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부록 루터의 흑역사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3. 09:44

현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칼빈주의 및 개혁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종교 개혁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과 같다.

이 글은 미들타운성경교회의 조지 젤러가 지은 <우리는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Should We Go Back to the Reformation?)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의 유대인 핍박과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어떠했는지 또 그들이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 얼마나 성경을 오해했는지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https://www.middletownbiblechurch.org/reformed/backto.htm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의 다섯 솔라를 믿으며 많은 면에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1,000년 이상 진행된 로마 카톨릭 중세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성경과 교리가 완전히 가려져서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그 암울한 기간에 카톨릭교회의 일곱 성사 같은 행위 구원 제도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 인도하였다. 이런 시대에 루터, 칼빈, 츠빙글리 등이 이신칭의, 다섯 솔라 등을 외치며 암흑시대에 밝은 빛을 주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신칭의와 칼빈주의 때문에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성경과 비교할 때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교리적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이신칭의 빼고는 거의 모든 교리가 그들의 가르침 안에 바르게 정립되지 않았다. 심지어 칼빈의 경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할 때의 믿음도 하나님이 강제로 구원을 시킨 이후에 성도가 무조건적으로 갖게 되는 믿음을 뜻하므로 우리는 더더욱 성경적으로 이런 것을 수용할 수 없다.

미들타운성경교회의 젤러는 이 글에서 루터와 칼빈의 흑역사를 간략히 기록했는데 칼빈의 인권 침해는 2장에서 자세히 다룬 내용과 일치하므로 여기서는 주로 마르틴 루터의 사례를 다루려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우리가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스프로울이 편집한 「종교 개혁 스터디 성경」(The Reformation Study Bible, 1998)의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문이 있다.

「종교 개혁 스터디 성경」의 주석과 신학 노트에는 종교 개혁의 진리를 현대적으로 다시 진술한 부분들이 있다. 이것의 목표는 종교 개혁의 빛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 교리들과 신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빛은 종교 개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온 것이다.”

시119:130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단순한 자들에게 깨달음을 주나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여러 면에서 조명을 받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빛은 성경에서 온 것이다. 여러 면에서 종교 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 시대로 돌아가면 우리 중 아무도 자유롭게 살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들 안에서도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종교 개혁자들의 글과 교훈들을 다 무시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교하고 분석하고 시험해야 한다. 즉 유명한 사람의 글이나 말이라고 해서 그냥 믿으면 안 된다. 더욱이 4-500년 전 사람들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우리는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를 따랐으므로 그들이 이룩한 좋은 점들에서는 그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어떤 점들에서는 우리가 절대로 그들을 따르면 안 된다. 그런 점들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는 오늘 루터와 칼빈이라는 두 종교 개혁자의 삶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장점도 많지만 약점도 많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 즉 이들의 흑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무조건적으로 종교 개혁자들을 따르면 안 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루터의 반(反)유대인주의

1517년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여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은 기독교의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 냈으며 이것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 성사를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루터를 사용하신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루터는 유대인들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말에 따라 예수님을 믿지 않자 그는 모든 유대인들을 적대시하고 심한 독설을 퍼부었다.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자신의 교회사에서 이렇게 진술하였다.

루터는 유대인들에 대한 불관용을 공개적 의견으로 진전시킨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1523년에 유대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것을 반대하고 이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1543년에 그는 유대인들을 극도로 대적하는 두 개의 폭력적인 책들을 지었다. 그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한 뒤 이들과 논쟁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그들을 개종시킬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들을 기독교 국가(독일) 영토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책들(토라와 탈무드 등)을 금서로 정하고 회당을 불태우고 우리의 구원자를 모독하는 자들의 집을 불태우라고 조언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공공의 원수이므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총 8권 중 Volume 7 ‘Modern Christianity — The German Reformation’(독일의 종교 개혁), P. 61-62.

