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욥기(1-10)

욥기 1장 13절 - 22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7. 7. 10:36

13 하루는 욥의 아들들과 딸들이 그들의 맏형 집에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14 한 심부름꾼이 욥에게 와서 말하기를 "소들은 밭을 갈고 나귀들은 그 옆에서 풀을 뜯는데

15 사베인들이 그것들을 덮쳐서 빼앗아 갔고 칼날로 종들을 죽였으며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더라.

욥의 생애에서 이런 재앙이 일어난 연도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이런 재앙이 일어난 뒤에도 욥은 140년을 더 산다. 10명의 아이들을 낳을(13) 만한 시간이 있어야 하므로 이런 끔찍한 시험이 일어났을 때 욥이 70세였다고 생각해도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50세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삭이 75세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야곱이 77세가 넘어서야 결혼한 것을 참작한다면 욥이 70세도 되지 않아서 10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욥의 친구들도 욥에게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백발인 사람도, 아주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도 있으니, 네 아비보다 훨씬 더 늙은 사람들이라.”(욥15:10) 했다. 욥은 이런 고난을 겪은 후에도 140년을 더 살았으므로 그 늙은 사람들은 150-200살은 족히 된 사람들일 것이다.

4명의 사자들이(14,16,17,18) 욥의 귀에 끔찍한 소식을 전한다. 사베인, 칼데아인, 불 그리고 허리케인으로 욥은 자녀들을 잃는다. 그는 완전히 망한 것이다. 그의 재산은 다 없어지고 주식도 사라졌으며 파산 선고를 하게 된다. 이것도 부족한 듯 10구의 시체까지 묻어야 할 판이다.

욥에게 일어난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은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고도 21절에서 보이는 욥의 반응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무정하다. 하나님의 손에서 그런 강타를 당하고도 영과 진리로 경배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 누구인가? 자녀를 묻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하루에 10명을 우리 중에 아들이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겠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10명의 자녀를 잃고 살아남아 자녀들을 묻는 것보다 그들과 함께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사베인들은 아브라함과 케투라의 손자인 시바의 후손이다. “욕산은 시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아들들은 앗수르인과 레투시인과 레움미인이며”(창25:3) 이것으로 볼 때 욥의 시대는 에서와 야곱 시대거나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뒤이다. 사베인들은 사막의 약탈자들이다. 사탄은 한 사람을 남겨서 그 소식을 전하게 한다.(16)

16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들과 종들을 불살라 진멸하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더라.

17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끌고 갔고 칼날로 종들을 죽였으며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더라.

혼자 남은 목동이 그 다음 재앙을 알린다. 욥의 재난은 그가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2중으로 몰아친다.(17)

우스가 시리아의 극북동에 있는 유프라데스 지역에 있고, 바빌론(칼데아) 출신의 칼데아인들은 에돔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칼데아인들은 욥이 등장하기 100년 페트라(에돔) 도처에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창14장에서 시날 왕은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소돔과 고무라는 “우스 땅에 있는” 페트라에서 50마일 거리도 되지 않는다. 성경은 항상 유명한 주석가들을 평하는 최고의 주석이다.

창14:1 시날 왕 아므라펠의 때에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크돌라오멜과, 민족들의 왕 티달이

합1:6-8 라, 이는 내가 사납고 성급한 민족인 칼데아인들을 일으키노니, 그들이 넓은 땅을 행군하면서 그들의 소유가 아닌 처소들을 차지할 것임이라. 그들은 무섭고 두려우며 그들의 심판과 그들의 위엄이 자신들에게서 나올 것이라. 그들의 말들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들보다 사나우며, 또 그들의 기병들은 널리 퍼지고 또 먼 곳으로부터 오리니, 그들은 급히 먹으려는 독수리처럼 날아오리라.

18 그가 아직 말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그들의 맏형 집에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사자가 들어온다. 매번 사탄은 일을 저지르고 나서 단 한 사람만 살아남게 한다. 이로 인해 재앙이 더욱 돋보이게 되고 욥은 회복될 소망을 잃게 된다.

19 보소서, 광야로부터 큰 바람이 와서 그 집 네 모퉁이를 치니 그 집이 그 청년들 위에 무너져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더라.

그 집의 네 모퉁이가 동시에 무너진 것으로 보아 허리케인이나 태풍, 사이글론 같은 회오리바람(토네이도)일 수 있다. 19절에서 딸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 딸들은 욥기 끝에서(욥42:14) 이름이 나온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일이다. Kline, Clarke, Bullinger, Jamieson, Williams, Fausset, Brown, <New Bible Commentary>(개정판)은 이상하게도 이 딸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욥42:14 그가 첫째 딸의 이름을 여미마라 하였고, 둘째의 이름을 크시야, 셋째의 이름은 케렌합푹이라 하더라.

