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체⑤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 20:36

10.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 교회의 무력 사용

주후 251년,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박해가 끝나자 집중적으로 박해를 받았던 로마 교회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교회는 엄청난 후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모진 고초를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 중에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겨나자 교회는 이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과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들을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당시 카르타고의 감독이던 키프리안(Cyprian, 200-258)은 일정 기간 신앙 훈련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교회가 이들을 용서해야 하며 이 모든 결정은 감독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이 문제를 봉합하려 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신자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킬 때 자기 혼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일로 인해 그는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크게 의심받고 있었다. 살아 있는 순교자로 불리며 신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고 권위를 인정받았던 ‘신앙 고백자들’(옥중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반대를 표명하였고 키프리안의 믿음을 의심하고 있던 장로들이 합세하면서 교회는 급격히 분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키프리안은 ‘신앙 고백자들’이 교회의 분열을 부추긴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것은 사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감독의 권위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므로 거기에는 성령님이 존재할 수도 없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수도 없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성례전도 집전될 수 없었다. 키프리안은 이와 같은 이유로 분리주의자들이 다시 카톨릭 국가 교회로 돌아왔을 때 재세례를 시행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키프리안은 감독 중심의 교회론을 개진했다.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황 제도의 기초를 확고히 놓았다.

로마의 감독은 교회 연합의 중심에 있으며 감독들은 사도적 계승을 이어받은 자들이다. 로마 감독뿐만 아니라 모든 감독과 교회는 사도적 전승 안에 존재하므로 이들이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그러나 적법한 절차 없이 즉 사도적 계승과는 관계없이 모인 무리들은 교회가 아니다.


결국 키프리안이 주장한 카톨릭교회 체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분리주의자들이 새로운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교회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에 앞서 로마 교회도 같은 이슈로 어려움을 겪었다. 로마 교회의 감독이던 코넬리우스가 되돌아온 배교자들을 용납하려 하자 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Novatian, 200-258)은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맞서며 분리주의의 길을 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노바티안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퍼졌고 후에는 ‘순결함을 유지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카타리’라는 이름의 무리가 되었다. 이들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지 않아 카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시간이 흘러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배교자를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큰 논쟁이 발생하였다. 박해받던 시절에 주교(감독)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도들(?)이 극심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변절했다. 박해가 끝난 뒤 북아프리카 지역은 변절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했고 도나투스(Donatus Magnus, 출생 시기 모름, 356년 사망)를 따르는 도나티스트들은 특히 심하게 색출 작업을 수행하여 기존 교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며 분리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특히 변절자가 준 세례 등이 무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니스트들과 노바티안들이 중요하게 여기던 ‘교회의 거룩함’을 매우 큰 가치로 보았고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티스트들이 생긴 직접적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가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죄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죄를 저지른 지도자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 때에 죄를 지은 자들을 비호하고 도나티스트 같은 강경론자들을 탄압했다.