루터는 로마서 앞부분에서 칭의는 이해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실 밝은 미래가 예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9-11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경은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난다고 말한다(요4:22).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모두 유대인이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기록자들도 유대인이다. 그럼에도 루터는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이방인 민족들이 구원받는 것 등에 대해 무지하였다.

유대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파멸 뒤에 강제로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루터 당시까지 무려 1,400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에게 전혀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천주교에 의해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세워지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전 유럽에서 일어났는데 역사는 이것을 ‘반셈족주의’(Anti-Semitism)라고 부른다. 420쪽의 ‘반셈족주의’ 각주가 보여 주듯이 마르틴 루터는 지독한 반유대인주의자였다.

반셈족주의(Anti-Semitism) - 이 말의 영어식 표현을 직역하면 ‘셈족에 대한 반감’이란 뜻이지만 실제로 이것은 셈족 전체가 아니라 유대인 혹은 유대 민족에만 해당된다. 유럽 모니터링 센터는 반유대주의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한 인식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고 유대인 개개인과 그들의 재산, 또는 유대인 공동체 기관과 유대교 종교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는 것인데 공격의 대상은 유대인들의 집합체로 여겨지는 이스라엘 국가도 포함된다.” 반셈족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기독교 - 사실은 천주교 - 가 유럽에 확산되면서 유대인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Christ killers)로 증오한 것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마르틴 루터도 반유대주의자였다

유대인들에 대해 이런 악행을 저지른 루터를 500년이 지난 지금 현시대 유대인들이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는 랍비 조셉 텔루슈킨의 책 「유대인들에 대한 교양 지식: 유대인들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일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Rabbi Joseph Telushkin, 「Jewish Literacy-The Most Important Things to Know About the Jewish Religion」, 1991, pp. 204-206. 여기에는 ‘마르틴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Martin Luther and the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장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텔루슈킨은 루터가 유대인들에게 행한 무자비한 일을 자세히 보여 준다. 심지어 그는 루터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 비교한다.

텔루쉬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루터는 히틀러 시대 이전까지 독일에서 발간된 반유대인주의 책들 중 유대인들을 가장 크게 대적하는 책을 지었다.

1543년에 루터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On the Jews and Their Lies)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는데 텔루쉬킨은 이 책이 반셈족주의 책 가운데 가장 악독한 책이라고 하였다.

② 기독교의 사랑을 선포하는 자들 중 가장 유명한 설교자였던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부하고 유일한 한 하나님만을 인정한다면 나는 그들의 목에서 그들의 혀를 잘라 내겠다고 위협할 것이다.” 루터는 예수님은 사랑했는데 예수님의 친백성인 유대인들은 심히 증오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심히 이상한 일이다.]

③ 수년간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제2차 세계 대전은 1945년에 독일군의 패배와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뒤 1946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 전범들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 피고인으로 불려 나왔을 때 독일 나치 장교로 선전 선동을 주동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슈트라이허(Julius Streicher)에게 재판관이 질문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들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러자 슈트라이허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겐 죄가 없소. 나는 오직 마르틴 루터가 시켜서 그 일을 하였을 뿐이오. 만약 내게 죄가 있다면 마르틴 루터를 이 자리에 불러 앉혀서 먼저 재판하시오. 내가 유대인들에게 행한 일은 루터가 그들에게 행한 일보다 나쁘지 않았소.”

