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느 칼빈주의 자의 정직한 의심⑦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1. 09:28

대답할 수 없는 더 많은 의문들

버트는 조심스럽게 기독교 친구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들에 속했으며 그것을 증명해 줄 행위들이 자기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행위를 특별히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반면에 비칼빈주의자들은 자기들은 단순하게 복음을 믿었다고 답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것이 자기들에게 충분하다고 답하였습니다.

버트가 연구를 하면 할수록 의문거리들이 더 생겨났습니다. 인간이 본성 면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어떻게 그가 선한 행위를 바라고 행할 수 있을까요? 만일 ‘전적’ 타락이 그러한 점에서 정말로 ‘전적’이 아니라면 왜 복음을 믿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적’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할 수 없는데도 회개하라고 계속해서 호소하실까요? 다시 태어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역해서 지옥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보내셨을까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주시지 않을까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 이것이 항상 제니가 제기하는 불만의 핵심 단어였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구원하실 수도 있는 사람들(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킬 수 있을까요? 더 심한 것은, 어떻게 모든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께서 누구를 파멸시킬 수 있을까요?(벧전5:10) 그는 결코 제니에게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으며 이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을 밖으로 밀어내고 중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제니의 진심어린 다음의 질문이 그의 마음속에 맴돌았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사랑인가요?

여하튼 스펄전의 작은 책자가 버트의 손에 들어왔고 그는 흥분해서 그것을 읽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이며 확실한 칼빈주의자인 스펄전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을 언제 다시 태어나게 하셨는지 인식할 수 없었으며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오고 있을 때 나는 내 힘으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열심히 찾았다고… 얼마 지나고 나서야 그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의 밑바닥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믿음의 창시자시며 그래서 은혜의 전체적 교리가 나에게 열렸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끝내면서 가장 경건하고 독실하며 주님께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은혜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으며 그것은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확언하였습니다.

** Charles Haddon Spurgeon, “A Defense of Calvinism”, single-sermon booklet (Edmonton, AB: Still Waters Revival Books, n. d.), pp. 3-4.

** 동일 문서, p. 22.

스펄전의 이 말은 버트 주변의 비칼빈주의 친구들이 하는 말같이 들렸고 스펄전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버트가 칼빈주의자가 되기 전에 믿었던 바로 그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버트는 자신이 칼빈주의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을 구원의 창시자, 죄인들의 구원자시라고 찬양했고 그분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렸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영을 통해 그가 하나님을 찾도록 하지 않으셨다면 자신이 그분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도 확신하였습니다.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스펄전이 말한 것 중 어떤 것도 무효로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 될까요?

제니는 사실 얼마 전에 “어떤 칼빈주의자가 하는 것보다도 내가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더 진실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보여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신,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소?” 하며 버트가 반발했습니다.

“나의 감사와 찬양은 내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죠. 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프로그램이 된 존재가 아니에요.”

“프로그램이 되었다고? 어떤 칼빈주의자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

“물론 당신은 그것을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당신의 마음이 그분께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을 믿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어요.”

“나는 믿도록 프로그램 되지 않았어.” 버트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습니다. [언제나 제니가 이것을 이해할까?] “은혜롭게도 우리의 의지가 바뀐 거지!”

“좋아요. 당신은 믿도록 조정되어 있어요. 버트, 하나님께서 당신이 전에 믿지 못했던 것을 믿게 하시려고 당신의 의지에 무언가를 하셨다는 사실을 당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일은 당신 편에서 할 수 있는 어떤 확신이나 어떤 이해나 어떤 믿음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던 칼빈주의 책들 중 일부를 읽어 보았어요.”

다른 문제로 논쟁할 때처럼 그들은 진지하게 논쟁하게 되었고 이번에도 또한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버트의 확신은 더욱더 흔들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자신의 불확실성이 칼빈주의 자체로부터 일어난다고 그가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칼빈이 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많은 경고의 소리를 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탄이 믿는 자들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시험들 가운데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의심으로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위험한 것은 없다. 동시에 사탄은 합당한 방식이 아니라 선택에 대해 의문을 가지려는 타락한 욕망으로 그들을 자극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하신 최종 결정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 중 숨겨진 깊은 것들을 꿰뚫어 보려는 열망을 가진다.**

** Calvin, 「Institutes」, 3.24.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하신 최종 결정을 알려고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버트에게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칼빈은 스스로 모순이 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때때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우리의 선택을 위해 우리가 그저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확신은 성경 말씀보다 더 앞서 나가면 안 된다.

버트는 자신이 칼빈이 말한 대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칼빈주의를 버리고 복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버트는 절망 속에서 어쩌면 자신이 회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 이전으로 돌아가야만 할지도 모르며 자신을 길러 준 카톨릭교회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망 - 그리고 깨우침

버트는 카톨릭교회로 돌아갈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불확실했지만 그는 옛날 교구로 다시 가서 자신을 모르는 사제가 그곳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을 좀 더 쉽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사제에게 자신이 로마 카톨릭교회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원한다고 말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하다가 칼빈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15분쯤 지났을 때 버트는 아주 놀랍게도 이 사제가 자기의 담임 목사보다 칼빈주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사제는 반질반질 닳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서가에서 뽑더니 참 교회로 돌아오려는 버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의문도 자기가 잠재울 수 있다고 확신하는 부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이 침례(세례)에 대해 말한 것을 그가 읽게 되었을 때 버트는 거의 뛰어 오르면서 “할렐루야!”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받은 유아 세례가 그를 선택받은 자들 중에 한 명으로 만들었다는 칼빈의 설명을 들을 때 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받은 카톨릭 유아 세례에 내재된 약속을 믿는 것뿐이었습니다.

