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네바의 종교 재판
1541년에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 뒤로 칼빈은 국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가 사용한 종교 재판을 이용하였다. 그는 신약 교회가 경험한 적이 없는 ‘교회 계율’을 도입하고 종교국을 만들어 제네바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이런 감독 체제가 들어선 이후로 제네바에서는 사생활의 자유가 사라졌다. 도덕 경찰관들은 어느 집이나 들어가 모든 것을 샅샅이 검사하였다. 하나님의 계율을 하나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테러 속에서 제네바 시민들은 삶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 - 연극, 오락, 민속 축제, 춤, 온갖 형태의 유희, 심지어 스케이트 타는 것도 - 을 다 박탈당하였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살다가 죽는 것, 일하고 복종하며 교회에 출석하는 것뿐이었다. 제네바에서는 오로지 “금지, 금지, 금지!” 그리고 “의무, 의무, 의무!”의 외침만 들렸다.
칼빈은 10,000여 명에 불과한 제네바시를 통치하며 처음 5년 동안에 13명을 교수대에 매달고 10명의 목을 잘랐으며 35명을 화형시키고 76명을 추방하였다. 칼빈의 이러한 종교 개혁은 실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빙자한 살상 행위였다.
이 같은 잔인한 피의 숙청은 칼빈의 잔인성과 폭력성이 어떠했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며 국가 교회 통치를 위한 칼빈주의 교리가 예수님의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먼, 어거스틴의 카톨릭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멸망의 교리였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칼빈은 종교적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선적 지배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반대당의 사람들까지도 거침없이 제거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인문학자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서는 칼빈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했던 사람은 다 처형당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제네바에는 칼빈당 외에는 어떠한 당파도 남지 않았다.”라고 증언하였다.
칼빈이 처형한 사람들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 칼빈의 예정론 교리를 비난하고 반대한 사람들: 설사 칼빈의 예정론 교리가 성경에 맞는다 하더라도 그 교리를 비난했다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약 시대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② 칼빈을 위선자라고 부른 사람들
③ 아이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 재침례 성도들(Ana-Baptists)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 천국 백성으로 삼는 것은 성경에 없는 불법이라고 주장했고 그 결과 칼빈의 개혁 교회를 포함해서 유아 세례를 인정한 로마 카톨릭교회와 루터 교회 등에 의해 부당하게 학대를 당하였다.
④ 부모를 구타한 사람
⑤ 칼빈과 생각이 같지 않은 자유사상가: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칼빈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였음을 증언한다.
⑥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한 짓을 하는 사람들
⑦ 마귀 들린 것으로 판단되는 마법사(?)
⑧ 이외에도 그는 삼위일체, 유아 세례, 성만찬 등의 해석에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의 고문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1.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잡아당기는 것
2. 창자가 튀어 나오도록 꼬챙이로 쑤시는 것
3.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것
4. 사람의 가죽을 벗긴 뒤 소금으로 문지르는 것
5. 칼로 살갗을 찢는 것
6. 불에 그슬리는 것
7. 사람의 몸을 절단내는 것
8.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
9. 해충들이 살을 뜯어 먹도록 방치하는 것
이 모든 고문 방법은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가 성도들과 유대인들을 잡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방법들이다. 이런 극심한 일들이 진행되자 고문받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러자 종교국은 사람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박수를 치게 했다.
사실 그때까지 제네바시는 칼빈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한 이런 폭정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는 칼빈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테러가 프랑스 혁명의 피의 축제보다 더 잔혹했다고 지적하였다.
역사는 칼빈과 그의 종교적 후예들인 청교도들이 자행한 인간 사냥이 여러 개신교 분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하게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이 참혹한 실상은 한 줄의 글로 축약하기에는 규모가 심히 크므로 이 당시 제네바 시민들이 겪은 수많은 고문과 가혹한 만행을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슬쩍 덮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 모든 행위와 역사를 바로 규명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의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들의 거짓 교리가 성경적 정통으로 숭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실로 인본주의 철학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대개 지성주의자들이 거기에 매료된다. 그러다 보니 현시대 칼빈주의자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른다. 그들은 칼빈주의가 ‘확고하게 성경에 기반을 둔 교리’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사도들이 지킨 진리’라고 말하기도 하며, “그리스도께서도 칼빈주의 5대 강령을 가르치셨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W. J. Seaton,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1970, p. 8. *J. B. Davis, 「The Berea Baptist Banner」, 1995, p. 30. *M. Duncan, 「The Five Points of Christian Reconstruction from The Lips of Our Lord」, 1990, p. 10.]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고후11:3-4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마음이 그렇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내가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너희가 받아들이게하면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
그리스도의 교리의 단순함에서 떠나 인간의 철학을 숭배하게 되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의 노예가 된다.
