보이는 칼빈의 다음 글을 읽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믿기 어려운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이 때로는 선택받은 자들이 영향을 받는 것과 비슷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행13:48). 그래서 심지어 그들이 판단해 봐도 그 두 부류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늘의 선물을 맛본다고 한 것(히6:4-6)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잠정적 믿음’(temporary faith)이 그들에게서 나온다고 하신 것(눅8:13)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권능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참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더 잘 확신시키시고 그들이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게 하시며 또 양자 삼으시는 성령님 없이도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선하심과 같은 것을 그들의 마음속에 주입하신다.
…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과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믿음’(fading faith)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유사점이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바울이 칭송한 확신, 즉 큰 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갈4:6; 롬8:15 참조) 부르는 확신이 풍성하게 자란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화해의 호의를 베푸심을 믿는다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이는 그들도 혼란 속에서 합당한 분별도 없이 스스로 하나님의 화해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런 정도의 조명의 빛을 주시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들이 그분의 은혜를 인식하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확신은, 이 점에서 그분께서 자신의 선택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증언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버림받은 자들은 결코 온전한 결과나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화해의 호의를 보이실 때 이것은 결코 그분께서 그들을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보호 아래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잠시 동안 베푸는 긍휼’(present mercy)을 나타내실 뿐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살아 있는 믿음의 뿌리를 심으시고 이로써 그들은 심지어 끝까지 견디며 인내할 수 있다(마24:13).
그러므로 반대 주장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은혜를 보이신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잠시 동안 베푸는 은혜’(present grace)의 감정으로 조명의 빛을 주시지만 그것은 후에 ‘사라져 버리는’(evanescent) 빛으로 드러나고 만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전혀 없다.**

** Calvin, 「Institutes」, 3.2.11-12.

이분은 대체 어떤 ‘하나님’이신가?

칼빈이 말한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베푸는 긍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가련한 혼들에게 이 세상 삶에서 얼마나 큰 긍휼을 베푸시는지에 관계없이 그들의 궁극적 결말이 파멸이라면 과연 우리가 그것을 ‘긍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영원한 저주를 받기로 예정된 그러한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베푸는 호의’를 ‘긍휼’이라고 부르는 것은 냉소적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하나님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버트는 자신이 무신론적 사상과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반역을 억누르느라 애를 썼습니다. 루터 또한 **「의지의 속박」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가학적인 ‘하나님’, 즉 자신이 도움을 주기를 거부하셔서 그 도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청에 응할 수 없는데도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오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 같았습니다.14) 진짜로 선택을 받았지만 고의로 구원을 거절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려고 시도한 자들을 조롱하는 것과 칼빈과 루터의 하나님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을 창조하신 다음 그들을 영벌(유기)에 처할 운명에 속한 자들로 조롱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입니다.

** Martin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trans. J. I. Packer and O. R. Johnston (Grand Rapids, MI: Fleming H. Revell, 1957, 11th prtg. 1999), p. 153.

버트는 성경에 나오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러한 속임수를 사용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하나님은 칼빈과 루터가 자신의 멘토로 삼았을 뿐 아니라 현시대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위인으로 치켜세우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뛰어난 ‘성인’인 어거스틴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버트는 자신이 읽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에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교 개혁은 본질적으로 어거스틴 사상의 부활이며 그것을 통해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Loraine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32), p. 367.

버트는 구원받기 전에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어거스틴이 칼빈주의와 ‘복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진리란 무엇이었습니까?

구원과 믿음의 확신을 찾다가 버트는 칼빈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즉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은 파멸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진짜로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확신의 근거인데 그 확신은 선택받은 자들만 소유하는 확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Calvin, 「Institutes」, 3.21.1.

버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했지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이르도록 예정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믿는 믿음이 누군가에게 자신이 천국에 이르도록 선택받았다는 확신을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버트는 눈이 멀어서 완전히 타락해서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일까요?

버트 자신이 칼빈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버트가 어떤 희망도 없이 영원히 버림받았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신시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어두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얻은 유일한 위로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에서 나왔습니다.

