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창세기(1-11)

창세기 2장 18절 - 25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3. 26. 12:01

18 또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자를 지으리라." 하시며

물론 이 문맥은 인간의 타락과 그에 따른 부패 이전의 일이다. 하지만 성경은 여전히 “신중한 아내는 주께로부터 받느니라.”(잠19:14) “아내를 얻는 자는 좋은 것을 얻는 것이요 주의 은총을 받는 것이니라.”(잠18:22)라고 말하고 있다.

이 돕는 여자가 만약 말다툼을 잘하는 여인이거나(잠21:9) 화를 잘내고 다투기를 잘하는 여인이거나(잠21:19) 혹은 어리석은 여인(잠14:1)이라고 한다면 돕기보다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잠21:9 다투는 여자와 함께 넒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의 한 모퉁이에서 사는 것이 더 나으니라.

잠21:19 다투고 성내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나으니라.

잠14:1 현명한 여인마다 자기 집을 세우나, 어리석은 여인은 자기 손으로 집을 무너뜨리느니라.

바울이 남녀가 홀로 사는 문제를 지적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독신남이나 독신녀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재앙들이 사람들에게 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당신들의 사위들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독신녀를 딸로 두는 것이 낫겠소.‘라고 말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그 어디에서나 여자의 역할은 남자를 돕는 것이다. 이 진리는 신약의 은혜시대에서도 여전히 고수된다(고전11:3,8,9) 현대인들이 주장하는 반반(50:50)이라는 생각은 ‘우리 집에서는 반반의 원칙을 지킵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하고 제 아내는 저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말합니다.’고 하는 농담 속에 잘 담겨져 있다.

고전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즉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1:8-9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라.

현대의 돕는 배필들이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이에 관해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잠언 마지막 장이다. 이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21세기 현대 여성들은 그들이 높은 수준의 은혜로운 삶을 영워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한번은 루터교 방송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 10명을 선정발표하였는데 그 중 4명만이 결혼한 여성이었고 이들 중 둘은 전혀 아이를 가져보지 못한 여성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엘리베스 여왕, 마리 앙투와네트, 쟌다크, 퀴리부인 등의 순서였던 것같다. 이런 여자들이 한 남편의 진정한 돕는 자로서의 요구조건을 충족할 것인가는 심히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카톨릭 신자들의 주장처럼 마리아가 영원히 처녀였다면, 그녀의 남편 역시 그가 음란하게 살거나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영원히 동정이었을테니 그렇게 되면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이야기가 된다.(고전7:1-5) 만약 마리아가 창2장, 신명기, 마태복음 19장, 고린도전서 7장 등과 같은 신성한 법에 의해 요셉에게 주어진 권리를 거절하고 성모의 위치만을 고집했더라면,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증거가 시69:8에 있다. 그녀는 가장 형편없이 율법을 범한 자요 막달라 마리아만큼이나 죄인인 셈이다.

고전7:1-5 이제 너희가 내게 쓴 것들에 관해서는, 남자가 여자를 접촉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나 음행하지 않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의 남편을 둘지니라. 남편은 아내에게 합당한 애정을 주고, 아내도 남편에게 똑같이 하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관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관하며,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주관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관하느니라. 너희는 서로 권리를 빼앗지 말라. 다만 금식과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합하라. 이는 사탄이 너희의 자제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시69:8 내가 내 형제들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들에게는 외국인이 되었나이다.

돕는 자는 결코 방해자가 아니며 또한 우두머리도 결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남자가 주장하기를 투덜대며 다투기를 잘하는 여자와 살기보다는 지붕 위에서 혹은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잠21:19,25:24) 한 유명한 독신 남자가 말하기를 나는 내가 원치 않는 그 무엇을 갖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을 원하겠다고 했다. 한 독신 남자는 80세가 되어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답하기를 내가 20세였을 때 극장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앞에 서 있는 한 여자의 치마를 밟았는데 그녀는 번개처럼 뒤돌아서서 화를 버럭내고 말하기를 ‘이 X야! 치마 못놔!’라고 했는데, 나를 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말하기를 ‘아! 죄송합니다. 제 남편인줄 알고 그만.’이라고 하더군요 했다.

잠21:19 다투고 성내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나으니라.

잠25:24 다투는 여자와 함께 넓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의 한 모퉁이에서 사는 것이 더 나으니라.

창세2:18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것은 원숭이가 아담을 위해서 요리도 하고 옷도 꿰매 주겠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원숭이들은 요리, 바느질, 청소 등은 거의 하지 않는다. 만약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옳다면, 다윈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의 암컷들은 수컷들과 동시에 진화했음에 틀림없다. 만약에 그것이 틀림없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돕는 배필에 관해 하신 생각은 어리석을 뿐이다. 왜냐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은 인간으로 진화된 유인원이거나 반 유인원이었을텐데 이들은 갑자기 남성이 여성으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이 나타났을 때 그녀가 원숭이로 불리지 않고 여자라고 불렸으며 그녀의 돕는 기능이 남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은 위 주장에 따르면 매우 이상하지 않는가?

