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 신학의 핵심은 어거스틴 신학의 부활이며 그 목적은 국가 교회를 시행하여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이런 사상을 결코 지지하지 않으며 더욱이 무력을 동원하여 온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개념이다.
플라톤 사상에 심취한 어거스틴과 그를 그대로 답습한 칼빈은 성경을 성경대로 보지 않고 자기들의 사고의 틀 속에 성경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칼빈주의 속에 들어가 그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많은 것을 가정해야 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절대로 칼빈주의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대개 지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성인의 신학 혹은 철학이다. 성경대로 단순하게 믿는 성도들에게는 칼빈주의가 너무나 어렵고 평생을 연구해도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어려우면 어떻게 그 가르침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칼빈주의가 제시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로봇과 같다. 이 로봇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리모컨을 수신할 수 있는 수신 장치를 부여받은 로봇이고 다른 하나는 부여받지 못한 로봇이다. 하나님이 리모컨으로 로봇들에게 프로그램을 입력해야만 로봇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수신 장치가 없는 로봇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입력받을 수 없다. 그들은 멸망받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신 장치가 있는 로봇들도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리모컨의 조작을 받아 - 칼빈주의는 이것을 중생, 즉 ‘다시 태어남’이라고 함 - 프로그램이 입력되면 - 칼빈주의는 이것을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함 - 그때부터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로봇들에게는 하나님의 리모컨 작동과 프로그램 입력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말하며 여기에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성이 들어 있지 않은가? 심지어 사람에게는 스스로 지옥을 택해 멸망당할 수 있는 자유도 부여되어 있다. 아담 이후로 사람이 지은 모든 죄는 사람이 자기의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범한 범법이다.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람의 전적 부패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 특히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두려움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각각 회계 보고 하리라는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며 또 이를 매우 강조한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거룩함이 중요하고 사람의 부정함이 극심하다 해도 성경에 없는 이론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믿음 생활하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어거스틴주의와 칼빈주의는 이미 성경과 역사의 증언에 의해 신빙성이 없는 인조 사상임이 확실히 드러났으며 우리는 이것을 낱낱이 성경적으로 증명하였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라면 먼저 어거스틴과 칼빈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독재와 만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런 것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사상을 가르치거나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장로교가 주축인 한국에서는 칼빈주의의 횡포가 극심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 어거스틴주의에서 나온 ‘교회교’이다. 이 ‘교회교’ 시스템에서는 특히 교회 목사나 교단 총회장이 천주교의 사제나 교황 노릇을 하며 여기에 얽매인 성도들은 구약 시대 신권 통치를 받으면서 교회와 목사와 교단에 예속된다.
또한 극도의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 행위로 구원을 완성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자들의 ‘로드십 구원’(Lordship salvation)이며 이 책의 6장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칼빈주의 자체가 구약식 교회를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이런 악순환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 목사는 제사장이 되고 건물은 성전이 되며 성도들은 제사장과 계급이 다른 평신도가 되어 종속되는 것이다.
사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많은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목사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대리자로 알고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신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긴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교회 목사의 독재나 교단 총회장의 독재는 모두 국가 교회를 운영하려 하기에 생기는 악행이며 천주교 교황이나 제네바의 칼빈의 사례가 이들의 행위를 변명해 준다. 대부분의 이단들 역시 국가 교회를 운영하려 하기에 지도자들이 철저하게 독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인간 영혼의 자유(soul liberty)를 구속하는 것은 신약 교회나 목사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다.
우리는 국가 교회 사상을 가진 목사들을 특히 주목하고 몰아내야 한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자신이 성도들을 압제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벧전5:1-4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자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하나님의 상속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지 말고 오히려 양떼에게 본이되라. 그러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왕관을 받으리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떨리는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고전2:3-5 내가 약하고 두려운 가운데 몹시 떨면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며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너희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안에 서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권능 안에 서게 하려함이라.
그러면서 그는 목사의 태도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고후1:24 우리는 너희 믿음을 지배하려하지 아니하고 다만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하나니 이는 너희가 믿음으로 서있기 때문이라.
바울은 대사도였지만 결코 무력이나 강압으로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였다. 그러나 칼빈이나 어거스틴에게서 우리는 이런 태도를 전혀 볼 수 없다. 그들은 구약의 신권 정치 하에서 모세나 여호수아 혹은 사무엘이 휘두른 권력을 스스로 휘두르려 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과 함께 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 자기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귀를 베었다. 이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무력 사용을 금하셨다.