④ 히틀러는 자랑스럽게 루터가 자기와 한 편이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지금 우리가 보기 시작한 것처럼 유대인들을 보았다.” 즉 루터는 그들을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⑤ 루터가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한 가장 큰 이유는 자기가 최선을 다해 설명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루터는 종교의 자유(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자기가 믿는 대로 믿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하고 심지어 죽여도 된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 1,200년 동안 중세 암흑시대를 지배한 카톨릭 종교 정신이었고 루터나 칼빈 등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여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우리의 자유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칼빈의 무자비한 학살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교회를 반대하며 종교 개혁을 실행하였다.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카톨릭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극도로 핍박한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종교 재판(Inquisition)을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것이다. <위키백과>의 ‘스페인 종교 재판’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은 1478년부터 1834년까지 스페인 왕국에서 있었던 종교 재판이다. 스페인 종교 재판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적게 잡아도 30만 명 이상이며 한 기록에 따르면 31,912명이 산 채로 불에 태워지는 형벌을 받았다. 한편, 희생자의 수를 가장 크게 잡은 기록은 사형이나 고문 등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이백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이 재판에서는 유대인, 개신교인,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유대인의 경우 탄압을 피해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역사가 후안 데 마리아나는 80만 명가량이 스페인을 떠난 것으로 추산하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대개 포르투갈이나 모로코로 옮겨갔고 후에 유럽,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각지의 도시로 흩어졌다.

그런데 여기에 큰 아이러니가 있다. 카톨릭교회를 개혁하겠다고 거기서 나온 루터와 칼빈 등 대다수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믿음이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핍박하고 화형 등으로 처형하였다. 샤프(Philip Schaff)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불관용’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8 ‘Protestant Intolerance’(프로테스탄트들의 불관용), pp. 700-800.

종교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어머니 교회(모교회), 즉 카톨릭교회로부터 박해와 탄압이라는 불관용 교리를 유산으로 물려받아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자기들과 믿음이 다른 자들을] 최대한 핍박하였다. 그들의 박해와 불관용은 카톨릭교회와 비교해서 규모와 정도는 달랐지만 원리 면에서는 동일하였다. 이들은 교황의 폭정을 무너뜨리고 종교의 자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지만 자기들 스스로 향유하던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애나뱁티스트(재침례파) 등과 같이 자기들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을 지역에서 추방하고 옥에 넣고 익사시키고 참수하고 목매어 죽이고 불태워 죽였다.

우리는 이 모든 행위와 역사를 바로 규명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의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들의 교리가 성경적 정통으로 숭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실로 인본주의 철학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대개 지성주의자들이 거기에 매료된다. 그러다 보니 현시대 칼빈주의자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른다. 그들은 칼빈주의가 *‘확고하게 성경에 기반을 둔 교리’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사도들이 지킨 진리’라고 말하기도 하며, ***“그리스도께서도 칼빈주의 5대 강령을 가르치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W. J. Seaton,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1970, p. 8.

** J. B. Davis, The Berea Baptist Banner, 1995, p. 30.

*** M. Duncan, 「The Five Points of Christian Reconstruction from The Lips of Our Lord」, 1990, p. 10.

칼빈에게는, 스스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 믿으며 세운 본인의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할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반대하시며 전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신약 시대라는 새 시대를 여셨다.

예수님의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무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교회가 국가를 다스리며 무력으로 불신자들을 죽이는 일을 한 적이 없다. 주후 100년 이후로 교회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며 세상을 제압하기 위해 이루어진 만행은 다 국가 교회를 시행하는 카톨릭교회와 거기서 파생된 개신교회(특히 칼빈의 개혁주의 교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청교도 신앙/개혁주의 등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시간에 칼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성경 위에 두고 그대로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천주교회의 통치보다 더 무섭고 엄격했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을 성도들이 정확히 자세히 알아야만 한다. 다시는 그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준다.

[여기부터 다음 쪽의 결론까지는 역자가 추가한 것이다.]

현시대에는 칼빈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종교 개혁의 산물인 칼빈주의는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종교 시스템이다. 이 책의 2장 ‘칼빈의 실체’를 보면 칼빈과 동시대에 제네바에 살면서, 신정 국가를 건설한 칼빈의 독재와 폭력에 맞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며 관용을 부르짖은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생생한 증언이 있다.

