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부록 두 본성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5. 9. 10:14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이 사람의 두 본성에 관해 무어라 가르치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태어난 혼이 두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새 희망 속에서 기쁨을 누리다가도 이내 자신의 옛 본성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다시 태어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되고 마음이 무뎌지고 실의에 빠지게 되어 떠돌다가 결국에는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진실로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에게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물론 그 이유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태어난 것은 영이니(요3:6)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유전적 계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육의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계통입니다. 성경은 첫째 계통의 사람을 자연 그대로 ‘본성에 속한 사람’(Natural man), 즉 자연인이라 부르고 둘째 계통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Spiritual man)이라고 부릅니다.

1. 자연인

성경은 자연인을 가리켜 지각이 어두워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엡4:18). 그는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4). 그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2:3). 게다가 그는 하나님과 원수지간이며 따라서 그분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8:7-8). 그의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되어 있습니다(17:9).

그래서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간음, 행음,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입니다(막7:21-22).

영적으로 볼 때 그는 범법들과 죄들로 인해 죽은 사람입니다(엡2:1). 그의 속에는 선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롬7:18).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의 피부를, 표범이 자기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자연인도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는 자기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렘13:23).

물론 하나님은 자연인이 항상 세련미가 없고 교양이 없으며 부드러운 기질을 갖고 있지 않고 관대함도 전혀 없는 무정하고 거짓되며 진실하지 못한 종교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따라서 의롭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롬3:23).

2. 영적인 사람

자연인이 육신의 부모를 가지고 있듯이 영적인 사람도 그에게 영의 생명을 준 존재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미 존재하는 생명에서부터 나오기 마련입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자연 발생으로 튀어나오는 생명체란 없습니다.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어야 생명이 출생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성령님이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태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합니다(벧전1:23).

자연 세계에서 씨가 생명이 없으면 싹을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속에 떨어질 때 성령님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지 못하면 거기에서 새 생명이 싹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회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은 새로 태어날 때 새 본성을 받게 됩니다. 이 본성은 영적인 본성입니다.

요3:6 성령에게서 태어난 것은 영이니

이 같은 새 본성은 죄를 짓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요일3:9).

이 새로운 영적 본성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불리며(골1:27)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부여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일5:12).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릴 수 없으며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서 나타날 것입니다(골3:3-4). 영적인 삶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5:22-23).

영적인 사람은 영적으로 빛의 조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샅샅이 살피시느니라(고전2:9-10).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자연인에서 진화하거나 혹은 발전한 사람이 아님을 즉시 알게 됩니다.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고후5:17). 영적인 사람은 새로운 창조물로서 자연인과는 전적으로 다르며 인격과 기질 등에서 자연인과 정반대가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는 모두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한 가지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성경이 말해 주듯이 두 부류의 사람 즉 자연인과 영적인 사람이 있는데 신자 안에는 이 두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3. 새로 태어난 사람

믿는 자의 속에 새 사람이 태어난다고 해서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옛 사람은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마치 한 거주지를 놓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같은 몸을 차지하려고 서로 정반대되는 두 본성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이것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할 수 없느니라.

** 어떤 이들은 갈2:20을 인용해서 사람이 구원받으면 그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옛 사람이 죽었다 해도 육신은 살아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자는 옛 사람 혹은 옛 본성을 ‘아담의 죄성으로 인해 사람이 근본적으로 죄를 지으려는 경향’으로 정의한다. 성경은 이것을 종종 육신(flesh) 혹은 육체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타락했다는 것과 또 우리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경향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깨닫고 나면 너무나 놀라고 또 어이가 없게 되어 우리는 혹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고 우리의 구원과 회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14-25절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영적 싸움을 잘 설명해 줍니다. 이 싸움은 회심한 이후에 사도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24-25절에 있듯이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육체를 이기고 성령님이 자기의 삶을 주관하게 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 본성 간의 전쟁

(1) 우리는 육신이 죽을 때까지 옛 성품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2) 우리는 육체를 향상시키거나 멋있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갈6:12). 더욱이 그것을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빌3:4).

(3) 육신을 억눌러서 육신의 욕정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롬13:14).

(4) 새 본성을 자라게 해야 합니다. 새 본성은 처음에는 갓난아이와 같으므로 순전하고 영적인 말씀의 젖을 먹여야 합니다(벧전2:2). 또한 아주 규칙적으로 먹여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문학작품도 갓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그를 키워 줄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옛 사람을 굶주리게 만들어 그가 약해져서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우리가 그를 죽은 것으로 여긴다 해도 옛 사람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또 그에게 먹을 것을 준다면 그는 다시 기운을 회복하여 우리에게 문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랫동안 경건한 삶을 살아오던 그리스도인들이 갑자기 타락하여 이전에 옛 본성이 즐기던 것들로 되돌아가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옛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두 본성을 양육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육신을 기쁘게 하는 음악이나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한 본성을 양육하는 것은 다른 본성을 굶어 죽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러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극복할 수 있는 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① 새롭게 거듭난 생명 가운데서 걸어야 한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받은 침례에 의하여 죽음 안으로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함이니라.

② 율법에는 죽었으므로 영의 새로움으로 섬겨야 한다.

롬7:4-6 나의 형제들아, 이런 연유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율법에는 죽었나니, 이는 너희로 다른 사람,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와 혼인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죄들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속에서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붙잡혔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부터 구제되었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법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

③ 성령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롬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롬8:3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롬8:4 이는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

성령을 따라 걸을 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장시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삶을 살며, 율법의 의가 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④ 성령을 따라 살며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롬8:5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롬8:6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

롬8:7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음이라.

롬8:8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을 따라 걸을 때 성령님은 나를 예수님과 동행하도록 은혜를 주시고 인도해 줍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면서 성령님의 일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거나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