진실로 믿는 신자들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빛을 거두시거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어둠 속에서 빛이 없는 상태에서 걷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거나 감소되거나 중단될 수 있다.**

**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London: n. p,1643), XVIII: iv.

이 말은 새로운 희망의 빛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지만 버트는 참된 신자들에게도 성경이 단순하게 믿는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확신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에 한 친구가 자신의 의문들을 모두 해결했다고 말하면서 책 한 권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뵈트너(Loraine Boettner)의 「개혁주의 예정론」이었습니다. 책의 뒤표지에는 **‘이것은 예정론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된 것 중 가장 철저하고도 확실한 설명 중 하나이며…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저술’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버트는 아주 큰 희망을 품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그를 더 심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 책의 한 장, 즉 역사 속에 나타난 칼빈주의를 다루는 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게 될 것이다.”라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잡지에 나온 추천사 때문에 그는 그 장을 맨 처음 읽었습니다,

** Boettner, 「Reformed」, Back cover.

** 동일 문서.

뵈트너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정에 대한 칼빈주의의 견해를 거부하였고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 진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인정한 것을 보고 버트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는 어거스틴이 로마 카톨릭주의의 교리와 실행의 근간의 대부분을 세운 인물이라는 것을 버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한 신문 사설은 교황과 로마 카톨릭교회는 어거스틴이라는 이 ‘성인’을 ‘[카톨릭] 교회의 박사’로 추앙하는 일종의 기념식을 거행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가장 위대한 사람인 어거스틴이 칼빈주의 교리를 발견할 때까지 수 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것과는 정반대의 교리를 믿었다면 어떻게 칼빈주의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 Boettner, 「Reformed」, p. 365.

탈출할 방법은 없습니까?

카톨릭 신자로 지낸 지 거의 25년 동안 버트는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해 카톨릭교회와 거기서 베푸는 각종 성례전(일곱 성사)을 신뢰했습니다. 물론 인간의 행위, 의식, 메달, 수사들의 옷과 **‘성인들의 통공’을 신뢰하는 카톨릭 체제하에서 그는 한 번도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이단 교리라고 배웠던 것을 한번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개신교로 발을 들여놓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 ‘성인들의 통공’(communion of the saint)은 지상에서 순례하는 우리들과 천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한 가지 표현 방식이다. 성인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자신들의 생활로써 보여 주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훌륭한 벗들이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그 나라를 향해 순례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 신비로운 방법으로 대신 간구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에 성인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많은 무명의 모든 성인들까지도 기억하고 공경한다. 교회는 〈모든 성인 통공〉에 대한 믿음에서 〈위령 성월(11월)〉과 모든 〈성인대축일(11월 1일)〉을 기념한다(두산백과). 한마디로 이것은 여분의 공로가 있는 ‘죽은 성인들’이 공로가 부족한 ‘땅에 있는 자들’을 위해 대신 간구하고 기도해 준다는 것이다.

이제 절망 속에서 그는 비록 로마 카톨릭주의가 칼빈주의가 주는 확신보다 덜한 확신을 준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주의로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버트가 이전에 다녔던 천주교회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고 그에게 가르쳤습니다. 사실 그 시스템에서 그러한 확신을 주장하는 것은 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았으므로 결코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을 안다고 말함으로써 예단의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 트렌트 공회가 파문을 내렸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버트는 오코너(John O'Connor, 1920-2000) 주교(후에 추기경이 )가 다음과 같이 선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카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영원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지만 여전히 나의 최종 종착지를 알지 못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을 알지 못하며 캘커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도 알지 못한다[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지 않는다면].**

** Sam Howe Verhovek, “Cardinal Defends a Jailed Bishop Who Warned Cuomo on Abortion”, The New York Times, February 1, 1990, A1, B4. [참고로 김수환 추기경도 동일한 것을 고백하였다.]

버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는 특별 계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카톨릭 신자로서 혹은 칼빈주의자로서 자기가 끝까지 견인되어 천국에 이르도록 예정받았는지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검증하라”(고후13:5). 버트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의 믿음이 확실하다는 것과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통해 자기가 그 믿음대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검증해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빌2:12-13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같이 내가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자신의 구원을 일하여드러내라.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너희 안에서 일하사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버트가 읽은 책의 저자인 한 칼빈주의자는 그 구절을 읽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일하사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빌2:13) 이것이 회심 이후,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 내게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내가 구원받기 전 죄의 노예였을 때, 즉 회심 전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이보다 더 완벽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고 검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 속했는지, 아닌지는 결코 말해 주지 않습니다. 버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 계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 Wm. Oosterman, “Take a Long Look at the Doctrine of Election” (Ottawa, Canada: The Lord’s Library Publications, n. d.), p. 7. Available from Westboro Baptist Church, Ottawa,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