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체⑥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3. 10:21

11. 어거스틴의 다른 사상

① 마리아 숭배: 비록 자기 나름의 마리아 사상을 펴지는 않았지만 어거스틴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하였다. 431년에 열린 에베소 공회에서 로마 교회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기 전에 이미 그는 마리아를 그렇게 불렀다.

② 교회: 그는 교회는 오직 하나만 있으며 그 안에는 두 개의 요소가 있다고 믿었다. 그중 하나는 보이는 요소로서 카톨릭 성례와 성직자 계급 체계 및 평신도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요소로서 교회에 속한 영혼들이었다.

전자는 구원을 선포하고 성례를 베푸는 제도적 교회, 즉 그리스도가 세운 카톨릭교회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도시」에서 교회를 하늘의 도시 혹은 왕국으로 보았고 이 교회가 궁극적으로 땅의 모든 왕국들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③ 사제들의 사도적 계승: 그는 키프리안의 가르침에 따라 카톨릭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사도들의 계승자들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다고 가르쳤다.

④ 자유 의지: 그는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사람들을 이성적 존재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지만 이 자유 의지가 죄를 짓는 용도로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죄로 인해 더러워진 자유 의지는 물질들에 의해 갇혀 있으므로 죄를 짓기 전의 의지만큼 자유롭지 못하다고 믿었다. 그는 종종 누구든지 원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멸망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의 이론에 따라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원죄가 사람의 자유 의지를 완전히 멸절시켰다고 믿고 가르쳤다.

⑤ 유대인: 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 세상으로 흩으셨고 그들은 결국 세상 끝에 이르러서야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땅에 살되 흥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⑥ 종말론: 처음에 그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신다는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를 믿었지만 후에 그것이 육신적이라는 이유로 그 관점을 버렸다. 그는 사람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이루는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에 가까운 믿음을 펴면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를 주장하였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바탕으로 땅에서 승리하며 다스리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이 땅을 다스리신다는 무천년주의를 확립하였다. 종교 개혁 시대에 칼빈 같은 신학자들 역시 철저하게 어거스틴의 무천년주의를 수용하였다.

⑦ 연옥: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나 깨끗하지 못한 자는 연옥의 불에 의해 정화된다고 믿었다.

⑧ 현시대의 추종자들: 파이퍼(John Piper) 목사나 아렌트(Hannah Arendt)

같은 작가들이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 교회와 세상 속에서 그의 사상을 펼치고 있다.

 

12. 어거스틴 사상 총정리

위에 열거된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신정 정치 교회: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무력까지도 동원하여 신정 정치를 구현하는 국가 교회가 유일한 교회이다.

② 무천년주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땅에서 다스리는 왕국은 없다.

③ 이스라엘 대체 신학: 아브라함의 실제 자손인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고 신약 시대의 교회가 곧 구약 시대의 왕국이므로 구약 성경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모든 복은 신약 시대의 교회가 이어받는다.

④ 인간의 자유 의지 박탈: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완전히 박탈되었다.

⑤ 세례 중생: 사람은 유아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⑥ 연옥: 그리스도 안에서 더러운 상태로 죽은 자들은 연옥 불에 의해 정화된다.

⑦ 마리아 숭배: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가져오는 은혜의 통로로서 죄 없이 수태되어 그리스도를 출생한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⑧ 성인들의 공적: 수호성인들의 공적이 있으면 연옥에 있는 자들의 죄들이 경감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사상은 지난 1,500년 이상 로마 카톨릭교회가 공언한 믿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증언을 통해 어거스틴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모든 교리를 놓은 장본인이며 그래서 로마 교회로부터 ‘교회의 박사’(Doctor of the Church)로 불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을 알 수 있다.

** 「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천주교의 유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를 참조하기 바람.