칼빈은 종교적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선적 지배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반대당의 사람들까지도 거침없이 제거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인문학자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서는 칼빈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했던 사람은 다 처형당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제네바에는 칼빈당 외에는 어떠한 당파도 남지 않았다.”라고 증언하였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주장을 보면 그가 반대파에 속한 사람들을 얼마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탄압하였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얻는다. 이 사실이 나의 양심에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은총을 내리셨다.**

**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p. 53.

이런 칼빈을 두고 카스텔리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칼빈으로 인해 제네바에서 자유는 끝났다.**

** 동일 문서, p. 46.

결 론

종교 개혁자들이 받은 빛은 다 성경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신칭의, 성경의 충분성, 다섯 솔라 등 그들이 발견한 것들을 기뻐한다. 이것들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매우 기초적인 것들이다. 이외에도 교회에 대한 중대한 교리가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앞에서 보여 준 대로 칼빈은 제네바에 [구약 시대의] 국가 교회, 즉 신정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교회에 대한 교리, 재림에 대한 교리,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교리는 이보다 훨씬 뒤에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국가 교회와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고 자기들과 믿음이 다른 사람들(특히 유대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등 이런 부분에서 큰 오류를 범하였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가르쳐 주는 교회론, 구원론 등에 현혹되면 안 된다. 그들은 성경이 주는 빛으로 카톨릭 중세 암흑시대의 매우 미소한 부분에만 빛을 비추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개혁으로 돌아가면 안 되고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즉 물이 나오는 원천인 샘으로 돌아가야지 샘에서 나온 조그만 물줄기로 돌아가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모든 교리와 실행의 원천인 샘이다.

우리는 종교 개혁자들과 교회사에서 유명한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만 항상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과 비교해 맞는지 맞지 않는지 검증해야 한다.

보충 설명

한국에서도 칼빈주의 장로교 목사들 가운데는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정서가 있다. 2022년 8월 18일자 <크리스천투데이> 신문에는 ‘노벨상 많이 받은 유대인, 하나님의 축복받은 민족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저자는 고신대 대학원을 다니고 현재 부산 세계로 병원 원목으로 있는 권O 목사이다. 그는 한국 장로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반셈족주의를 다음과 같이 가감 없이 표현하였다.

첫째, 예수께서 십자가 사역을 성취하신 이후로 혈통적 유대인 개념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성경의 증언처럼 표면적으로 유대인이라 해서 반드시 그가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롬2:28-29). 이제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전혀 상관없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동일하게 물려받는다(롬4:16).

둘째, 지금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은 구약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전혀 아니다! 1,9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혼혈을 거듭했기 때문에 이미 혈통적으로도 순수 유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셋째, 구약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더 이상 민족적 단위가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된 ‘보편 교회’에 해당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신학 상식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거부하는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이상 언약 백성일 수 없다.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가 유대인이든지 한국인이든지 상관없이 모두가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갈6:16).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이스라엘 대체 신학으로는 성경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동일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유대인들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 보기 바란다.

롬11:1-2, 11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사람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지파에 속한 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런즉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걸려 넘어짐으로 쓰러지게 되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을 통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왔으니 이것은 그들이 질투하게 하려 함이니라.

비록 교회 시대에 일부가 눈머는 일이 유대인들에게 일어났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밝은 미래가 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현재 중동에 있는 저 이스라엘 땅으로 재림하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슥12:10)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이 땅을 통치하게 된다.

롬11:25-27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들어올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다는 것이라. 이런 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 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것을 치워버리리니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이것이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니라, 함과 같으니라.

주 예수님의 재림 전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개와 메시아 영접에 대해서는 스가랴서 12-14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성경 전체를 통합적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이해하지 않고 어거스틴, 칼빈, 루터 등이 주장하는 이스라엘 대체 신학에 빠져 성경을 바르게 읽지 않으면 평생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인류 경영에 관한 한 새까만 어둠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아주 간단하다. 성경을 읽을 때 특정한 사람들의 사상이나 주장을 배제하고 문맥에 맞게 있는 그대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읽고 이해하면 된다.

이것만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무지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