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의 실체①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4. 09:34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장로교를 창시한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자이며 성공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칼빈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누와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칼빈이 카톨릭교회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카톨릭교회와의 갈등과 시대의 변화 등으로 인해 아들에게 진로를 바꿀 것을 권했다.

칼빈은 1523년 말에 파리의 몽테규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인문학자이자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등에게 수학하며 수사학 등을 배웠다. 이시기에 그는 그의 사촌인 올리베땅(P. R. Olivetan, 1506-1538) 등의 영향을 받았다.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도 칼빈과 비슷한 시기에 몽테규 대학에 다녔는데 이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528년에 칼빈은 아버지의 권유로 오를레앙 대학과 부르주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1532년에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1533년에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하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 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카톨릭교회와 결별했다.

1533년에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을 하면서 영적 심리적 고통을 겪었는데 이것은 그의 시편 강해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가 교회를 개혁하라는 하나님의 대언자적 소명을 확실히 믿었음이 나타나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종교 개혁의 불길이 퍼지면서 1533년 11월 1일에 칼빈의 친구인 니골라스 콥(Nicolas Cop, 1501-1540)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기독교 철학과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 연설을 하였다. 이에 국회가 이 연설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자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고 국왕 프랑수아 1세(1515-1547년까지 재위함)가 종교 개혁 주동자들을 박해하기로 결심하자 칼빈도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1534년 10월 17-18일 밤에는 미사 때 빵 조각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카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 즉 화체설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다. 이에 프랑수와 1세는 일단의 조치를 취했고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한편 1535년 6월 4일에는 천주교 소수 본문이 아닌 개혁자들의 공인 본문에서 올리베땅(칼빈의 사촌)에 의해 번역된 성경이 출판되어 천주교는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칼빈은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1536년 장로교회의 고전이 된 「기독교 강요」(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박해받던 프랑스의 개신교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망명객의 귀환을 허용하는 특별 사면이 포고되었고 이에 칼빈은 프랑스로 떠나서 친구들을 방문하였으며 그 뒤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일들을 정리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도시인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우회하여 스위스의 제네바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1. 칼빈과 제네바

1536년 당시 제네바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1532년 이후에 베른이 개신교 주(칸톤, 독일어 Kanton)가 된 것을 계기로 삼아 파렐(G. Farel, 1489-1565)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줄곧 제네바에 종교 개혁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카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했고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 시민들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 개혁을 수용하기로 하며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는 “이제부터 우리는 오직 복음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바로 이때부터 제네바는 카톨릭주의를 청산하고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도시 및 국가(주)의 유일한 신앙으로 확정하였다.

1534년에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제네바에서 카톨릭교회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종교 개혁을 이끌고 나갈 능력은 없었다. 그는 천성이 광신적이고 단순한 기질의 인간으로 알려져 있었고 에라스무스는 그에 대해 “일생 동안 이보다 더 불손하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혹평하였다. 폭력적 천성에서 나오는 거침없는 열정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이 과업을 달성했지만 막상 승리한 뒤에 그는 창조력 없는 무능한 혁명가로 드러나게 되었다. 낡은 질서의 잿더미 앞에서 우왕좌왕하던 파렐은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제네바로 들어와 종교 개혁 사업을 완수해 달라고 간청했고 칼빈은 이를 승낙하였다.

1536년 9월 5일의 시 의회 기록에는 파렐의 뒤를 이어 프랑스 사람을 성경 교사로 고용한다는 것 외에는 칼빈의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시 의회 의원들 중에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무서운 독재 사상을 가진 칼빈이 자기들을 규제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에서 명백하게 밝힌 요구 조건을 내걸며 고용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고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으며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며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1537년 1월 16일에 제네바의 목사들은 시 의회에 일련의 규정들을 제출했는데 이것들은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해 필요한 주요 사항들을 기술하고 있었다. 이 규정들이 받아들여지자 모든 제네바 시민들은 교회와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칼빈이 이 규정들을 근거로 시민들에게 엄격한 교회의 권징(勸懲)을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주일에 베푸는 주의 만찬(천주교의 성만찬)에는 거룩하게 생활하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를 시행하기 위해 칼빈은 시 의회와 협력하였다. 칼빈은 실제적으로 성도들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였다. 심지어 그는 종교 개혁 신앙 고백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누구든지 도시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약 시대에 신약 교회가 이런 일을 시행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칼빈은 구약 시대의 왕국과 신약 시대의 교회를 바르게 구분하지 못한 채 어거스틴의 신권 통치 개념을 이용하여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민들을 위협하고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칼빈이 제시한 교리 교육서와 신앙 고백서를 시민들이 수용하고 교회의 신권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시 의회가 베른의 요청에 따라 베른에서 행해지고 있던 몇 가지 교회의 관례들을 제네바에 도입하려 하자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시민들은,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칼빈의 독재 아래에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신권 통치 독재 체제인 국가 교회를 위해 자신이 직접 저술한 「기독교 강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다.