개신교회가 가르치는 교회사는 배도자 유세비우스나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 등과 같이 카톨릭 교회사가나 카톨릭 편향의 개신교 교회사가들이 저술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어거스틴이나 프란시스 같은 철저한 카톨릭교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성도)로 묘사한다. 그러나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받는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마더 테레사, 프란시스 등의 카톨릭교회 성인들은 사도 바울이 저주한 ‘다른 복음’ 즉 ‘행위 복음’을 믿고 가르친 사람들로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도들’(saints)의 반열에 결코 들 수 없는 사람들이다.

** 필립 샤트 - 스위스 출생의 미국 신학자 샤프는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언 신학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영미 합동 작업에 의해 1885년에 완성된 영어개역성경(RV)의 미국 측 위원장도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의 여러 파의 일치 협력을 지향하는 에큐메니즘의 선각자이며 추진자였다(「종교학대사전」, 1998). 샤프는 RV의 미국판인 미국표준역(ASV) 번역 위원장을 지내면서 성경 변개에 앞장섰고 1893년에는 당시 처음으로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 종교 회의’(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를 주도함으로써 영원토록 종교 통합 운동(WCC 운동)의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 성도 -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saints’, 즉 성인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하나님에 의해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카톨릭교회가 인조 성인들을 양산해서 ‘saints’, 즉 성자 혹은 성인이라고 부르므로 성경 번역 시 어쩔 수 없이 ‘saints’를 성도 곧 ‘거룩한 무리’로 번역하였다. 카톨릭교회는 벨기에의 ‘제수이트’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파를 동원하여 17세기부터 약 300년 동안 카톨릭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을 편찬하였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카톨릭교회의 공식 순교사로 읽히고 있다. 사실 현시대 개신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성 프란시스 등의 카톨릭교회 성자들 이야기는 거의 다 이 책에서 유래되었다. 볼란디스트파의 우두머리였던 델레하예는 그의 저서 「성자들의 전설」에서 성자들에 관한 전설과 참된 전기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또 카톨릭교회 학자인 아트워트는 「성자 사전」에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 중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많은 부분이 순전히 가공된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전설과 전기의 배합물이다.”라고 시인하였다.

그 이유는 카톨릭교회의 ‘성인들’(saints)은 육에 속한 행위에 의해 카톨릭교회나 교황이 생산해 내는 ‘인조 성인들’이지만 성경대로 믿어서 행위와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saints)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시는 거룩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보고서도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바울의 은혜론과 필적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신약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의 믿음을 따르면 성경대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확립한 로마 카톨릭교회의 ‘중생’(重生), 즉 ‘다시 태어남’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다수 카톨릭교도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새롭게 창조하는 중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들려주듯이 카톨릭교회에 귀의해서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중생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주의의 제도에다 고해 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 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그는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 계급에 절대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른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교회의 사제는 ‘Father’(아비)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교회의 통일성으로 삼고 - 참고로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 교회의 특성을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함, 전통’에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다 ‘성물 숭배 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내가 죄인들 중의 우두머리니라.”(딤전1:15)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서신이야말로 그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 즉 예수님의 피를 통한 구원,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을 온 영혼으로 체험하였으며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지라고 성도들에게 권고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서신서들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Jesus)라는 말이 무려 40회나 기록되었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런데 영생의 심판자 노릇을 해 온 카톨릭교회 안에 안주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온통 카톨릭교회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사실은 그가 복음을 모방한 거짓 종교에 빠진 채 침울하고도 우울한 종교적 위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종교성 테두리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였음을 우리에게 잘 들려준다.

그는 악의 비참함을 철저히 되씹음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위안을 통해 회한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보혈로 죄들의 용서를 받은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하여 푯대를 향해 밀치며 나아가는”(빌3:13-14) 그 환희를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르낙(A. Harnack, 1851-1930)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이사르적이고 동시에 어거스틴적인 로마 카톨릭교회 안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에 혹은 이방인들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에 우리 믿는 자들이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여야 하는가?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트리엔트) 공회가 결정하고 발표한 카톨릭교회의 의인론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어거스틴파에 속했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카톨릭교회와 수도원에서 수많은 현대판 모니카와 어거스틴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 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양은 있으나 하나님의 성품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살아 계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