버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카톨릭교회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았습니다. 결국 알고 보니 그는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 자신이 그것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버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유아 세례를 믿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확신은 겨우 며칠 동안만 지속되었습니다. 과연 그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던 유아 시절에 받은 세례, 그것도 스스로 거짓된 구원을 가르치고 실행했던 카톨릭 사제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세례를 구원의 조건이나 확신으로 믿어야 할까요? 그것이 정말로 영원한 구원의 성경적 기초였습니까? 아무튼 칼빈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믿었던 참 복음 즉,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권능’, 그리고 그 결과 다시 태어나는 것은 어떤가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하는 유아 시절에 세례를 받은 것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칼빈은 분명히 그렇게 주장하였고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칼빈이 그것을 주장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버트는 마침내 칼빈주의 연못에 있는 한 마리 물고기, 그러나 너무 커서 칼빈주의가 삼킬 수 없는 물고기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의심들에 직면했습니다. 칼빈이 유아 세례에 대해 이처럼 틀렸다면 - 루터가 틀린 것처럼 칼빈이 이 점에서 틀렸다는 것에는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 혹시 그의 다른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잘못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왜 버트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인 TULIP을 믿어야 할까요? 칼빈이 유아 세례에 대해 쓴 것과 같은 이단적 교리를 쓸 수도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아 세례에 대한 칼빈의 말은 이단적인 말(heresy)입니다. 그것을 달리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 사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것을 찾아 버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버트는 집에 가서 혼자서도 그것을 찾아보았습니다.

잊어버린 도전

버트는 자기가 찾으려는 답, 즉 이해하기 힘든 답을 찾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 칼빈주의 저자들의 책들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통독하고 한 번 더 설교 테이프들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한 권의 책에서 버트는 자신이 칼빈주의자가 되고 나서 수개월 후에 한 친구가 자기에게 보낸 염려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잊었지만 그 편지가 자신의 의심들에 중요한 몫을 했던 것이 그의 기억 속으로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것을 주의 깊게 다시 읽었습니다.

버트, 자네를 겸손하게 만든 칼빈의 선택의 교리에 대해 말하려 하네. 자네는 어떻게 자네가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에 들어가는지 안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칼빈은 하나님께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 중 어떤 자들을 제대로 더 잘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은 믿었고 선택받은 자들 중에 들어간다고 상상하도록 만드셨다고 말했지. 그 하나님이 지금 자네가 믿는 하나님이신가? 설마 자네는 자신이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이라고 그저 상상하는 건 아니겠지?
선택받은 자들 중 한 명이 되려면 자네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네를 선택하는 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자네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지. 칼빈은 또한 영원한 지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도록 예정하는 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네. 그것이 자네를 괴롭게 하지 않는가? 자네는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 원하나?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네.

이 말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버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구절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일부 죄인들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버트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서 다시 책 속에 넣었습니다. 원래는 그 편지가 그를 화나게 해서 그는 그 친구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이제 그는 전에 답변을 하려고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답변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제니가 그 편지나 자기의 답장을 보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전환점

그 편지의 내용을 보고 어떻게 답장을 쓸지 생각하면서 버트는 자신을 ‘주님께 인도했던’ 아내가 자신이 찾고 있는 바로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처음부터 그가 칼빈주의가 주는 지성적 호소에 끌렸을 때 그녀는 그가 그 주제를 끄집어낼 때마다 토론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한 요점은 자기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약속을 의지하여 평안 가운데 있으며, 복음은 말씀들의 명백하고도 분명한 의미를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보다 사랑이 훨씬 더 적은 하나님으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는 말들이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를 칼빈주의에서 구출해 내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버트는 칼빈주의 전문가나 비칼빈주의 전문가의 말을 듣거나 읽는 것을 멈추고 성경 자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칼빈주의에 맞추려고 성경기록의 말씀들을 바꾸려 하기보다 성경기록의 말씀들을 그대로 읽고 그 의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버트는 자기 어깨에서 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가 씨름했던 마지막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선택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버트는 자신이 간단한 것을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고용주라도 자기의 고용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 즉 고용주의 선택은 결정적이라는 사실 그 이상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고용인이 고용주에게 자신을 고용하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고용주는 아무에게나 자신을 위해 일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고용주가 고용에 관한 한 전적 책임을 지고 있긴 하지만 고용인이 그 일에 고용되는 것에 동의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 대한 어떤 의무도 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오직 그분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일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버트는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 있는 의문들을 가지고 담임 목사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토론하였고 그를 붙잡아 두려는 목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에 대한 버트의 믿음은 심하게 퇴색되었으며 반면에 단순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점차로 회복되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무릎을 꿇고 씨름해야만 했던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았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음에는 어떤 의심도 없었습니다.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버트가 지금 믿게 된 그 사랑)과 이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요? 바로 이것이 마지막 숙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