19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여러 가지 짐승과 공중의 여러 가지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그들을 부르는가 보시려고 그들을 아담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모든 생물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것이 그 이름이 되더라.

유대인의 성경주석 <미드라쉬 라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 동물에 관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물들의 이름이 다 지어진 후에는 아담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담이 답하기를 ‘저는 아담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다마(흙 히브리어)에서 취해졌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이름은 무엇이냐?’고 하셨고 아담은 ‘당신은 아도나이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피조물들의 아돈(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위의 대화는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담에 대한 히브리어는 에돔(Edom) 즉 붉은 갈색 먼지란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본문에 따르면 아담은 이름들을 지은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창조주와 알아맞히기 게임을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동물의 원래 이름은 천상의 언어인 히브리어였음에 틀림없다. 현대 유럽,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 동물의 명칭을 추적하려면 히슬롭의 <두 개의 바빌론>을 참고하고 창11장에서 사용된 칼테아어로 그 어근을 추적해야 한다.

한 가지 주목해야 될 사실은 동물들은 인간이 창조된 똑같은 물질, 즉 흙의 티끌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전3:20) “내 이름은 ‘진흙’이었어”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전3:20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도다.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으나, 아담이 자기를 위해 돕는 자는 찾지 못하더라.

본문에 보면 파충류 혹은 양서류는 빠져있으며 계시록4장과 에스겔1장에 생물들을 대표하는 그룹이 나올 때도 역시 빠져있다. 창6:7과 7:8에는 ‘기는 것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파충류와 양서류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 같다.

창6:7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망시키리니, 즉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들이라. 이는 내가 그들을 지었음을 후회함이라.

창7:8 정결한 짐승들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들과 새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지만 메뚜기와 황충 등은 레11:20에서 같은 부류에 나와 있으나 이들은 파충류나 양서류는 아니다. 결론은 파충류에는 뭔가 기분이 나쁘고 불결한 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미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레11:20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조류는 너희에게 가증함이니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비록 인간과 동물들이 흙이라고 하는 똑같은 물질에서 창조되었으나 그 어떤 동물도 인간에게 돕는 배필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고 바로 다음에 ‘그러나 아담에게는....’을 의도적으로 강력하게 대조시켜 기록한 데는 의미가 있다.

아무리 역사를 초월한 성고사적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들먹거린다 할지라도 다윈의 이론은 성경 말씀을 팽개치려고 작정한 사람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이론일 뿐이며 다윈 역시 처음에는 올바로 창조되었으나(전7:29) 후에 타락해 버린 인간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진화는 전혀 과학적 사실이 아니며 정확히 말하자면 과학적 이론도 되지 못한다. 진화론은 거듭나지 못한 한 타락한 인간이 인간의 타락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계시를 뒤엎어 짓밟으려는 의도에서 만들어낸 비과학적인 허튼소리일 뿐이다. 모든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향상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향하한다고 가르친다.

21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드니라.

이 구절에서 묘사하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신정통주의자들은 이것이 시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임을 내세워 인류의 역사가 실제로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진리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씀이 사실이며 말씀이 확정적으로 증명하므로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인다.

아인슈타인이 의미에 관해 희한한 정의를 내렸는데 그 정의를 빌자면 사물은 증명이 될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는 진리, 의로움, 거룩함, 존귀함 등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상대적 상황에 나타나는 일련의 사물들의 어떤 형태가 고립되어진 순간만을 인정하고 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민족(유대인)에 속했던 또 다른 분은 주의 말씀은 진리이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두 명의 유대인의 모습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수술을 하셨다. 신약에서의 수술은 영적인 것으로 손으로 행하지 않은(골2:11) 것이지만 창세기에서의 수술은 신체에 행한 수술이었다. 영국의 내과의사 James Simpson경은 창세기의 이 구절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한 후 클로로포름으로 최초의 마취를 통한 수술을 할 수 있있다. 마찬가지로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출애굽기 2장을 읽고 이집트에서 석유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Moshe Dayan장군은 여호수아, 재판관기, 사무엘상 등에 나오는 전투계획을 사용해 1967년 6월 그의 적들을 소탕했다.

골2:11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버린 것이라.

