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칼빈주의’, 그것은 무엇인가?
버트는 자신이 겪고 있는 혼란의 문제를 다시 담임 목사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대화했지만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목사는 버트가 거의 절망적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버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 같이 기도해 봅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권적 은혜로 버트의 모든 의심과 혼란을 깨끗이 제거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펴고 일어났을 때 목사는 서재로 가서 책 한 권을 꺼내 버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맥아더(John MacArthur Jr.) 목사의 신간 서적인 「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인데 목사가 많이 봐서 그런지 제법 손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읽어 봐요. 다 읽으면 돌려주세요.” 그는 버트에게 말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극단적 칼빈주의’에 빠진 것 같군요. 아마도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극단적 칼빈주의라니요? 그게 뭔가요?”
“음, 그 차이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아마 내가 당신을 그쪽으로 끌고 간 것 같군요. 난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 속죄를 강조했지요. 좀 너무 많이 한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건가요? 설마 세상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니죠?”
“글쎄요, 극단적 칼빈주의와 맥아더 박사가 이 책에서 취한 ‘좀 더 온건한 칼빈주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 모두가 그런 의미로 생각했던 것을 꽤 잘 말해 주고 있지요.”
“꽤 잘 말해 주고 있다고요?”
“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말이죠?” 버트는 예리하게 끼어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목사님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죠? 그것이 맥아더가 말하는 것인가요?”
“물론 그것은 아니지요! 당신이 아시다시피 그는 제한 속죄를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극단적 칼빈주의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단호하게 보여 줍니다.…”
“그분이 친히 불 호수에 보내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신다고요? 그건 목사님이 저에게 가르쳤던 것이 아니잖아요? 말도 안 돼요. 날 놀리시나요?”
“제발, 버트 형제님, 맥아더 목사는 하나님께서 영벌(유기)에 처하게 될 자들도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랑은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지요.…”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고요? 도대체 그런 종류의 사랑도 있나요?”
“음,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지요. 패커(J. I. Packer)도 그런 말을 했어요. 파이퍼도 그렇고… 아내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맥아더는 솔직하게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칼빈주의의 선택 교리와 상충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습니다.”
“보편적 사랑이라?… 지금 목사님은 나를 놀리고 있군요!”
“이 책을 들고 가서 잘 읽어 보세요. 답이 있을 것입니다.”
**John MacArthur, 「The Love of God」 (Dallas, TX: Word Publishing, 1996), p. 110.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다음 날 저녁을 먹고 형제들의 성경 공부 모임(당시에는 모이지 않은 것 같음)에 가는 대신에 버트는 집에서 기대를 잔뜩 품고 새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맥아더 목사가 - 지금은 분명히 자기의 목사가 - 극단적 칼빈주의라고 말한 것이 버트에게는 바로 자기의 목사와 주도적 칼빈주의 저자들(물론 칼빈도 포함해서)이 쓴 책들에서 배운 칼빈주의와 같은 것으로 들렸습니다. 분명히 온건한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 둘 다 제한 속죄를 포함해서 5대 강령을 다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버트는 마침내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부인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라는 말이 ‘예외 없이, 그러나 차이는 있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칼빈주의에서 돌아선 뒤 그는 자기가 비칼빈주의자들과의 논쟁하면서 ‘예외 없이, 그러나 차이는 있게’라는 이 신비한 말을 끼어 넣기를 좋아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맥아더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 심지어 선택받지 못해서 버림받은 자들도 - 사랑하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고전적 칼빈주의자들이 항상 믿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신실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 그분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예비된 특별한 방식으로 선택받은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덜포도원 농부는 소출을 바란다 실제적 사랑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구원을 주기로 의도하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말인가? “말도 안 돼!” 버트는 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왜 그들은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까?”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버트는 책을 읽으면서 맥아더 목사가 스스로 모순을 보이는 모든 곳에 표시를 했는데, 이것들의 대부분은 자기의 담임 목사도 분명하게 인정하면서 이미 표시했던 것들이었습니다. 버트는 그다음 주 제자 훈련 모임에서 자기 목사에게 그 모순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맥아더 목사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봐요.”하고 버트가 불평을 했습니다.
“그는 소위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믿는 것과 같은 것을 믿지만 그것을 인정할 만큼 정직하지는 않아요! 그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로 그것을 덮고 있지만 그것이 그를 심각한 모순들 속에 가두어 버렸어요!”
“버트,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그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성경기록에서 보여 주느라 책 전체를 할애하고 있는데…”
“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예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요? 그러나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까? ‘그분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예비된 특별한 방식으로 선택받은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덜 실제적 사랑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라는 말을 좀 보세요.”
“그렇죠. 그것이 바로 내가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수도 있는 사람을 영원한 벌을 받도록 예정한다는 것이 진짜 사랑인가요?”
“글쎄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요.” 목사가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듯이 이 점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해야만 할 의무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버트가 주장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계신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분은 어떤 법에 의해서도 강제로 의무를 지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모든 법을 만드셨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나 그분의 본질이 사랑 아닌가요?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바로 그 본성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않으시지요!” 목사가 끼어들었습니다. “사랑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과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다르죠.”
“나는 지금 논쟁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한 높은 기준을 잊어버리고서… 내가 이웃집에 불을 지른다면 그것도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요?”