도나투스는 313-355년에 ‘순교자들의 교회’를 이끈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이었다. 핍박당하던 시절 당국에 협조했던 카르타고의 감독 멘수리우스가 311년 사망하고 박해자들에게 굴복한 캐실리아누스가 감독이 되어 문제가 생기자 강경론자들은 316년에 도나투스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도나티스트들은 다시 태어난 성도들로 구성된 자신들의 교회만이 참되고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이들의 교회는 아프리카에서는 가장 권위 있고 힘 있는 교회로 번성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카르타고에는 두 명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 후 약 100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노바티안들처럼 도나티스트들도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퍼지게 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그는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티스트들은 더 열정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이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으며 카톨릭교회에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티스트들은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를 강조했고 세속적 인물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으며 교회 일에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 역시 단호히 배격하였다. 사실 이런 것들은 신약 교회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이지만 4세기경의 카톨릭교회는 이미 성경에서 크게 벗어나 배도하였으므로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국가 교회로서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로써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카톨릭교회와 도나티스트들의 교회로 분열되었고 5세기 초에 어거스틴은 콘스탄틴 황제가 도나티스트 편이 아니라 카톨릭 편이라는 문서를 근거로 국가의 공권력을 투입하여 도나티스트 교회를 제압하였다. 어거스틴은 누가복음 14장 23절 말씀 즉 “그들을 억지로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을 사용하여 무력을 써서라도 자유 교회를 국가 교회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어거스틴은 강압을 교육의 한 방편으로 보았고 치명적 결과가 닥치기 전에 그들을 오류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황하고 있는 ‘아들들’을 참된 순종으로 인도하기 위해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세속 권력의 도움을 빌려도 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는 목적이 정당하고 선할 경우에는 교회가 물리적/군사적 방법을 사용하여 심지어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였고 직접 이를 시행하였다. 즉 그는 교회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해 때로는 ‘치료적 처벌’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카톨릭교회에 대항하는 자들을 강제적으로 회심(개종)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중세 천주교회의 십자군 원정과 종교 재판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도나티스트들과의 논쟁에서 나타난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은 중세 천주교회와 그 이후 개혁자들의 개신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강압 박해 명령에 따라 405년에는 교회 일치 칙령이 발효됐고 411년에는 도나티스트들의 교회를 대적하는 파문령이 공포되어 국가 교회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시민권을 박탈했으며 그들의 집회에 참석하는 자들을 사형을 시켜 엄하게 다스렸다. 그 이유는 북아프리카에서 막강한 교세를 가진 도나티스트들의 교회를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도나티스트들은 “황제가 교회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외치며 국가와 교회의 분리, 양심의 자유를 외쳤고 결국 7세기경에 이슬람이 아프리카를 정복하면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13세기 무렵, 로마 교회는 주님의 말씀의 빛을 꺼 버리고 인류를 성경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끈질기게 애썼다. 싸움의 불씨를 지핀 것은 도미니크 구즈맨(Dominic Guzman, 1170-1221)이라는 이름의 스페인 카톨릭 사제였다. 그는 교황 이노센트 3세(Pope Innocent III, 1161-1216)와 더불어 로마의 가장 흉포한 통치 도구인 종교 재판을 고안한 사람이다. **종교 재판은 마녀나 이슬람교도들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시작되었다.

** 종교 재판은 이단 심문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단순한 ‘재판’이 아니라 이단자의 탐색, 적발, 체포, 재판, 처벌을 포함하는 이단자 박멸을 위한 일체의 활동을 그 임무로 하였다. 이단자에 대한 탄압은 4세기 그리스도 교회 - 엄밀하게 말하면 로마 카톨릭교회 - 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그 태도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적 이단 운동이 교회에 준 심각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은 일종의 십자군을 결성해서 20년에 걸친 이단자 박멸 전쟁을 일으켜 어렵게 이들을 진압하였으나 사후 대비책으로서 이단 박멸 강화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그래서 이단자와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는 데 충분한 학식과 종교적 열의를 가진 적격자를 전 그리스도교 국가 - 카톨릭 국가 - 에 파견하고 그에게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치외 법권을 부여하여 전적으로 ‘이단 사냥’에 종사하는 전문적이고도 항구적 조직을 만들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 1233년 4월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교황 교서로서 이를 발표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를 ‘이단 심문관’에 선임하였다. 이렇게 제도화된 종교 재판 조직은 이단 심문관의 진주(進駐)에 따라 전 그리스도교 국가에 퍼졌다. 종교 재판 방법은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절 허용되지 않고 불리한 증언만 허용되었으며, 이단에 대한 밀고는 비록 친자식 형제 사이의 것이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다. 또한 다종다양하고 처절한 고문에 의해 자백이 강요되거나 날조되어, 용의자는 반드시 유죄 판결과 처형으로 귀착되도록 짜인 암흑재판이 시행되었다. 이단 탄압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했기 때문에 종교 재판은 각국의 국왕, 영주, 지방 자치 단체 등의 세속적 재판에 의해서도 행해졌다. 그 뒤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자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도 종교 재판이 성행되었는데 그 재판 방법은 카톨릭 측의 방법과 같았다. 이 종교 재판 제도는 나라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1820년경에 거의 폐지되었다. <두산 백과>