결국 목사들과 시민들이 이러한 변화에 기꺼이 순응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1538년 4월에 칼빈과 그의 일당은 제네바로부터 추방되었다. 칼빈과 파렐은 베른과 취리히를 통과하여 바젤로 갔고 그 뒤에 칼빈은 1538년 9월에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새로 구성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없는 동안 시민들은 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앙 문제로 방황하게 되었고 그러자 이것을 기회로 삼아 카톨릭교회는 제네바를 다시 교황 편으로 돌리려 하였다. 이런 와중에 다시 교황의 세력 밑으로 들어가면서 혼동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칼빈의 엄격한 계율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결국 1541년 5월 1일에 제네바시 의회는 칼빈에게 내렸던 금지령을 폐지하고 만장일치로 그를 다시 청빙하기로 결정했으며 칼빈은 마침내 15419월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부터 칼빈은 1564년까지 약 22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며 ‘개신교의 교황’으로서 신의 의지만을 관철시키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제네바에서의 처음 실패를 경험한 뒤 그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장로 통치 제도를 도입하고 엄격한 생활 방식을 만들어 시민들의 삶을 억압하고 통제하였다. 물론 그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이 일들을 수행하였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그런 일은 구약 시대 신권 정치 하에 있던 이스라엘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신약 시대 교회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불법이었다. 종교 개혁이라는 자유 운동에서 출발한 칼빈의 교조적 강압 정치(신정 정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냉혹하게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해 버렸다.

고린도 시민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경건치 못한 삶을 산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무력으로 고린도 시민들을 통치하려 하였을까? 우리는 중세에 무슬림들이 서진하면서 정복민들에게 “꾸란이냐, 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며 강제로 개종하게 한 사례들을 잘 알고 있고 그런 일을 한 이슬람 세력의 횡포에 분개한다. 그런데 칼빈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네바에서 무슬림들이 행한 것과 동일한 만행을 저질렀다.

교회가 시민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신약 시대에는 허용되지 않는 불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뛰어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진리를 수호한다는 구실로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한 사실을 역사는 잘 보여 주고 있다.

2. 칼빈의 제네바 통치의 실상

다음 글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다른 의견을가질 권리(바오출판사, 2009)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은 칼빈과 동시대에 제네바에 살면서, 신정 국가를 건설한 칼빈의 독재와 폭력에 맞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며 관용을 부르짖은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의 감동적 싸움을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인 츠바이크가 기술한 것이다. 아무도 이 책이 보여 주는 역사적 사실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카스텔리오는 칼빈의 최후의 대적이었다. 칼빈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카스텔리오도 처음엔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 그러나 칼빈의 독재와 그의 측근들의 위선이 시 전체를 망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까놓고 문제 제기를 하다가 결국 제네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쫓겨난 카스텔리오의 삶은 비참했다. 칼빈의 입김으로 그는 일정한 직업도 얻지 못한 채 구걸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고 기껏해야 바젤의 한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는 일로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우리는 청교도 신앙/개혁주의 등을 잘 살펴보아 야 한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시간에 칼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성경 위에 두고 그대로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천주교회의 통치보다 더 무섭고 엄격했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한다. 다시는 그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준다. 칼빈에 대한 카스텔리오의 평은 다음과 같다.

칼빈은 타고난 대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하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 문답서>를 시 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 문답서> — 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 — 는 시 의회로부터 원칙적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 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의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 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 문답서>를 받아들이고 자기를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 달라고 시 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 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때부터 종교 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 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이 도시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다 끝이 나고 말았다. 이제 제네바에는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 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 사례에 대해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 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주는 ‘성경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그들은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하였을 뿐이다.

시 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 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하기 위해 초인적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 그는 ‘주의 만찬’(성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을 ‘주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런데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 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 —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 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거부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될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것은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 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 행동에 의해 한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 의지를 추구하는 일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 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칼빈은 주의 만찬을 한 달에 한 번 열 것을 요구하였으나 제네바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그것을 일 년에 네 번 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국민들은 독재 체제의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 시민들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 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 독자적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 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들의 공화주의적 자존심은 몹시 상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 개혁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또한 시민들은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들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 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들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 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시민들은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 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나라에서 온 관세 징수인의 아들은 자기 형제들과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 주고 책망하는 자가 되었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다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 세력이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들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 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 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는 칼빈의 권위적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이로써 칼빈은 제네바에서 일단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