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의 마지막 라운드
칼빈주의자들이 좋아하고 화이트가 상당한 관심을 보인 성경기록은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요12:39-40 이런 이유로 그들이 믿을 수 없었으니 이는 이사야가 다시 말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이르되,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하였더라.
화이트는 또한 요한복음 8장 34-48절을 인용하면서 특별히 43절을 강조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
그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다시 인간에 대한 개혁주의의 성경적 관점은 힘 혹은 능력과 함께 나타난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어서(무능력이라는 단어가 있음)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들은 영적 진리를 인식할 영적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 버트는 이러한 구절들이 전적 타락과 불가항력적 은혜의 필요성을 입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를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칼빈주의가 정의한 것처럼 다시 태어나지 않은 유대인들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죄들 가운데서 죽었으며 그러한 조건에서는 보거나 믿을 수가 없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실 필요가 있음을 보신다는 사실은 결국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의 대상인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시려고 고의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을까요? 순종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탄식하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축복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에 버트는 이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였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려 할까요? 이렇게 하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소멸시키지 않아야 하며 또 대언자 이사야 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면서도 대언적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시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여야만합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스라엘의 대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 반역, 완고함을 들추어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오 하늘들이여, 들으라. 오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들을 먹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1: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아셨고 그들에게 더 호소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파라오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대언자들의 외침을 통해 선포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눈먼 사람들의 눈을 열게 하시며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기를 원하셨고 자신의 아들을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로 주시고 또 과거에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해 하늘로부터 계속해서 친히 우신 것처럼 이 땅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으며 그들과 세상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여전히 자신을 거역하면서도 그분께 십자가까지 지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순간적 감정에 의해 자신의 이런 목적이 좌절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를 없애 버리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요19:15) 바로 이것이 그들의 강퍅한 마음이 진짜로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적 연민으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고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해 넘겨지시매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라고 말했습니다.
버트는 눈이 멀게 되는 것에 대한 동일한 예를 휴거 전에 복음을 들었으나 그것을 거절한 사람들, 즉 휴거 때 땅에 남겨지는 자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 특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살후2:11-12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하심이라.
무슨 까닭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실까요? 바로 앞의 10절이 해답을 줍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음이 강퍅해진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믿기를 원하던 거짓을 믿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자기 마음대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마음의 소원대로 회개하지 않는 반역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주시는 일에 완벽하게 공의를 보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이 진리를 거부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진리를 거부하도록 그들을 돕습니다. 칼빈이 정의한 대로 그들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네, 다음과 같은 말씀은 사실입니다.
고전2: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며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창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복음(막16:15)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믿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숨겨진 지혜… 하나님의 깊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성령님이 내주하시며 그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그 성령님께서 계시하시는 것들입니다.
마지막 질문
짐 목사는 칼빈주의에 대한 버트의 확신이 약해지는 것을 걱정하면서 성경 신자(Bible believer)들이 믿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 교리에 대해 그가 정말로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고 도전적으로 물었습니다.
만일 형제님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예’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성경 신자들의] 믿음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어떻게 형제님은 언젠가 - 심지어 영원한 천국에서라도 - 하나님께 ‘아니요’라고 말하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버트는 제니에게 이것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녀의 답은 성경 그 자체만큼이나 간단했습니다. “왜 내가 천국을 포기하길 원해야 하나요? 나를 유혹하여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은 너무 놀라우신 분이라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소?”라고 버트가 고집을 피웠습니다. “사탄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능력이 있으며 가장 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었소. 그럼에도 그는 반역했소!”
제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맞아요. 그러나 그는 결코 구속받지 못했어요,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적도 없으며…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초도 없고 자기 대신 죽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도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감사가 사람이 죄를 짓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해?” 하며 버트가 끼어들었습니다.
“죄에 대한 어떤 유혹도 없을 것이며 어떤 이유로도… 말이 안 돼.”
버트는 논쟁하지 않고 그녀를 항복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사탄을 유혹했지? 그의 반역의 이유는 무엇이지? 교만이잖아. 하늘에 있는 존재들에게 자유 의지가 있었다면 그들은 교만에 이르도록 유혹을 받지 않았을까?”