그 당시에는 알비겐시스(Albigenses)라고 불리는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때에 알비겐시스는 천주교 성직자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고 특히 구즈맨과도 논쟁했는데 이 사람은 오늘날 천주교회에서 **성 도미니크라고 숭상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33)

**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리 교파가 없이 하나라고 오해한다. 그런데 개신교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있듯이 천주교에는 어거스틴파, 도미니크파, 프란시스파, 베네딕트파, 갈멜파 등의 이십여 개의 파가 있다. 영어 <위키백과> 혹은 구글에서 ‘Catholic religious order’라고 치면 전체 명단이 나온다. 구즈맨은 종교 재판을 실시한 도미니크파의 원조이며 카톨릭교회의 성인으로서 보통 ‘성 도미니크’(Saint Dominic) 혹은 ‘오스마의 도미니크’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 <위키백과>에서 ‘도미니코회’라고 치면 이 파의 활동을 알 수 있다.

도미니크는 알비겐시스를 이단이라고 고소했지만 그의 유명한 고소장을 살펴보면 오히려 알비겐시스가 실제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비겐시스는 권력과 영화의 과시나 그럴싸한 옷차림을 통해 개종자를 확보하지 않았다. 열정적 설교, 겸손함, 절제하는 생활이 그들의 무기이다. 그들은 겉보기에도 티가 난다. 그러나 그들의 거룩함은 겉치레일 뿐이다.

도미니크는 알비겐시스의 거룩함이 허울 좋은 가짜이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를 탄로 낸 뒤 천주교식의 거룩함으로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도미니크도 자신의 설교로 알비겐시스를 누르려고 마음먹었지만 그의 노력은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알비겐시스는 성경을 폭넓게 잘 아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도미니크가 로마로부터 들여온 비성경적 가르침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더 나아가 알비겐시스는 주후 1206년에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혼한 신부가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그들에게는 로마 교회가 그저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혼돈의 교회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클라우드(David W. Cloud)는 자신의 저서 「로마와 성경」(Rome and the Bible)의 9쪽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선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지도 않았다."

** 현재 네팔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클라우드는 현시대 근본주의 침례교 성도들 가운데 가장 많은 글을 쓰고 책을 저술하며 예리하게 시대를 분석하는 분이다. 그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생명의 길’(www.WayOfLife.org)은 미국의 근본주의 웹사이트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는 웹사이트에 속하며 여기에는 킹제임스 성경, 각종 이단, 침례교 역사 등의 자료가 매우 많다.

주후 1207년, 프랑스의 몬트리올에서는 도미니크를 주축으로 한 카톨릭 사제들과 알비겐시스 사이에 최후의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역사가들은 도미니크가 이 논쟁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알비겐시스의 대표자였던 드 테름(Benoit de Termes)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도미니크는 협박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공회를 만들어 종교 재판을 집행하고 스스로는 공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도미니크의 분노에 찬 간청에 힘입어 알비겐시스 신자들을 박멸할 것을 지시했다.**

** 그는 교황권의 전성기를 이룩하며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한 인물이다. 그는 1204년에 제4차 십자군 결성을 제창하고 1209년에는 제5차 십자군 결성을 제창하였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많은 부분을 프랑스 남부에서 일어난 알비파를 탄압하는 데 썼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교황청의 특사를 살해한 알비파를 카톨릭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십자군을 편성하였다. 카톨릭교회와 알비파의 싸움은 크게 확대되어 14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1240년에 이르러서야 평정되었다. 우리말 <위키백과> ‘인노첸시오 3세’ 항목

이러한 피의 숙청은 도미니크의 친한 친구인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가 주도했는데 이 사악한 사람은 천주교에서는 용감한 십자군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개신교에서는 잔인무도한 학살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알비겐시스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리의 흔적마저도 송두리째 없애려 한 자이다. 이를 위해 드 몽포르는 그들에 관한 문헌까지도 철저하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박멸했다.