재미에슨은 자신의 한 권짜리 주석에서 “청년들”(young men)은 룻2:21에서처럼 “젊은 사람들”(young people)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룻2:21에서 사용된 같은 단어가(히브리어 ‘나아림’) 바로 욥1:19의 문맥 속에도 나온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단어는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종들에 해당되는 단어로 15,16,17절에 나오는 단어와 간다.

15-17절의 “청년”은 “종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욥을 위해 일하고 그의 가축을 돌보기 때문이다. 19절의 청년들은 그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15-17절의 청년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KJV>의 번역자들은 이 구별을 했다. 불일치에 대해 어떤 번역가도 정직하게 소동을 일으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도 같은 단어를 어떤 곳에서는 ‘젊은 사람들’로 다른 곳에서는 ‘청년들’로 번역하며, 때로는 ‘종들’로도 번역하기 때문이다.

록2:21 모압 여인 룻이 말하기를 그가 내게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들이 내 모든 추수를 마칠 때까지 내 청년들 곁에 붙어 있으라. 하시더이다.

화자의 말로 볼 때(18) 딸들도 죽었음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종이 나만 홀로 피하여 주인께 고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3명절 때 남자들만 나타나는 것과 연관해서 이 문제를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첫 번째 부활의 3부분과 일치한다.(고전15:23)

고전15:23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20 그 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바닥에 엎드려 경배하며

에4:1 모르드캐가 행해진 모든 것을 알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성읍 한가운데로 나가 대성통곡하며

미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들을 위하여 네 머리를 깎아 대머리 같게 하라. 네 벗겨짐을 크게 하여 독수리처럼 할지니, 이는 그들이 네게서 떠나 사로잡혀 갔음이라.

이 두 행동은 깊은 슬픔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첫 번째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육체를 찢는 것이다.(히10:20) 두 번째는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벗는 것을 상징하며(출33:5) 한 사람의 나체를 덮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뜻이다.(행22:23)

욥은 땅바닥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으로 하여금 술을 마시거나 자살을 하게 충동질하는 대신 사탄은 욥이 기도 모임을 갖도록 충동질한 꼴이 되었다.

히10:20 이는 그가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해서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우리를 위해 바치셨음이라.

출33:5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 내가 잠깐 네 가운데 올라가서 너를 진멸하리라. 그러므로 이제 네 장신구들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에게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알리라.

행22:23 그들은 소리 지르며 자기들의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다 날리더라.

21 내가 내 어미의 태에서 맨 몸으로 나왔으니 내가 맨 몸으로 그리 돌아가리이다

자신의 가족과 소유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욥이 보인 반응은 지상에 인간이 숨쉬는 한 참다운 성도의 태도를 보여준다. 욥의 상황에 처해서도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다면 제1계명을 지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시34:1 다윗의 시,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바꾸었을 때 자기를 쫓아내자 그 곳을 떠나서 지은 시내가 항상 주를 송축하리라. 그를 찬양함이 계속해서 내 입에 있으리로다.

시103:11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의 자비가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크심이라.

시103:20-21 능력이 뛰어나고, 주의 말씀의 음성에 경청하여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너희 그의 천사들아, 주를 송축하라. 그의 기쁨을 행하는 그의 모든 군대들아, 그의 수종자들아, 너희는 주를 송축하라.

주신 분도 주시오, 빼앗아 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

사탄이 가져갔지만(히2:14) 하나님께서 허락한 뜻 안에서만 그렇게 한다. 욥은 21절을 말하면서 죄를 짓지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탓하지도 않았다.

히2:14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며

욥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욥의 가슴 속에 묻어둔 쓴 뿌리를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즉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아가 욥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죽어갔던 강도는(눅23장) 성공한 셈이다. 그는 결코 살아남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에서 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훔치고 출석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이 경쟁할 수 없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타락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 죽어가는 강도는 회심하자마자 하나님과 교제에서 벗어날 기회도 없이 곧바로 영원한 집으로 갔기 때문이다. 욥은 재난을 당하고 영웅적인 반응을 보인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21절(혹은 2:10) 이후 본향에 가서 영광을 받는 대신 욥은 적어도 8일을 더 지내고 그 후 세 친구들을 처리해야만 한다. 이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복지 수표를 거두어 가셨다면 하나님을 저주했을 사람들이다. 사탄은 인간의 본성을 안다. 그래서 욥에게 시간을 준다. 그리고 종국에는 쌓아 놓은 공적을 날려버리려 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이 사람 안에서도 일어난다. 존 웨슬리가 죄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 면에서는 옳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순간, 1분에 60초, 1시간에 60분씩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죄없는 삶은 사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지름길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퓨즈가 나가고 절연체가 얇아진다.