이처럼 이 구절의 진실성 여부를 증명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의미의 정의란 성경 기록의 3/4가 실제가 아니기를 바라는 한 불가지론자의 고백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깊은 잠(a deep sleep)이란 표현에서 잠(sleep)은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죽음을 묘사한다.(요11:11 살전4:14 마27:52 고전15:51) 여기서 아담이 일시적이긴 하나 실제로 죽었다(행14:19) 십중팔구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만이 신부가 탄생될 수 있음이 신약교회와 이브와의 예표적 관계를 볼 때 확실해지기 때문이다.(엡5:25)

요11:11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살전4:14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마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으며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행14:19 그 때에 안티옥과 이코니움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이 무리를 설득하여 바울을 돌로 치니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성읍 밖으로 끌어내더라.

엡5:25 남편들아, 너희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거기를 채우시더라.

그것은 심장 아래 왼쪽 옆구리의 5번째 갈비뼈가 분명하며 이것은 다음의 성경구절들로 입증된다.(삼하2:23 4:6 20:10 요13:23 엡5장) 델리취, 바우어, 튜빙겐, 게세니우스, 라쉬, 마이모니데스, 케일, 슈타르케, 케니콧, 드로시, 로이폴트 등과 같은 성경에 미숙한 어린아이들에게 이와같은 성경해석은 일관성이 없어 보이거나 매우 이질적으로 보일테지만 아래의 내용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들이다.

*다섯은 죽음의 수이다.(창5:5)

*이브는 아담의 죽음의 원인이며, 그녀는 하나의 갈비뼈이다.

*성경에서 숫자가 언급된 갈비뼈는 5번째 갈비뼈뿐이다.

*그리스도 역시 아담의 옆구리가 열려진 것처럼 그 옆구리가 창에 찔렸었다.

*요한은 교회의 예표인데, 그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기대있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는 아담과 이브와의 관계와 같다.(고전15:22,45 엡5장)

삼하2:23 그러나 그가 옆으로 돌이키기를 싫어하니,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비뼈 아래를 찌르니 창이 그 뒤로 나온지라,

삼하4:6 그들이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그의 다섯 번째 갈비뼈 아래를 찌르고, 레캅과 그의 아우 바아나는 도망하였더라.

삼하20:10 아마사는 요압의 손에 있는 칼에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비뼈를 찌르니

요13:23 그때 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더라.

창5:5 아담이 살았던 모든 날들이 구백삼십 년이었고, 그가 죽으니라.

고전15:22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

이처럼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보면 KJV으로 그 어떤 히브리어나 헬라어 학자들이 원본을 갖고 있을지라도 찾아낼 수 없을 그러한 보배로운 진리를 캐낼 수 있게 된다.

22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했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셔서 그녀를 그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여기의 단어는 ‘이샤’(woman)로 ‘이쉬’(man)와 구별되는 존재이다. 문자적으로 볼 때 남자(man)는 남성-인간(he-man)이요, 여자(woman)은 여성-인간(she-man)이다. 이는 남성(male)과 여성(female)을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영어에서는 이러한 독특한 사실을 “woman” 즉 “womb”(자궁)과 “man”(사람)을 합쳐서 여자라고 함으로써 잘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여자(woman)는 “womb-man”(자궁-사람)의 축약형이다. 이와같은 남녀간의 유사점과 인간과 동물간의 해부학적 유사점으로 인해 19,20세기에는 두 가지의 희한한 이론이 등장하였다. 하나는 인간과 동물 간에는 육체적(신체적) 유사점이 매우 크므로 양자간에 혈연이 있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진화론이요, 또 하나는 현대 미국인들이 호모섹스에 대해 갖는 잘못된 태도이다. 이들은 귀걸이, 목걸이, 손지갑, 심지어는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남자들도 이상히 여기지 않으며 여자가 담배를 피우거나 욕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자끼리 살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이와같은 일들에 관해 성경이 1800년이나 앞선 내용이 로마서 1장에 실려있다.

비록 여자가(woman) 집합적인 용어에서는 사람(man)으로 불리지만(롬2:16 12:18 골1:28 요일3:1-3 요1:12) 또 첫 번째 부활 때에는 여자도 남자가 될 것이지만, 그녀에게는 남자가 결코 가져보지 않은 문제들이 있으며(벧전3:7 딤전2:14 살전5:3) 그 어떤 남성도 갖지 못한 특권도 갖고 있다.(창3:20 눅1:35)

롬2:16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있으리라.

롬12:18 가능한 한 너희 편에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라.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훈계하며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제시하려는 것이라.

요일3:2-3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

요1: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벧전3:7 이와 같이 너희 남편들아, 아내들을 더 연약한 그릇으로서,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서 귀히 여기되 지식을 따라 그들과 동거하라. 이는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2:14 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범죄하였음이라.

살전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에 아이 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듯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창3:20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부르니, 이는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였음이라.

눅1:35 그 천사가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너에게 임하실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그러므로 너에게서 탄생하실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리라.

