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리브카가 일어나서 그녀의 몸종들과 함께 낙타들을 타고 그 사람을 따르니 그 종이 리브카를 데리고 그의 길을 가더라.
리브카의 몸종들은 유모 외에도 다른 일행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오늘날의 신부의 들러리처럼 신부를 섬기는 소녀들로 마25:1-8에 등장하는 처녀들에 해당된다.
마25:1-4 그 때에 천국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명의 처녀와 같으니라. 그들 가운데 다섯은 현명하고 다섯은 어리석더라.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현명한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통에 기름을 가지고 있더라.
“그의 길을 가더라.”
이 말씀은 예표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되며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고후5:14-16)는 것을 보여준다. “그분으로 당신과 함께 그분의 길을 가시도록 하자.”라는 찬송은 바로 이에 해당된다. “주여, 당신의 길을 얻으소서. 당신 자신의 길을 얻으소서.”라는 찬송도 마찬가지다. 리브카는 “그녀의 길”을 가는 것을 중단하고 “그의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은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는가?(살전3:11, 벧후2:15)
고후5:14-16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다 해도 이제는 더이상 그 분을 그렇게 알지 아니하노라.
살전3:11 이제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을 너희에게로 인도하시기를 바라노라.
벧후2:15 그들이 바른 길을 버리고 빗나가서 브올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으나
62 한편 이삭은 라해로이 우물 길에서 왔으니 이는 그가 남쪽 지방에 거하였음이라.
라해로이 우물은 브엘세바 근처에 있다.(창16:14)
창16:14 그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니, 보라, 그것은 카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이후의 모습은 교회의 휴거에 대한 모습, 즉 그리스도 신부의 귀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삭은 들(밭)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밭은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시대의 끝에는 주 예수께서 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내려 오셔서(아2:8-13) 신부를 부르실 것이다.(계4:1) 이때까지 리브카는 신랑을 본 적이 없었다.(요20:26-29) 이 둘의 만남이 어떠할 것인지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2:10-13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
계4:1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로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
요20:26-29 팔 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었는데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더라. 문이 잠겼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하시고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나의 손을 보고 너의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니 도마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니라.
63 이삭이 저녁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였는데 그가 눈을 들어 보니, 보라, 낙타들이 오고 있더라.
이삭은 들에서 묵상을 하고 있었다. 시리아 역본에는 이 묵상을 ‘산보’한다고 번역했다. 게세리우스는 본문은 이삭이 양떼를 모으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산보보다는 양떼를 모은다는 것이 휠씬 나은 것같다.
그러나 이삭은 머리 속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묵상이란 단어는 올바른 번역이다. 시1:2 63:6 119:23,48,78 143:5 등에서 이뜻으로 쓰였다.
시1:2 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63:6 내가 침상 위에서 주를 기억할 때와 밤 경비 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리이다.
시119:23 통치자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으나, 주의 종은 주의 규례들을 묵상하였나이다.
시119:48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에 내 두 손을 들어올릴 것이요, 내가 주의 규례들을 묵상하리이다.
시119:78 교만한 자들로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그들은 이유없이 나를 부당하게 취급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주의 법규들을 묵상하리이다.
시143: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묵상하며 주께서 손으로 하신 일들을 생각하나이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의 어휘를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70인역은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 깊이 묵상하는 것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는지 묵상을 생각이라고 뜯어고쳤다.
어쩌면 이 단어는 자기 두뇌를 우상화하고 지적활동을 신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에게는 (듀이, 러셀, 헤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잘 어울릴 수 있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본문은 그것이 아니고 묵상이다.
묵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느낌과 확신을 갖고 생각하는 것이다. 방금 어머니를 잃고 이제 곧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평생의 반려자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헬라의 스토아 철학자 모양 생각을 하기 위해 앉아 있었을까? 그는 오히려 뭔가를 묵상해야만 할 것이다. 이삭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였을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결혼생활을 골똘히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권위역본이 맞고 주석가들과 학자들과 비평가들과 철학자들과 교사들과 설교자들과 언어학자들은 틀렸다.
64 리브카가 자기 눈을 들어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렸으며
65 그녀가 그 종에게 말하기를 "들에서 우리를 만나러 걸어오는 사람이 누구뇨?" 하니 그 종이 말하기를 "나의 주인이니이다." 하자 그녀가 너울을 들어 자신을 가리더라.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은 단지 믿음의 눈으로(롬8:24) 예수님을 바로볼 뿐이지만 언젠가 그 믿음은 직접적인 대면으로 바뀔 것이고(고전13:12) 그때는 구름들이 두루말이처럼 걷힐 것이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주님께서 강람하시면 그때 우리의 혼은 실로 촉복된 날을 맞이할 것이다.