마26:52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들은 다 칼로 망하리라.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력을 쓰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런 일이 후대에 나타날 것임을 예고하시며 그들이 무력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요16:2-3 그들이 너희를 회당들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오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리라. 그들이 너희에게 이일들을 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칼빈이나 어거스틴의 교리를 근거로 중세에 로마 카톨릭교회는 무수히 많은 성경 신자들과 유대인들을 죽였고 장로교회와 루터 교회 역시 재침례 성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실 나봇처럼 피를 흘리며 무고하게 죽어간 그들은 대개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저들이 그들을 죽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일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고 이 일을 행하니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사도 바울 역시 양심의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인 줄 알았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적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에 가져갈 편지를 그에게 요청하니 이것은 사울이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지 이 길에 속한 자들을 만나면 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 함이더라.
그러나 바울은 죽기 전에 간증을 통해 알지 못하여 그런 악한 일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딤전1:13-14 내가 전에는 신성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오히려 긍휼을 얻었으니 이는 내가 믿지 아니하는 가운데 알지 못하고 그것을 하였기 때문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였기에 그는 그 이후로 무력 사용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남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각각 자기의 믿음으로 서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에는 신권 정치가 시행되던 때와 달리 법과 제도로 사람을 종교의 틀 안에 가둘 수 없다. 그런 시대는 모세의 율법이 세력을 발휘하던 구약의 율법 시대까지, 즉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만 유효하며 그 이후로는 새 상속 언약(신약) 시대가 열려서 누구나 믿음의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영적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이 땅에 모세나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대리자, 교황과 같은 그리스도의 대리자 -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 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불법이요 죄악이며 콘스탄틴 이후에 어거스틴이 기초를 놓은 로마 카톨릭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다. 어거스틴의 교회를 그대로 답습하는 자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성경에 있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에 무엇이 부족해서 칼빈의 독선적 가르침을 따른단 말인가? 10년 넘게 신학을 공부하며 외국에 가서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도 이 위대한 편집광이자 천재적 이론가에게 진리를 양보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허다하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바라보고 그 집요한 가르침의 족쇄를 풀고 속박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한다.
다음은 장로교 계열의 신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간증이다.
저는 이번 학기에 대학원에서 근현대 교회사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강의는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업적과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님은 칼빈을 연구하여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칼빈의 업적과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주의, 그 아래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는 교수님에게 대다수의 학우들이 감명을 받고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제가 거기서 질문을 해서 본의 아니게 분위기를 망쳐 놨습니다.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칼빈이 제네바에서 독재를 통한 철권통치를 시행하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을 무참히 화형시킨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그곳 원주민 인디언들의 목숨을 무참히 죽인 것이 역사적 실제 사건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왜 일어났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면서 “학자마다 의견이 다른데 대부분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종교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라는 취지로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계속 다른 질문을 던지니까 이제는 주변의 여러 학우들이 제 질문에 대해 “논리가 맞지 않는다. 더 연구하고 질문해라. 더 공부해 봐야 진실을 안다. 그만해라.”라고 말하며 저를 제압(?)하였습니다. 물론 그 친구들은 다 장로교 출신이고 대다수는 대학원을 졸업한 뒤 목회하려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칼빈과 청교도들은 예수님 다음으로 본받아야 될 사람들이라고 배워 왔기에 그런 반응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속으로는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후에 연구를 통해 칼빈주의, 즉 ‘튤립’(TULIP)이 비성경적이며 후대에 칼빈의 추종자들이 칼빈의 신권 통치를 합리화하고 아울러 자기들이 앞으로 칼빈처럼 교회에서 철권통치로 군림하기 위해 만든 인본주의적 사상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왜 그렇게 무참하게 인디언들을 학살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호에 목숨을 건 채 죽을 고생을 하며 힘들게 신대륙에 도착해서 자신의 집을 세우기 전에 교회를 먼저 세우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이 굶고 있어도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드렸다던 청교도들, 장로교에서 신앙의 표준이 되는 청교도들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정말 고민을 많이 하다가 저는 칼빈과 그의 후예인 청교도들의 학살이 로마 카톨릭주의의 아버지 어거스틴이 만들어 교회에 독약처럼 주입한 이스라엘 대체 신학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므로 가나안 땅(신대륙)에 신정 국가를 세워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대상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 즉 죽어 마땅한 이방 족속들로 여겨야 한다.”라고 오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며 고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의 목숨을 빼앗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라고 종교적 열심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칼빈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 특히 구약과 신약을 바르게 구분하지 못한 결과가 이렇게 참담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슬 퍼런 칼빈의 칼날 앞에 유아 세례를 거부하며 구원에 관한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처참히 죽임을 당했던 재침례교도들의 순교에 깊은 신앙적 경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진리는 다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경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것이 하루 종일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사실 청교도들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문제의 핵심인 것은 명확하다.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신대륙으로 넘어간 청교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곧바로 청교도 신앙 외에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는 국가 교회를 시행하려 하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칼빈의 가르침이 가득 차서 그들은 무력으로라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유의 땅에서 이와 같은 청교도들의 독재는 허용되지 않았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는 침례교회를 선택하여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침례교 국가가 되었고 침례 성도들의 주장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헌법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명확하게 기술되었다.
