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주제: 하나님의 사랑
버트의 고민에 찬 안색과 저조한 기분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마침내 제니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솔직하게 한번 말해 보죠. 여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하고 그녀가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믿는 하나님!”이라는 게 무슨 뜻이요?”라고 버트가 거칠게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내가 항상 믿어 왔던 분이시며 당신도 믿는 바로 그분이세요!”
“나도 짐 목사님의 말을 자세하게 들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 나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믿는 하나님, 즉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죠. 그분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주셨어요. 그래서 누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이것은 그분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건 당신 해석이지.”라고 말하며 버트가 끼어들었습니다. 버트는 제니가 자신이 의심하는 것들을 알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말을 끝낼게요. 제발… 당신이 발견한 새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선택권을 주지 않으시죠. 그분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서 그들을 자신의 주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고…”
“그건 사실이 아니야!” 버트는 바로 쏴붙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심으로 우리가 기꺼이 믿도록 만드셔.”
“당신은 의지적으로 다시 태어났나요?”
“나는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몰라.” 이러한 말들은 버트가 의식적으로 알아채기도 전에 불쑥 그의 입에서 나와 버렸습니다. 그는 계속 말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을 수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해. 우리는 먼저 다시 태어나고 그런 다음에 믿음을 받지.…”
“제가 말한 게 바로 그거에요, 당신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였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당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어요. 그런데 만약 그것이 당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글쎄… 나는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어.”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분이 당신을 선택했으니까.”
“은혜는 불가항력적이어야 돼.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주권을 가진 하나님께서 인간이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하려 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그렇다면 그분은 주권을 가진 분이 아니지! 내가 믿는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인간이 자기의 목적을 좌절시키도록 내버려 두는 분이 아니야. 당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지 못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통치 권세를 다른 어떤 존재와도 나누지 않으셔.”
“주권, 예지(미리 아심), 자유 의지… 칼빈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고 있어요.” 제니가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해요. 진짜 주제는 사랑이지요, 그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고요. 당신은 진짜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만 사랑하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을 믿나요? 대체 이게 무슨 사랑인가요?”
“글쎄… 성경은 선택을 가르치고 있어, 당신도 인정하겠지만…”
“잠시 선택은 잊어버려요.”
“그건 성경에 나와 있어. 제발!! 어떻게 그걸 당신이 잊어버릴 수가 있어?”
“내 말은 그것이 너무 복잡하다는 뜻이에요. 더 단순한 게 있어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내가 아는 하나님이 자신이 구출할 수 있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을 난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내게도 편한 사실이 아니야.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이라고 가르치고 있어.”
“성경 어디서 그렇게 말하고 있나요! 내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파멸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어요. 버트,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 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어요. 그것은 내가 알고 성경에서 읽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거든요. 난 당신과 목사님이 빠져 있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잘못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을 논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그저 논쟁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논쟁하는 게 아냐. 이것은 중요해. 나는 여러 달 동안 이것을 연구해 왔어.”
“버트, 당신이 그것에 쏟은 노력을 인정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 개개인의 죄들을 사면하시려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그들 대신 죽게 하시고 그 결과 그분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 연구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한 절만 있으면 돼요.”
“이런 구절에 나오는 ‘세상’이란 모든 사람 개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 즉 선택받은 자들을 말하는 거야!” 버트가 대꾸했습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 조금만 연구해도 알 수 있어.…”
“나도 지금까지 연구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딤전2:4) 베드로가 말한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벧후3:9)는 것을 칼빈주의가 훼손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구절들을 난 충분히 알고 있어요.”
“‘모든 사람’은 모든 종류의 사람을 의미해. 바울은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디모데전서 2장 2절에서 말하고 있어. 여기서 그는 선택받은 자들 속에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어. 내가 설명을 좀 하자면…”
“버트, 제발 성경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어느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때 왜 그 구절들이 선택을 말하게 하려고 그렇게 어렵게 노력하죠?” 제니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당신은 계속 칼빈주의나 연구하세요. 난 단순한 믿음에 붙어 있을게요.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맙시다.”
“우리는 논쟁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제니는 부엌으로 가서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이것이 나의 확신일세!”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지옥 : 누구의 선택인가?
버트는 (비록 제니에게 이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제시하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수많은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한때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을 지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지만 지금 그는 주권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하나님의 사랑을 감소시킨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는 화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가장 고귀한 목표요,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안다. 따라서 “성경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성경이 주는 가장 심오한 답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에 결코 놀랄 것도 없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된다.**
** James R. White, 「The Potter’s Freedom」 (Amityville, NY: Calvary Press Publishing, 2000), p. 178.
이러한 말들은 몇 달 전만 해도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버트가 금세 동의할 수 있었던 아주 듣기 좋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예정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또한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수도 있는데 그리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습니다.
몇 달 전에 제니로부터 들은 다음과 같은 말이 그에게 떠올랐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곳에 가기를 원치 않으셨고 그들에게 사랑을 보이시며 거저 완전한 구원을 주셨지만 그들이 거절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게 된다고 성경이 가르쳐요.
인간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고 거부되는 것이라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이 더 이상 예전처럼 간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허용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결정을 할 수는 없으셨을까요? 버트는 칼빈주의에 대한 몇 개의 비평서들을 주의 깊게 읽기 시작하다가 꽤 일리가 있어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 즉 하나님의 전 우주적 장기판에서 단지 졸에 불과한 존재를 만드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를 만드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권능(전능함)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후자가 더 큰 힘을 필요로 한다는 데 동의한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하기 위해 어떤 준비도 할 수 없는 불멸의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들을 파멸로 밀어 넣으시는 하나님은 잔인한 분이신가? ‘사람들이 믿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라고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결코 자기 의지대로 그분을 선택할 수 없으면서도 ‘저항할 수 없게’ 불가항력적으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과 그 하나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 선택과 칼빈주의 5대 강령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는 사상에 의문을 가진다. 자신이 선택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권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권능과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님이시다.