롬8:24 이는 우리가 소망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음이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것을 왜 바라리요?
고전13:12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
66 그 종이 이삭에게 그가 행했던 모든 것을 말했더니
66절에서야 종(성령을 예표함)은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나온 일에 대한 이야기로서 성령께서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과 족속과 기후에서 2,000년 동안 사역하신 자신의 일들과 행하신 것들을 말씀하시는 엄청난 간증은 육신을 입고서는 다 듣기가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그분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셨고 성경대로 믿는 사도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바울) 성경대로 믿는 수도승 (패트릭, 콜롬바, 마틴 및 스타우피츠) 그리고 성경대로 믿는 선교사들 (럴, 알반, 카레이, 리빙스톤, 엘리옷, 브레이너드, 허스슨, 모팻, 고포스 등) 성경대로 믿는 전도자들 (피니, 무디, 존스, 토레이, 선데이 등) 성경대로 믿는 목사들 (노리스, 홀드만, 빅, 로버슨, 에드워즈, 할레인, 헤니거, 윌슨, 스프링거 등) 성경대로 믿는 순교자들(스테판, 바울, 알반, 후스, 틴데일, 왈덴스, 위그노, 알바겐스 등)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책에 담긴 완전한 계획을 수행하셨고, 그책은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영원토록 이곳에 남게 될 것이다.
67 이삭이 그녀를 자기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가서 리브카를 취하니,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였더라. 이삭이 자기 모친이 죽고 난 후 위로를 받았더라.
“그가 그녀를 사랑하였더라.” 이 말씀은 에베소서 5장의 말씀에 해당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같이”
“Isaac was comforted after his mother's [death]” “이삭이 자기 모친 후에 위로를 받았더라.”
'죽고'(death)란 단어는 히브리 본문에는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권위역은 이 단어를 이탤릭채로 처리해서 그 단어는 히브리 본문에 없음을 표시하고 있다. 반면 요즘 나오는 변개된 성서들에는 어느 단어가 히브리 본문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를 전혀 구분해 놓지 않는다. 이들을 이처럼 부정직한 태도로 번역에 임했다.
이 단어가 히브리 본문에 없는 것을 두고 ‘성령께서는 이 아름답고 유쾌한 사랑의 이야기를 슬픈 단어와 더불어 끝내고 싶지 않은 것같다.’라고 주석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는 에드가 A. 게스트나 빈센트 필처럼 성경을 동화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망상일 뿐이다.
창세기는 “Coffin in Egypt”(이집트에서 관)으로 끝나고 있으며(창50:26) 구약성경 역시 “a curse”(저주)로 끝나고 있다.(말4:6)
창50:26 그리하여 요셉이 일백십 세가 되어 죽으니 그들이 그에게 향 재료를 넣고 그를 이집트에서 관에 넣었더라.(he was put in a coffin in Egypt)
말4:6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지 않게 하리라.(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창24:67에서 히브리어 본문에 “death”(죽음)가 빠진 이유는 비록 이스라엘이 한쪽으로 젖쳐졌고 내던져졌으며 거부되었다고(롬11:11,17,20) 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결코 아니란 사실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것은 렘31:36 암9:9 롬11:1-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롬11:11 그러면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졌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그들의 실족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로 시기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11:17 그러나 만일 가지들 가운데 얼마가 꺾여지고 돌올리브 나무인 네가 그들 가운데 접붙여져서 올리브 나무의 뿌리와 기름진 것을 함께 받게 되었다면
롬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여졌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아지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렘31:36 만일 그러한 법칙들이 내 앞을 떠난다면 그때는 이스라엘의 씨도 내 앞에서 민족이 되는 것에서 영원히 끊어지리라.
암9:9 이는 보라, 내가 명령할 것임이라. 곡식을 채로 치듯이 내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 집을 채질하리니 가장 작은 알곡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롬11:1-2 그렇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겔37:1-15) 따라서 영적 부활이 필요하다.(롬11:15) 그러나 사라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여호와의 이혼당한 아내(호1:2-3)와는 다르다. 사라는 오히려 천국이 신비의 형태로 존재하는 이 시대에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13:44)
겔37:1-5 주의 손이 내게 임하시어, 주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셔서 뼈로 가득 찬 골짜기 가운데에 나를 세우시고 나를 그 사면에 지나가게 하셨는데, 보라, 그 열린 골짜기에는 심히 많은 뼈가 있더라. 보라, 그 뼈들이 심히 말랐더라.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오 인자야,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였더니 다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오 너희 마른 뼈들아, 주의 말을 들으라.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숨이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롬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호1:2-3 호세아를 통한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 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는 그 땅이 주로부터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았더라.
마13:44 또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찾으면 다시 숨겨 두고 그 기쁨으로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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