여기서 잠시 고통중에 있는 사람의 거룩한 외침과 욥19:22를 비교해 보자. “어찌하여 너희가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내 몸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느냐?” 사탄이 24시간 내에 욥에게 모든 것을 던져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빌닷과 소팔과 엘리파스는 시간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다. 사람의 혼들을 시들게 하는 것은 반격이 아니다. 피가 물이 되고 심장이 귓속에서 박동할 때까지 계속되는 포병의 폭격이다.

우리 모두 같은 방법으로 와서 같은 방법으로 떠난다.(21) 즉 맨손으로 와서 맨손으로 떠난다. 시체를 입관하거나 화장시키기 전에 죽은 몸을 씻긴다. 그러나 옷을 입힌 채로 씻기지는 못한다. 자동차 사고나 폭탄에 맞아 즉사한다고 해도 어쨌든 맨손으로 간다. 왜냐하면 그런 사고에서는 옷이 다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올 때도 맨손이요, 갈 때도 빈손이다.

탁 트인 들에서 죽을 수도 있고 옷을 입은 채 대양에 빠져 익사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개미들과 파리들 혹은 조개들과 물고기들이 그 몸을 뒤덮을 쯤에는 여전히 맨손이다. 올 때도 빈 손이요, 갈 때도 빈손이다.(전7:8, 14) 욥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자는 무의식 상태렸다고 말한다.(욥3:16-17) 그가 구원 받았다면 다시 그런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욥10:18-21) 물론 갈보리 이후에 있는 우리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미래에 휴거 때까지 주님의 품에서 의식이 있는 상태로 쉴 것이다.(살전5:8-9, 고후5:1-12) 그리고 나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아2:16)과 영광스런 예배에 영원히 참여할 것이다.

전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나으며 영 안에서 인내하는 사람이 영 안에서 교만한 자보다 낫도다.

전7:14 번영의 날에는 기뻐하고 역경의 날에는 생각할지니, 하나님께서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게 하셔서 사람으로 이후의 일들을 알 수 없게 하셨음이라.

욥3:16 남모르게 유산된 것같이 내가 있지도 아니하여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 같았을 것이라.

욥10: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곳, 즉 흑암의 땅과 사망의 그림자에 가기 전에 그리하소서.

살전5:9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노를 받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라.

고후5:8 우리가 자신에 차 있고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이라.

빼앗아 간 자는 사탄이지만 사탄이 한 일을 주님이 한 일로 돌렸다고 해서 욥이 주님께 비난받지는 않는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행동했다.(롬13:1-4)

롬13:1-4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4 그는 너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면 두려워하라. 이는 그가 헛되이 칼을 가지고 다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니라.

욥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아시는(욥42:4, 암4:13) 분은 욥이 어느 정도의 연단이(욥23:10) 필요함을 아셨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용광로에(사48:10) 욥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도 욥은 죄를 짓지 아니하였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탓하지” 않았다. 약3:2의 온전한 사람처럼 욥은 몸을 복종시켰다. 욥은 천 명 중에 단 한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즉 자신의 혀를 제어할 수 있었다. 비록 잠시 뿐이기는 했지만!

욥42:4 내가 간구하오니 들으소서, 내가 말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나로 알게 하소서.

암4:13 이는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인간에게 자기 생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분이시요,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곳들을 밟는 분이시니, 만군의 하나님인 주가 그의 이름임이라.

욥23:10 그는 내가 택한 길을 알고 계시니 그가 나를 연단하시면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

사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약3:2 우리 모두는 많은 일에 실수 하나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며 온 몸도 제어할 수 있느니라.

한편 Living Bible은 욥의 고전적인 답변을 가련할 정도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 역본에는 여기 욥의 강력한 절규가 ‘죽을 때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로 줄였다

NEB는 본문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욥이 불합리(unreason)하게 하나님을 탓하지 않았다고 말한다.(22절)

에왈드와 다른 사람들은 21절의 태가 어머니의 지구의 태라고 말한다.

스코필드 성경은 1830년에 아담 클라크가 쓴 주석과 일치시키기 위해 그 구절에 “thee"라는 단어를 첨가시킨다.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은 에왈드를 따라서 시적으로 보편적인 어머니인 지구라고 본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로 시139:15를 댄다. 그러나 시139편에서 다윗은 말 그대로 창조(창1:27, 2:7)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개인적인 탄생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제미에슨, 포셋, 브라운은 이 두 구절을 오리겐처럼 단순히 영적으로만 해석한다. 그리고 나서 사사로운 해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다행스럽게도 유대인들이 출판한 맛소라 성경에는 <KJV>의 본문과 일치한다.

옴브라잇은 욥은 하나님을 대적해 어리석은 짓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반면 두흠은 욥은 하나님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버드는 욥이 땅에 입맞추었다고 말하고, 딜만과 픽, 벌링거는 본문을 수없이 변개시킨다. 이 모든 것은 같은 범주에 속한다. 즉 실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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