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자로서 칼빈의 약점
증거를 바라보고 믿음을 세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칼빈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에서 믿음이란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왜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를 제시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참되다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버트는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자기들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게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은 진리에 의해 동요될 수 없으며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설득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믿음도 없이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 결과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증거는 그러한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이 어떤 증거나 증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대언자들과 사도들은 온 세상이 강제적으로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 이성 가운데 거하지 않으며 [즉 설득이나 증거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호소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불확실성과 의심 그리고 넘어지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면 성경기록이 진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인간의 추측보다는 더 높은 곳으로부터 나와야 하는데… 그 확신은 곧 성령님의 은밀한 증언이다.… 논쟁을 통해 성경기록을 완전하게 믿는 믿음을 키우려고 시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모세와 대언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이성으로 입증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증언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대답한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말씀들에 대해 적절하게 증언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들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내적 증언에 의해 봉인될 때까지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린다면 고유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성경기록은 증거들이나 논쟁에 복종할 필요가 없고 이것에 대한 완전한 확신은 성령님의 증언에 달려 있다. 우리 역시 그 확신과 함께 성경기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증거들이나 가능성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이성을 요구하지 않는 확신이며 이것은 가장 높은 이성에 부합하는 지식, 즉 우리의 생각을 어떤 다른 이성보다 더 확고하고 안전하게 지탱해 주는 지식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온 계시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확신이다. 유일한 참 믿음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봉인하는 그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일한 특권을 자신이 선택한 자들에게만 주시며 그들을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신다. 따라서 언제라도 우리가 믿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로 인해 근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신비들이 주어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신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령님의 주관적 증언이 객관적 증거들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 버트에게는 성경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였습니다. 성경은 증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언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불신자들에게 이런 증거들을 적용하셔서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였고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을 더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복음을 제시할 때 확고한 증거들을 사용해야 하고 믿는 자들의 확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도 이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믿음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어떤 증거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중생의 결과로 그것이 주어진다면 대체 증거를 보여 주고 설득하는 이런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바울과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복음을 증명하는 데 열심을 냈습니까?(행1:3; 9:22, 29; 10:43; 13:26-41; 17:2-3, 17-31; 18:9-11, 28 등)
버트는 무슬림들도 칼빈이 성령님의 내적 증언에 대해 말한 것의 대부분에 대해 거의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는 모두 꾸란이 사실이 아니며 무함마드가 거짓 대언자였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몰몬교도들 또한 몰몬경에 대한 증거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유효성은 ‘가슴에서 타고 있는 것’을 통해 그들의 신에 의해 그들에게 증명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DNA 대 몰몬경> 같은 비디오 등 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자기 신념에 가득 찬 모든 이단 종파들의 비밀스런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즉 그들의 믿음은 증거와 증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증거들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칼빈은 여러 가지를 계속 제안했으나 그것들은 대개 매우 빈약하였으며 지적인 회의주의자에게 확신을 주기에는 심히 부족했습니다. 그것들은 성경기록의 영감에 대한 증거들보다는 언어의 위엄과 성경기록에 제시된 숭고한 진리들을 나열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몇 개의 예언들을 짧게 다루었지만 그것들은 고레스 치하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회복과 같이 즉석에서 성취된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에서 성취될 예언들, 메시아의 오심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성취될 예언들을 그는 거의 완전히 무시하였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이렇게 이스라엘과 관련된 예언들을 무시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는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며 사실 루터와 칼빈은 자신들의 이런 사상을 카톨릭주의로부터 가져왔습니다(이것은 현시대에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라 불린다).
칼빈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교도들의 거짓 신들과는 달리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들을 여러 장에 걸쳐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데 왜 그는 그렇게 했을까요?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분명히 어떤 증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그가 제공한 증거들은 빈약하고 피상적이며 지적인 무신론자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 칼빈이 썼던 변증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변증들을 많이 썼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증언을 최소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대언자들이 그랬듯이 성경은 증거 위에 증거를 줍니다. 우리는 성취된 대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역사적 증거들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증거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 포함하고 있는 복음을 하나님의 진리로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딛1:9 [장로는]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 이것은 그가 반박하는 자들을 건전한 교리로 권면하고 논박할 수 있게 하려함이라.
버트는 변증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지만 변증은 자신이 새롭게 이해한 칼빈주의 측면에서 볼 때 거의 가치가 없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변증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변증이 칼빈주의 선택의 진리를 세워 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변증은 선택받은 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뿐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버트를 몹시 괴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안식하며
버트가 믿음 및 구원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빈번한 모순들로 인해 더욱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는 맥아더 목사(John F. MacArthur, Jr.)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의의 길 안에서 끝까지 견딤으로써 자신들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 John F. MacArthur, Jr.,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Academie Book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8), p. 98.
그러나 딜로우(Joseph Dillow)는 버트의 목사가 버트에게 강력하게 추천했던 책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맥아더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말을 지지하기 위해 칼빈이 말한 것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칼빈의 가르침과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은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경우 그 믿음은 어떤 행위와도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 Joseph C. Dillow, 「The Reign of the Servant Kings: A Study of Eternal Security and the Final Significance of Man」 (Haysville, NC: Schoettle Publishing Co., 2nd ed. 1993), p. 253.