칼빈의 독재적 제네바 통치를 거론하면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역사가 왜곡되었다거나 로마 카톨릭교회가 칼빈을 모함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들이 오늘날 정설처럼 퍼져 있다는 등의 매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칼빈의 독재와 반대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하며 원주민들에게 행한 무자비한 폭력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데 이런 역사가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학에 치명적 상처를 입히기에 골수 칼빈주의자들은 어떻게든 이런 일들을 축소하고 거론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 성경 신자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위에 있는 장로교 신학 대학원 학생의 글을 읽고 어떤 한 분이 다음과 같이 사려 깊은 글을 적었기에 소개한다. 이것은 심히 왜곡된 칼빈주의의 진실을 알게 된 성경 신자들이 혹시라도 과격한 행동을 통해 오히려 진리의 행로를 막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기술한 것이다.
저는 오늘 좀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어떤 성경 신자가 바른 신학과 교리를 배워 바른 관점을 회복한 뒤에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이요,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하는 장로교인들을 만나게 될 때 먼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추운 겨울에 더욱 그리워지는 욕조의 뜨거운 물은 사람 체온과의 온도 차이로 인해 사람이 바로 들어가면 얼마 견디지 못하고 곧장 뛰쳐나오게 만듭니다. 서서히 사람의 피부가 적응하고 체온이 적응하게 만들어 욕조 물의 뜨거운 온도가 부담스럽지 않게 되고 난 후에야 사람이 편안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보다 먼저 명확한 진리를 알고 칼빈은 독재자요, 그에게는 엄청나게 잔혹한 역사가 존재하며 칼빈주의 신학에 매우 중대한 허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바로 장로교인들에게 쏟아 놓는다면 열에 아홉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도망갈 것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장로교인들은 장로교회 중에서도 소위 개혁 교회를 표방하는 교회, 즉 교리 교육이 강한 소수의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튤립(TULIP) 교리’라고 하는 칼빈의 5대 강령 등 개혁주의 주요 교리들을 그리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지 않습니다. 일반 교인들은 그저 막연하게 대강의 교리를 인지하는 정도가 현실입니다.
대체로 이런 형편에 처해 있는 교인들에게 무작정 당신들이 믿는 칼빈의 교리는 허상이라는 얘기를 맹렬히 늘어놓는다면 논쟁만 이어지거나 그저 겉으로 듣고 진심 없는 동의 정도나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교회의 배교와 성경 이슈,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의 본모습을 정확히 알게 된 성경 신자가 자신이 알게 된 바른 지식의 그 틀에만 갇혀 그것을 모두 철저하게 전해야 한다는, 조절되고 통제되지 않는 열정과 의무감만 가지고서 사람들을 대면하면 열매가 없거나 매우 부실한 영적 수확만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서재에서 산고를 겪으며 완성한 장문의 설교 원고에서 자유로워질 때 설교자는 비로소 강단에서 살아 있는 진리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일반 교회 교인이나 사람들에게 전하는 성경 신자도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능히 잘 소화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다지고 또 다져서 갓난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조리할 실력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진리를 자신만의 자유로운 목소리를 통해 능력 있게 전하는 그리스도인, 즉 다양한 상황과 사람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탁월한 복음 전도자로 성장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확신하는 것을 따라오지 않으면 넌 배교자고 거짓 신자라고 매우 간단하게 정죄만 해 댄다면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영적 독재자 칼빈과 무엇이 다를까요?
장로교회 교인들과 또 다른 일반 교회 교인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가짐과 준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장성한 자의 간절한 소망은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전하고, 멸망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고 갓난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사무치는 염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매우 깊고 크다 할 것입니다.
히5:13-14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자기 감각들을 사용하여 단련 받게 함으로써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엡4:13-15 이로써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도달하며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 는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에 의해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성장하여 그분께 다다르게 하려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그 리스도시니라.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우리가 믿는 바를 대외적으로 담대하게 공표하고 잘못된 것을 바르게 지적하는 분명한 믿음의 선포 그리고 선한 행위, 이것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입니다. 개개인이 사람 대 사람으로 진리를 전하기 위해 만나게 될 때의 상황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성경 신자도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언제든 순식간에 영적 독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깨달아 알고 확신하게 된 진리를 지혜롭게 전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 지극한 사랑으로 무장한 명철한 전도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성경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 모두가 각각 자기 자신에 대하여 회계 보고 할 것이 두렵지 않은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믿고 받아들여야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이다. 바라기는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람의 부패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편만하게 전달되기를 원한다.
요3:16-17 하나님께서 세상[모든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하심이라.
딤후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구약과 신약을 바르게 나누어] 너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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