“버트, 당신은 계속 사탄을 끄집어내고 있군요. 난 사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사탄과 그의 마귀들에 대해 분석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거든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할 수 없느니라.’(갈5:17)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는지 그 이유를 이 내적 갈등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으면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출하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처럼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라고 말한다고 바울은 덧붙여 말해요. 그는 부활, 즉 죄의 몸, 고통, 죽음으로부터 구출 받는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버트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건 좋은 지적이야.” 그는 마침내 동의했습니다. “사탄의 예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서 경험하게 될 것과 관계가 없다고 나도 생각해. 당신이 맞아. 사탄은 결코 다시 태어나지 못해. 분명히 성령님은 사탄 안에 내주하시지 않아.”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그는 “이봐요, 나는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야. 과거에 내가 너무 논쟁을 많이 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이것은 실제 문제이고 나는 정직한 답변들을 찾고 있소, 나는 진리를 알고 싶어.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서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과연 어떨지 나는 잘 모르겠어.” 그는 풀이 죽은 채 침묵하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제니는 그에게 이해와 연민의 표정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진리를 알고 싶다고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나는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라고 말씀하셨죠. 그분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절대 멸망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분을 믿어요, 그것이 내가 알아야 할 전부예요. 그것은 아주 간단해요.” 그녀는 사랑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버트의 옷을 다리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버트에게는 은혜로 구원받을 때 자신이 얻는 ‘구원에 대한 영원한 안전 보장’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생각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과 같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나 구원의 확신은 행위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고, 행위는 한 사람의 구원의 실체의 징표도 될 수 없으며 구원의 확신을 주는 수단도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분명하게 이적을 행하거나 마귀들을 쫓아내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언한다 해도 그것들은 결코 그가 그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엄숙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7:21-23 내게, 주여, 주여, 하고 말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반면에 어떤 특정한 사람의 삶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의 실체를 나타내는 선한 행위가 없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진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시대의 구속받은 모든 자들을 위해 계획하신 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동기와 행위를 시험하시는 불에 의해 그 사람의 모든 행위가 소멸될지라도, 바울에 의하면, 즉 어떤 구원의 외적 증거가 없어도 그 사람은 구원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3:11-15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 그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며 그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그것을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같이 받으리라.
물론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버트는 이제 자신의 문제를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구절도 한 사람이 선택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택받은 자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을 위한 기초라면 구원에 대한 확신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칼빈주의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질문에 대해 자기들끼리도 일치하는 답을 주지 못합니다. 버트는 마침내 그 칼빈주의 이론과는 작별을 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원에 대한 확신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성경적 확신은 그분의 약속과 성경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예지(미리 아심), 예정/선택, 그리고 끝까지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보존 능력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오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그분께 갔습니다.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벧전1:2 [나그네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을 통해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이르도록 선택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화평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1:4-7 이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우리를 택하시며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들로 입양하심으로써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심에 따른 것이니라.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주셨고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른 것이니라.
롬8:29-30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자신이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요1:12-13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이나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느니라.
요3:17-18, 36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5:11-13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함이라.
요5:24 진실로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딤후1:1) 믿고 구원을 받았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요3:16)는 그분의 풍성하신 약속 안에서 단순하게 안식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하게 믿는 것을 통해 믿는 자는 자신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이 증언을 가지고 있고”(요일5:10) 또한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대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롬8:16-17)인 것을 압니다.
구원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명백합니다.
엡1:13-14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리스도를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는데 이 영께서는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받을 때까지 우리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되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
이 구절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오직 하나님 그분만 신뢰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딤후1:12 그런 까닭으로 나 역시 이일들로 고난을 당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믿어온 분을 내가 알며 또 내가 그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지키실 수 있는 줄 확신하기 때문이라.
우리 또한 바울처럼 그렇게 믿었고 그리스도 예수님 그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증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벧전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할지어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고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는 상속유업을 받게 하셨나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날 준비가 되어있는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안에서 성취된 ‘오류가 없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이스라엘과 관련된 예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우리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음). 메시아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약속했던 예언들, 즉 우리 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된 예언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역사적 증거들과 고고학적 증거들, 과학적 증거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지구의 창조에 대한 참되고도 오류가 없는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아담과 이브의 타락, 죽음으로 십자가 위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데려가기 위해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것(공중 강림과 휴거)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천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천년 왕국, 즉 의가 통치하는 때에 그분께서 철장(쇠막대기)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조상 다윗의 왕좌에서 세상 모든 나라들을 다스릴 것과 그 1,000년이 지난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과 관련해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고 그분께서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많은 거처들이 있는 아버지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로써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살전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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