여자는 아담의 머리보다 낮은 위치에서 취해졌으므로 머리가 되고자 하거나 사물을 관장하고자 하는 높은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고전11장 딤전3:4 엡1:22) 그러나 그녀는 아담의 머리나 발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만큼 짓밟히거나 무시당해서도 안된다. 적어도 헌신된 경건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석하고 있다. 그녀는 아담의 옆구리 심장 부근에서 나온 고로 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아담은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결혼식 때도 남녀가 나란히 선다

딤전3:4 자기 집안을 잘 다스려서 온전한 위엄으로 자기 자녀들을 순종케 하는 사람이어야 하리라.

엡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느니라.

23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서 취해졌음이라." 하니라.

아담의 사랑 고백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나의 피 중의 피라는 말이 빠져 있는 점이다. 성경보다 자신들의 주석이 더 권위있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의 눈에는 이 사실이 구저 우연으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눅24:39에서 피를 고의로 빼버리신 것과 고전15:50에서는 뼈들이란 말이 의도적으로 빠진 것을 확인한 사람이라면 성경을 더욱 경외심을 갖고 읽어야 하며 엉터리 주석가들의 추측은 무시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눅24:39 나의 손과 나의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고전15: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살과 피(혈과 육)는 살과 뼈들과는 다르다.(엡5:30) 게다가 어떤 어휘를 택하느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관련된 교리가 왜곡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피를 갖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피를(생명을) 다 쏟았기 때문이다.

엡5:30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

24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이 구절은 문맥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는 떠날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24절은 23절을 기록한 성경기자가 삽인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예수님께서 마19:4-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바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한 것을 수도 있고, 청조주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직접 한 말씀이라면 이것은 분명히 예언적 선포이다.

마19:4-5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태초에 사람을 지으신 분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리라.'는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결합(달라붙음)이라는 말은 분명히 육체와 육체가 결합함을 의미하며 이 비유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혼이 그의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에도 사용된다. 이 경우는 그는 이 육체 안에 살면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그는 육체에 결합되어 있다.(롬7:4 8:9 고전6:15-19 골2:13)

롬7:4 나의 형제들아, 이런 연유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율법에는 죽었나니, 이는 너희로 다른 사람,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와 혼인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라.

롬8: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의 사람이 아니니라.

고전6:15-19 너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또한, 창녀와 합하는 자는 한 몸인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가 말씀하시기를 "둘이 한 몸이 되리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이라.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골2:13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셨으니

이 구절이야말로 음행이 이혼의 근거가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또한 이 구절은 참다운 결혼이란 몸과 몸의 결합이지 혼인예식이 아니며 참다운 이혼이란 몸과 몸의 분리이지 이혼소송의 결과가 아니다.

그들이 한 몸이 될 것임이니라.

한 몸(one flesh)이란 분명히 남자의 몸을 뜻한다. 이는 창5:2에서 이브의 원래 이름이 아담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히 입증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이브라 부르지 않았다. 아무리 유행가 가사가 그렇고 대중영화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아담 부인(Mrs. Adam)이라고 불렀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고 여성-사람(she-man)인 고로, 따로 이름이 없고 남자의 이름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미국에 사는 모든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이 남편의 이름이든 혹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든 간에 남자의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5:2 주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며,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셨느니라.

25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성경의 첫 번째 책 제2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써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위로 향하고(향상하고 있다는 뜻) 아래로 향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벌거벗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미신과 무지의 유물일 뿐이다.

*따라서 벌거벗음도 나쁠 것도 없다. 다만 우리가 익숙해 있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을 벗도록 해준다.

히피족과 여피족 그리고 버클리 대학교수들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가져오게 될 분명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은 실로 신비에 가까운 일이다. 벌거벗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뒤쳐진 야만족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잘못된 전제하에 그들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셈이다.

부쉬맨들은 벌거벗고 다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훌륭한 생물학자가 증거하고 있듯이 만약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 어린아이들은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벌거벗고서도 부끄러워히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가리라고 배운 것이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프리카나 호주의 부쉬맨들이 유럽과 미국보다 더 좋은 교육제도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그 누군가가 크게 오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사실 누군가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위에 열거한 6가지 중 제1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종족이든 벌거벗으라고 교육하면 다음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이다.

즉 살을 드러내고 살을 노출시키고 육체를 가꾸도록 장려하고 육체적 쾌락을 부추기면 그 결국은 질병, 부패, 성도착, 타락, 국력 약화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그 민족의 소열이다. 누드운동이 진행 중이거나 앞으로 나타나게 될 문명도 역시 마찬가지 열매를 거둘 것은 자명하다.

'강 해 > 창세기(1-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3장 4절 - 5절  (0) 2025.03.28
창세기 3장 1절 - 3절  (4) 2025.03.27
창세기 2장 10절 - 17절  (0) 2025.03.25
창세기 2장 8절 - 9절  (3) 2025.03.24
창세기 2장 4절 - 7절  (1) 2025.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