칼빈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분명하고 강력한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다는 것을 살펴볼 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말과 모순이 되게 칼빈이 거짓 확신에 대해 말한 다른 것들은 어떻습니까? 이제 버트는 칼빈이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공포로 인해 비참한 존재가 되어야 함이 틀림없다.”32)라고 말했던 바로 그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비참함은 결국 끝이 없는 것이어야만 할까요?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8 ed.), 3.24.5.
** 동일 문서, 3.21.1.
버트의 혼란은 거쓰너(John Gerstner)가 인정한 것을 읽었을 때 더욱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버트는 그의 글을 읽었습니다. 거쓰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초기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우리가 물려받은 ‘구원하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은 ‘구원하는 믿음’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정의하고 소망의 확신을 구원에 필요한 핵심으로 만들었다. 이제 후기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관점을 검증해 보았고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했듯이) 그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거부하였다.”
** 「Discussions by Robert L. Dabney」, ed. C. R. Vaughan (Richmond, VA: Presbyterian Committee of Publication, 1890), 1:183
거쓰너의 이 말은 버트가 이전에 가졌던 구원의 확신이 실제로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믿음과 일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후퇴한 사람들은 후기, 즉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버트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그리고 왜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이러한 불일치가 있어야 할까요?
버트는 그토록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구원의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어떻게 자신이 놓쳤는지 의아했습니다. 겐트리(Kenneth Gentry)는 **“확신은 주관적이다.… 다브니(Dabney)는 성경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개개인에게 특정해서 그것을 말해 주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 확신]은 성경기록을 넘어서는 계시를 필요로 한다고 제대로 파악하였다.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나, 즉 겐트리가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라고 썼습니다. 버트는 몹시 동요되었습니다. 버트는 이제 겐트리의 글이나 다른 주도적 칼빈주의자들의 유사한 주장들로부터 칼빈주의는 자신이 찾고 있는 구원의 확신을 실제로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다음과 같은 챈트리(Walter Chantry)의 주장은 그런 결론이 맞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 Kenneth Gentry, “Assurance and Lordship Salvation: The Dispensational Concern” (「Dispensationalism in Transition」, Sept. 1993); quoted by Robert N. Wilkin, “When Assurance Is Not Assurance”, Journal of the Grace Evangelical Society, Autumn 1997, 10:19, pp. 27-34.
자신이 다시 태어났는지 여부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 적어도 말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 의 의심들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없지만 자신들이 그러한 약속들의 상속자가 되는 조건들을 합당하게 이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진다.… 그들은 정당한 질문을 하고 있다. 즉 “우리는 믿고 회개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들인가?” 우리는 가룟 유다같이 자기기만에 빠진 위선자가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읽었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필수적 질문이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 그 일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와는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당신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존재는 성령님밖에 없다.**
** Walter J. Chantry, 「Today’s Gospel: Authentic or Synthetic?」 (Carlisle, P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0), pp. 75-76.
버트는 주도적 칼빈주의 옹호자들이 이야기하는 선택 문제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관심을 갖게 된 주제이고 우리가 이 책의 전반부에 여러 장에 걸쳐서 다루었던 주제입니다. 의지적 결단이 믿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완전히 성령님에 의해 나온 정신적 태도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열정으로 딜로우(Dillow)는 에베소서 6장 23절을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화평과 아울러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그는 6장 16절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해 그것으로 너희가 능히 그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며”. ‘믿음의 방패를 취한다’는 말은 분명히 우리가 의지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 즉 믿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그것은 딜로우가 주장하는 주권과는 모순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이 구절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버트는 칼빈주의 친구들로부터 아무런 위안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의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평상시에는 그것들을 부인했지만 아주 드물게 솔직해지는 순간에는 그것들을 인정하곤 했습니다. 사람이 끝까지 견디며 인내하고 평생토록 자기의 구원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칼빈주의란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하나도 없고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리고 버트는 자신이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친구가 버트에게 스프로울(R. C. Sproul)이 지은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이라는 제목의 글을 주었습니다. 버트는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그것을 읽었지만 다음과 같은 어려운 문장만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구원받지 않았지만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 Cited in Philip F. Congdon, “Soteriological Implications of Five-point Calvinism”, Journal of the Grace Evangelical Society, Autumn 1995, 8:15, pp. 55-68.
그것은 버트가 한때 가졌던 구원에 대한 확신, 즉 칼빈주의를 알고 나서 보니 아주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난 그 확신에 대한 설명인 것 같았습니다. 이제 그는 좀 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는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자기가 확신할 수 있는 범위 밖의 것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버트는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셜(Howard Marshall)의 진술은 버트의 가슴을 바로 관통하는 것 같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상황과 아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말했든지 ‘칼빈주의자는 자기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구원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있지 않은지는 알지 못한다.’는 말은 칼빈주의의 구원 문제를 가장 잘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 Howard Marshall; cited in D. A. Carson, “Reflections on Christian Assuranc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4:1, p. 24.
그렇다면 칼빈주의 그것 자체가 버트의 의심의 뿌리였을까요?
버트는 읽으면 읽을수록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딜로우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믿음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하고 설명하다가** 결국에는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행16:31)라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말했을 때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그 간수가 알았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너무 복잡했을 것이라는 데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딜로우의 긴 설명이 정말로 바울의 단순한 진술만큼 단순할 수 있을까요?
** Dillow, 「Reign」, pp. 27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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