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시니, 그가 그곳에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았더라.
이것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나타난 것이다. 첫 번째는 갈대아 우르지방에서 였다.(행7:1-3) “네 씨에게”는 아브람의 씨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다. 성령님께서 창12:1-3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겠다고 했을 때 씨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따라서 그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도 창12:1-3이 그리스도의 영적 씨에 대한 언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들로부터 창12:3의 축복을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와 개혁주의자들은 바로 그런 짓을 지금도 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곳에서 언급된 네 씨는 창21:2처럼 이삭을 언급한 것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구절을 교리적으로 해석하자면 물질적 축복을 다루고 있는 약속들이다.
행7:2-3 스테판이 말하기를 "부형 여러분, 들으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을 떠나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시니
창21:2 사라가 임신하여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정하신 때라.
이제까지 우리는 두 가지 언약을 보았는데 그 어떤 것도 언약이라고 명명되지 않았다. 언약이란 용어는 창15:8의 무조건적 약속들과 창17:7의 조건부 약속들에 한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나눠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의 적용이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창15:18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세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씨에게 주었으니
창17:7 내가 나와 너와 네 씨 사이에 대대로 내 언약을 세우리니,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씨의 하나님이 되리라.
정확히 말하자면 창12:3과 15:5은 언약이 아니다. 이것들은 무조건적인 약속들로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약속들 즉 복수임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갈3:29 단수)에서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갈3:16 복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창15:5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씀하시기를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 별들을 세어 보아라."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씨가 이와 같으리라." 하시더라.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니라.
갈3:16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많은 사람을 가리켜 씨들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가리켜 너의 씨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는 그리스도시라.
<킹제임스성경 1611>에서는 복수어미(s)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그의 교리에 있어 정확한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 약속(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얻게 될 성령의 약속 – 갈3:2,16)이 약속들(즉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주어질 팔레스타인 땅과 이스라엘의 원수와 친구들에게 주어질 저주와 축복)과 혼돈된다면 우리는 후천년주의자가 되어버린다.
후천년주의자란 구약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싱 성취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는 관계를 끊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와같은 거짓교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들 중 으뜸가는 것은 테오도르 엡(Theodore Epps) 박사와ㅏ 빌리 그레함이 추천한 <확대역본 Amplified Version> 신약이다.
갈3:2 내가 너희에게서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더냐? 아니면 믿음을 들음으로써냐?
“씨”는 전세계를 소유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왕상4:20에 언급된 바닷가의 모래(창22:17)를 언급한다.
왕상4:20 유다와 이스라엘이 많았으니, 바닷가에 있는 모래처럼 많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더라.
창22:17 복으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번성으로 내가 너의 씨를 하늘의 별들처럼, 또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케 하리니 네 씨가 그의 원수들의 문을 차지하리라.
8 그가 거기서부터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그의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주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여행은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기거하였다(히11장)고 묘사한 일련의 여행들의 첫 번째였다.
벧엘은 세켐으로부터 정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요단강 서안지대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아이는 여호수아 7-8장, 스2:28 렘49:3에 나오는 아이이며 그 뜻은 “무더기” 혹은 “폐허 무더기”란 뜻이다. 아이는 벧엘로부터 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스2:28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렘49:3 오 헤스본아, 애곡하라. 이는 아이가 파괴되었음이라.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으라. 너희는 굵은 베로 두르고 애통하며 울타리 옆으로 오가며 달릴지니라. 이는 그들의 왕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고관들이 모두 다 사로잡혀 갈 것임이라.
이 두 지역의 히브리어 뜻은 창3:24과 4:16의 주석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의미가 있다. “그가 제단을 쌓고” 제단을 쌓은 것이 언급된 것은 노아 이래(창8:20) 처음이며 아브라함도 노아가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나는 냄새로 제물을 드렸을 때처럼 높은 장소(벧엘 동쪽 산)에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이 사실은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게 될 산당의 전례가 된다.(왕상3:2 13:32 14:23 15:14 22:43 왕하17:10) 이 세상의 모든 나쁜 것은 좋은 것이 왜곡된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창3:5)
창3:24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타는 칼을 놓아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4:16 카인이 주 앞에서 떠나가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하였더라.
창8:20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가운데서 취하여 제단에 번제를 드리더라.
왕상3:2 그때까지 주의 이름으로 건축된 전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오직 산당에서만 제사를 드리더라.
왕상13:32 그가 주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과 사마리아의 성읍들에 있는 산당의 모든 집에 대하여 외친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라.
왕상14:23 그들이 모든 높은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그들을 위하여 산당들과 형상들과 아세라들을 세웠으며
왕상15:14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그의 평생 동안 주와 더불어 온전하였더라.
왕하17:10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 형상들과 아세라들을 세웠으며
9 아브람이 이동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가더라.
이 방향은 잘못된 것이었다. 만약 아브람이 시클락, 브엘세바 혹은 가자까지만 갔었더라면 그는 주님과의 교제권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는 9절부터 17절까지 더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매 세절마다 주님이 언급되었다.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향하여란 뜻이다. 남쪽에 있는 이집트에 자연스럽게 쏠렸던 것이다. 이집트는(철용광로) 세상제도의 예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자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성도들을 불러내셨다.(마2:15 미6:4 히3:16 학2:5)
마2:15 헤롯이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있었으니 이는 선지자가 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미6:4 나는 너를 이집트 땅으로부터 인도하고 종들의 집에서 너를 구속하였으며, 또 내가 네 앞에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냈었느니라.
히3:16 이는 어떤 자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격노케 하였음이라. 그러나 모세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그리한 것은 아니었느니라.
학2: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내가 너희와 약속한 말에 따라 내 영이 너희 가운데 남아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강단주석 The Pulpit Commentary>는 이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거의 논란도 없는 역사적 자료만 몇 개 열거하고 나서는 아브람이 하란이나 우르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집트 여행도 믿음의 행로로 간주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내면의 동기들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여주려는 형편없는 성경주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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