** Congdon, “Implications,” 8:15, pp. 56-57.
성도들의 견인?
버트는 계속해서 구원의 확신 문제로 씨름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차치하고라도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도 성경적인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는 다시 화이트의 「토기장이의 자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칼빈주의자들이 거의 100% 동의했던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듣거나’ ‘믿을’ 수 있기 전에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것은 본성에 속한 자연인을 다시 태어나게 해서 영적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 White, 「Potter’s」, pp. 112-113.
버트의 기억에 따르면 화이트의 진술과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데 있어서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들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따라서 다시 태어났고 그 결과 복음을 믿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화이트와 같이 유명한 청교도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믿음에 선행하는 거룩함의 원칙,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같은 행위가 있을 수 있기 전에 죄인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결정적 변화가 생긴 밤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버트는 그때의 기억이 어떻게 이런 진술과 부합할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 John Armstrong, “Reflections from Jonathan Edwards on the Current Debate over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quoted in speech given at Annapolis 2000: A Passion for Truth conference, sponsored by Jonathan Edwards Institute, PO Box 2410, Princeton NJ 08543). For more information on Jonathan Edwards’s view on justification, contact Grace Evangelical Society, (972) pp. 257-1160.
버트는 자신이 매우 존경했던 칼빈주의 지도자 암스트롱(John Armstrong)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있다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경악했습니다.
나는 한 일 년 전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어떤 목회자들로부터 ‘오늘날 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교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버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테이프를 다시 돌려 두 번 더 들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그가 처음 들었던 것이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가장 악하고 파괴적인 것일까요? 암스트롱은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만 인간은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롬2:13-14). 성경이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말할 때 그것이 바로 그 말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결코 가설적 구절이 아니며, 여러분, 많은 개신교도들이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14절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야고보는 이 점에서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을 보면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하도록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구원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필요한 행위들입니다. 그것들이 없다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당연히 칼빈주의에서는 어떤 구원의 확신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데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버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암스트롱이 맞을까요, 아니면 딜로우가 맞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서로에게 모순이 될 뿐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도 모순이 되고 있습니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설교 테이프에서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고, 루터의 의지의 속박은 종교 개혁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으며, 믿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을 믿고 지키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 될 수가 있을까요? 버트는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암스트롱이 다음과 같은 자신의 해법을 주었을 때도 그것은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는데 성도들의 견인이야말로 칭의를 나타내는 필수적 속성이다.
**성도들의 견인? 그것이 버트에게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견딜 필요가 있었을까요? 만일 버트가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 속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 ‘성도들의 견인’은 영어로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교리를 하나님이 자신의 선택받은 자들을 끝까지 견인해 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칼빈주의에 깊숙이 들어가면 이것은 성도들이 참고 견디는 인내가 된다. ‘persevere’라는 말은 영한사전에 있듯이 원래 뜻이 ‘참다, 견디다, 버티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체가 될 때는 견인이 맞고 사람이 주체가 되면 인내가 맞으므로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견인과 인내 두 개를 다 사용하였다.
성도들의 견인은 어떤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다른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버트는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성도가 끝까지 인내하지 않았다는 것이 애당초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까요?
자, 그것은 사람이 죽어서 자기가 진짜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였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이 진짜로 구원받았음을 결코 확신할 수 없음을 뜻하였습니다.
버트는 한때 성도들의 견인 교리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도해 주신다(견인해주신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강령의 마지막 교리, 즉 성도들의 견인에 대해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너희 안에서 일하사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빌2:13)
그런데 이제 그는 선한 행위를 지속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달려 있음을 발견했으며 동시에 자기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기가 선택받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그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버트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의문이었습니다.
왜 그는 성도들의 견인이 성도들이 자신의 행위로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좀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요? 버트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성적’이 최근에 나빠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이것은 믿음 면에서의 그의 인내가 원래 성도가 이루어야만 하는 인내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의심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그가 인내하면서 견뎌 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더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심들은 고대 저자든 현대 저자든 칼빈주의 저자들의 저서들을 연구할수록 더 커져갔습니다. 칼빈주의 그 자체가 의심들을 키웠을까요? 아마도 칼빈은 자신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을 때 이것을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종종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란 거의 없다. 당신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선택에서 온다. 그러나 당신의 선택에 대해 당신은 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일단 이러한 생각이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것은 계속해서 그를 영구히 비참하게 만들고 무시무시한 형벌에 굴복하게 하거나 완전히 인사불성의 상태로 던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파선을 두려워한다면 이 바위, 즉 그것에 부딪히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바위를 피해야만 한다.**
** Calvin, 「Institutes」, 3.24.4.
버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임을 확신하려고 하는 것이 치명적일까요? 잠깐만요! 버트에게 구원의 불확실성을 가져온 것은 칼빈의 선택 교리가 아니었나요? 비칼빈주의자들에게는 그러한 의심들이 결코 없습니다. 버트가 이 교리를 버린다면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칼빈주의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⑧ (1) | 2025.04.21 |
---|---|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⑦ (1) | 2025.04.21 |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⑤ (1) | 2025.04.21 |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④ (1) | 2025.04.20 |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③ (1) | 2025.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