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부록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상태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5. 9. 10:09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고, 둘째는 구원은 받았으나 그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며, 셋째는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았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그렇겠죠.”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억지 추측에 불과하며 죽을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와 상태 그리고 경험을 서로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위치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해 올바로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위치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1:12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다 그분의 아들입니다.

** 우리가 다 죄인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의 증거와 과학의 증거를 보여 주며 사람이 깨달을 때까지 교육을 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원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즉 사람이 자기가 가던 길에서 180도 돌이키며 믿음을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여서 그분의 영이 속에 거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아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상속자인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위해 고난도 함께 당하면 그러하니라.

이렇게 상속자가 됨으로써 우리는 보호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1:4-5 [그분께서] 너희를 위해 하늘에 마련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는 상속유업을 받게 하셨나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드러날 준비가 되어있는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그리고 아무도 우리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요10:28-29). 왜냐하면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고(엡4:30) 우리의 생명, 즉 영적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3:3).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해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 놓았다면 내가 그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므로 잃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그들을 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더 위대하시니,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느니라.

엡4:30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히6:4-6에 나오는 ‘떨어져 나간다’는 말과 히10:26에 있는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유대인입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독자에게 적용이 되나 이방인이라면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배도한 유대인을 향한 것이고 이방인 성도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 히브리서 6장에서는 몇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6절에서 가정법이 쓰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떨어져 나가 다시 새롭게 되는 일이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셋째는 사도 바울이 9절에서 ‘비록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지만’이라고 양보의 형태로 이 일을 기록한 점이다. 즉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가정법을 써서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그는 결론을 맺는다.

또 히브리서 10장의 경우 26-29절을 살펴보면 여기의 심판 혹은 형벌이 육체적인 죽음임을 알 수 있다. 신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극도의 죄를 지으면 죽임을 당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나답과 아비후(레10:1-7), 고라와 그의 형제들(민16), 아간(수6-7), 웃사(삼하6) 등이 있고 신약에서는 아나니야와 삽비라(행5), 음행한 자(고전5:3-5), 주의 만찬을 무시한 자들(고전11:30),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딤전1:19-20) 등이 있다.

성경의 요점은 성도들이 스스로 죄를 판단하고 고백하고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이다(히12:1-13). 여기서 9절을 보면 의미가 확실해진다. 그래서 육체의 사망으로 이끄는 죄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요일5:16; 약5:14-20; 렘7:16).

끝으로 마24:13 등을 인용하며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거기의 끝은 목숨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끝, 즉 말세의 대환난 속에 들어간 유대인들이 환난기의 끝까지 견뎌야 함을 말한다(마24:6, 13-14 참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므로 그는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 사람의 구원과 구원 유지는 모두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로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자마자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에게 닥쳐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상태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정착되어 확고하지만 그의 상태는 일정하지 않고 변합니다. 그 이유는 새로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가 한 본성만을 갖고 있었으나 새로 태어난 뒤에는 두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아담 곧 영적인 본성을 받았다고 해서 옛 아담, 즉 육신의 본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에서 태어난 것은 여전히 육이요 오직 성령에게서 태어난 것만 영이기 때문입니다(요3:6). 따라서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4-25절에서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것처럼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잘 설명해 줍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회심한 뒤에 직접 체험한 것으로 믿는 자들이 두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두 본성 중 어떤 본성이 그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죄가 없는지 혹은 죄로 가득한지가 판가름 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적 본성,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그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일3:8).

그러나 육신의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놔두면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할 것입니다(요일1:8-10).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죄’(sin)와 ‘죄들’(sins)을 구분해야 합니다. 죄란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를 범하려는 성질 혹은 성향을 가리키며 종종 원죄 또는 타고난 타락성이라 불립니다. 죄들이란 우리 안에 죄를 지으려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특정한 죄들을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는 죄를 짓고자 하는 성질, 즉 죄성을 제거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개인의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성이 없는 새 본성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성은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를 향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롬6:1-2)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여기에서 의미한 바는 우리가 판결을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우리가 새 본성을 받아 죄의 법을 향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사도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6:11).

이 말은 우리 자신을 죄를 향해 죽은 자로 여기고 또 옛 생활 습성을 향해서도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러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말하며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라.”(롬6:12)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될 때 다음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롬6:14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믿는 자의 위치는 확고히 정착되어 안전하나 그의 상태는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 새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는 죄로 가득하기도 하고 죄가 없기도 합니다.

Ⅲ. 그리스도인의 경험

경험에 관한 한 믿는 자들은 세 장소에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세상의 모형인 이집트에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는 육신의 모형인 광야에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는 마귀의 모형인 가나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이 거하는 집의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뿌리는 순간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도 비록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에서 여전히 살고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자기 영혼에 적용하는 순간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만족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집트를 뒤로 하고 떠났으나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거하면서 그들은 어떤 때는 이집트 쪽을 바라보며 예전에 먹던 부추와 양파와 마늘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때로는 가나안 쪽을 바라보며 약속의 땅에서 얻을 새 곡식과 포도즙 그리고 무화과와 석류를 고대하며 방황합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광야의 한가운데에서 안식도 없고 열매 맺음도 없이 불평만을 일삼으며 방황합니다.

어떤 이들(신자들)은 가데스바네아까지 갔고 또 가나안에 도달하여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송이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인들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보고는 이내 겁에 질려 그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하기를 거절하였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광야에서 수십 년 동안 방황하다 자신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숨까지 잃고 말았습니다(민13:1-33).

또 다른 신자들은 광야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갔고 그리스도의 예표인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으며 이제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히위 족속, 브리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버림으로써 소유를 얻게 되고 자기들이 밟은 땅을 다 다스리게 되리라는 약속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것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을 모든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나안은 결코 천국의 모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전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나안은 믿음의 안식과 승리하는 삶의 모형입니다.

한편 가나안은 마귀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믿는 자들이 이집트(세상)에 머물러 있거나 육신에 정복당한 채 광야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가나안에 도달하면 마귀는 그들이 발을 디디는 곳마다 나타나서 대적하며 그들이 승리하는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는 끊어질 수 있으나 이미 맺은 관계는 절대로 끊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자신의 몫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남으로써 그와 아버지와의 교제는 끊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아들로 반겼습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겠느냐?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