** 12세기 초 교황 이노센트 3세 시절 남부 프랑스의 링구에독과 프로방스 지역에서는 카톨릭교회의 요구와 주장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은 다른 많은 지역으로 확산하였는데 그중 ‘라 미네르브’(La Minerve)라는 곳에서는 140여 명의 남녀 신자들이 그들을 죽이려는 카톨릭 군대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이때 그들은 계속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카톨릭 군대 지도자 드 몽포르는 커다란 장작더미를 준비하고는 그들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때 그들은 “우리의 최고 권위는 교황이나 사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뿐이다.”라고 외치며 모두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다(「새 교회사Ⅰ」, 정수영, p. 283). [정수영 목사님의 ‘새 교회사’는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우며 킵바이블(www.KeepBible.com)의 우측 상단 구글 검색에서 ‘정수영 목사님 새 교회사 총 12개 PDF 파일 모음’이라고 치면 스캔 받은 책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유튜브에서 ‘정수영 교회사’라고 치면 40여 개의 교회사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중세 암흑시대에 구즈맨과 교황 이노센트 3세에 의해 시작된 종교 재판으로 수천만 명의 성경 신자들과 유대인들이 믿음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주후 1233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종교 재판을 교회의 공식 교리로 채택했다. 이로써 성경 신자들을 향한 600여 년간의 피의 참극이 시작되었다. 알비겐시스를 박멸한 뒤 교황은 성경을 번역하거나 소지하거나 읽는 행위를 전면 금지해 버렸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클라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 말씀이 비추는 빛은 로마 교회의 이단 교리를 모조리 폭로했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평화를 사랑하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박해를 퍼부었으며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던 성경까지 모조리 없애려 했다.

알비겐시스를 시작으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종교 재판은 수 세기 동안 무수한 희생자를 낳았다. 역사학자 돌링(John Dowling) 1845년에 집계한 자료를 보면 종교 재판에 의한 사망자 수는 5,000만 명이 넘는다. 이 숫자는 천주교에 의해 이단 판결을 받고 죽임 당한 사람의 누계가 이 정도라는 뜻이다. 이는 공신력 있는 학자들이 빈틈없이 수집한 자료를 종합한 결과이다.

도나티스트들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재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세례는 성경 신자들에게 큰 문제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국가 교회를 시행하다 보니 누구든지 로마 제국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유아 세례를 받아야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카톨릭교회는 사람이 유아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나 믿음의 순례 여정을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적으로는 보통 이것을 ‘세례 중생’이라고 한다.

** 성경적으로는 재침례가 맞지만 역사서와 백과사전 등에 거의 공통적으로 재세례로 되어 있으므로 일단 여기서는 침례 대신 세례를 썼다. 사실 초기에 재세례의 목적은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성도들이 믿음을 고백한 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은 처음부터 ‘세례 중생’을 믿지 않았고 시행하지도 않았으며 이런 차원에서 도나티스트들은 비록 사람이 유아 세례를 받았어도 그것은 믿음이 없을 때 부모가 대신 행한 것이므로 아무 소용이 없고 사람이 성경적으로 다시 태어날 때 비로소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이때 받는 세례가 참 세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이 베푸는 세례가 ‘재세례’가 아니라 ‘성경적 참 세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그가 속한 카톨릭교회는 이와 같은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리하면 국가 교회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을 때에 그 대상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부호’가 새겨진다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 노예들의 이마에는 흔히 각인을 새겼다. 그들이 혹시 도망갔다가 다시 잡혀 오더라고 다시 각인을 새길 필요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마에 이미 과거에 새긴 각인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 세례를 받든 그 대상자의 영혼 속에는 ‘그리스도의 각인’이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도나티스트 같은 분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재세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단들이 카톨릭교회로 돌아올 때에도 재세례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신학적 이유 때문에 어거스틴은 극심하게 도나티스트들을 핍박하였다.

파라(F. W. Farrar, 1831-1903)는 어거스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 맞추어 ‘이스라엘이 교회’라는 해석을 이끌어 낸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교회의 권위가 지지해 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제시된 구원의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투성이인 교회로 대체함으로써 철저하게 ‘사탄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고 요한계시록 2장 7절이 말씀해 주듯이, 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창조물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감히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