“물론 그건 사랑이 아니죠.” 즉각적으로 단호한 대답이 왔습니다.
모순들과 애매한 말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영원히 불 호수에 이르도록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나요? 그건 실없는 말일뿐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형제님은 이 사람들이 죄인들임을 잊어버렸어요. 그들은 그 형벌을 받아 마땅해요.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분께 반역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왕좌에서 그분을 쫓아내려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를 입증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똑같이 유죄이고 영원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나요? 만일 하나님의 정의로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 어떻게 그 정의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머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게 할 수 있나요? 그분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죠. 물론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서긴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게 하시며 모두를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모두에게 믿음을 주시도록 선택하실 수는 없으셨나요?”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목사가 반대 의견을 말했습니다.
“계획이라니요?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그분은 그 계획 속에 모두를 포함시키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구원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나요?”
“그 점이 바로 맥아더 목사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책 좀 볼까요?” 목사는 마치 그 책을 여러 차례 읽었던 사람처럼 재빠르게 손가락으로 책을 뒤적거렸습니다.
“여기 좀 보세요.” 그가 마침내 말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그분의 탄원, 버림받은 자들에게 베푸는 그분의 긍휼, 듣는 모든 자들을 복음으로 초청하는 것은 모두 다 죄인들이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살라고 부드럽게 초청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신실하게 표현한 것들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주신다(사55:1; 계22:17).… 개혁 신학자들은 항상 모든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임을 단언해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맥아더는 칼빈을 인용하였는데 그는 같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기 위해,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변명을 제거하기 위해 ‘누구든지’라는 보편적인 말을 사용하셨다.’”
버트는 목사에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건 더 애매한 말이군요. 목사님은 확신이 드시나요? 나도 이 책을 읽었어요, 그래서 맥아더 목사가 말한 것을 압니다. 제가 찾아볼게요. 여기 이 인용 부분의 마지막을 보세요. 칼빈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의 눈만 열어 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그들은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모순을 보지 못하시나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지 않았던 사람들과 이미 과거의 영원부터 구원받지 않도록 정해져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들이 포함된다.’ 분명히 맥아더 목사의 이 말은 사실일 리가 없어요. 목사님은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것이 우리에게 모순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목사는 설득력 없이 말을 시작했지만 버트는 그의 말을 잘랐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도 잘 알고 계시죠? 그분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의 눈만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지금 그분이 눈을 열어 주신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버트가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목사님! 그것은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녁 식사를 하러 내 집에 오라고 초대장을 보내 놓고는 선택된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알려 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 것과 같아요. 물론 내 칼빈주의 친구들은 내 편을 들면서 내가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오기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집을 찾도록 하는 것을 내가 불가능하게 만드는데도 말입니다. 바로 그런 게 애매한 말입니다! 마치 그것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것과 같아요.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성경을 믿고 싶어요. 그러나 확신을 잃어버렸어요. 왜냐하면 스프로울, 패커, 파이퍼, 맥아더와 같은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뻔뻔한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성경 안에서 답을 찾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죠.”
그것은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목사는 맥아더 목사를 변호하였고 버트는 그런 저자들의 모순들이 부끄럽지만 확실하게 드러났으며 바로 이런 것들이 칼빈주의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음을 거칠게 참을성 없이 주장하면서 논쟁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마침내 버트는 목사에게 화를 낸 것에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떠나 직장으로 가면서 논쟁을 시작한 것에 대해 후회하였습니다.
아주 골치 아픈 생각에 질식하며
버트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려 하면서 하루 종일 힘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론적인 말을 해부하면서 칼빈주의가 하나님께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 주셨다는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간에 그것은 그들이 정말로 구원받기를 바랄 정도의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맥아더와 파이퍼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원받지 못하도록 배제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은 신실하며 사랑이 넘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 포함시키실 수도 있었는데도 영원한 고통과 형벌에 처하도록 미리 예정하신 사람들을 그분이 정말로 사랑하셨다고 주장하는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의 위선을 생각할 때마다 버트는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라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단순하게 그 진리를 받아들일 만큼은 정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편적 은혜’로 인해 자신이 구원하실 수도 있었지만 영원한 불 호수로 보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위해 사랑으로 온 세상을 주셨다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버트가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칼빈주의의 일반적 오류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온갖 종류의 칼빈주의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대체 무슨 ‘하나님’이었습니까? 버트는 그러한 하나님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지금 무신론자가 되려 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유혹이 온통 그를 사로잡았고 두렵게 했습니다.
회심 이후에 버트는 변증학의 필요성을 강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성장한 그는 진화가 사실이라고 배웠습니다. 대학에서 그는 한 기독교 창조론자와 같은 분야에 있는 교수 간에 진행된 진화에 대한 논쟁을 보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버트는 자기가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일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증거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이것들이 모두 성경과 기독교의 유효성을 증명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로서 그는 변증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성경 연구 모임에 나오는 몇 명의 칼빈주의 친구들은 변증학에 빠져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선택받은 자들은 어떤 증거나 설득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선택받지 않은 자들에게도 증거나 설득이 아무 유익이 없었습니다. 얼마 동안 그는 다소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변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뀐 것에 대해 죄책감까지 느꼈지만 한 동료 칼빈주의자(버트보다 칼빈주의에 조금 더 오랫동안 몸을 담은 형제)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변증에 무관심한 태도가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여 주자 그러한 감정들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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