우리가 냉정하게 주시해야 할 점은 칼빈의 이러한 만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스스로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 믿으며 세운 본인의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할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반대하시며 전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사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신약 시대라는 새 시대를 여셨다. 예수님의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무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교회가 국가를 다스리며 무력으로 불신자들을 죽이는 일을 한 적이 없다. 주후 100년 이후로 교회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며 세상을 제압하기 위해 이루어진 만행은 모두 다 국가 교회를 시행하는 카톨릭교회와 거기서 파생된 개신교회(특히 칼빈의 장로교회)를 통해 세상에 나타났다.
4. 칼빈과 세르베투스
제네바에서 칼빈의 만행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를 화형시키는 일에서 절정으로 나타났다. 스페인의 의사인 세르베투스는 종교 개혁자들과 교류하면서 1530년에 「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고 칼빈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 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결국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하였고 몇 개월 뒤 제네바에서 열린 칼빈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칼빈에게 체포되었다.
세르베투스를 체포한 뒤 칼빈의 비서는 그를 고소했고 이에 제네바시 의회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시 의회는 세르베투스의 재판을 위해 두 달이 넘는 기간에 조심스럽게 제네바와 자매 관계를 맺은 네 도시에 자문을 구하였고 네 도시는 다 세르베투스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제네바시 의회는 최종 단계에서 삼 일 동안 논의한 뒤에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인 화형을 선고하였다. 이 모든 결정의 배후에 칼빈이 있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불로 태워 죽인 사건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개신교도들도 종교적 이유로 종교 재판을 통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선례가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은 당시 유럽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칼빈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대한 평가가 냉혹하게
바뀌게 되었다. 당시 제네바에 있던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스가 칼빈의 신학 사상에 문제를 제기하다 부당하게 칼빈에게 죽임을 당했음을 증언하였다. 현시대의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세르베투스는 자유사상가나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칼빈의 삼위일체설과 칼케톤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 세례에 대한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견해를 비판하였을 뿐이다.
그 당시 개신교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개신교회가 카톨릭교회처럼 종교 재판을 도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 유럽 사람들은 카톨릭주의의 교의와 통제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자유롭게 믿음 생활하는 것을 기대하였는데 이러한 기대감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으로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직접 목격한 카스텔리오는 그가 화형당하는 끔찍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쇠사슬로 화형대에 묶였다. 야윈 몸뚱이 위로 밧줄이 네댓 번이나 돌아갔다. 형리는 책과 또 세르베투스가 칼빈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극비리에 보냈던 그 원고를, 살아 있는 몸뚱이를 잔인하게 옥죄고 있는 밧줄 사이에 끼워 넣었다. 마침내 세르베투스의 머리 위에 끔찍한 고통의 관이 씌워졌다. 그것은 유황을 묻힌 잎으로 만든 관이었다. 이 모든 잔인한 준비를 마침으로써 형리의 일은 끝났다. 이제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살인이 시작된 것이다.
사방에 불꽃이 솟구쳐 오르자 고문당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한 순간 몸서리치며 물러설 만큼 끔찍한 외침을 토해 냈다. 곧이어 연기와 불길이 고통으로 죄어드는 육체를 감쌌다. 그러나 점점 더 끔찍하게 살아 있는 육체를 천천히 갉아 먹는 불길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받는 사람의 날카로운 절규가 여전히 울려 나왔다. 그러다가 마지막 고통의 외침이 들렸다. “예수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형언할 길 없이 두려운 죽음의 투쟁이 반 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불꽃이 잦아들고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게 탄 기둥에는 시커멓게 탄, 연기를 내뿜는 덩어리가 빨갛게 달구어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더는 인간의 어떤 형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끔찍하게 녹아내린 모습이었다. 한때는 깊이 생각하면서 열정적으로 영원을 갈구하던 창조물, 하나님의 영이 깃들어 숨 쉬던 한 창조물이 이제는 끔찍하게 역겹고 냄새나는 오물 덩이로 변해 버렸다(「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pp. 172-173).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직접 본 카스텔리오는 다음과 같이 개탄하였다.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무기를 들어 박해하고 그들에게서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비기독교적인 일이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불과 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살인자와 도둑보다 더욱 잔인한 취급을 받는다면 오늘날 과연 누가 기독교도가 되려 하겠는가!(동일 문서, pp. 194, 202).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한다.(동일 문서, p. 214).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 「로마 제국 쇠망사」를 지은 기본(E. Gibbon, 1737-1794)은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 한 사람의 희생이 종교 재판의 화형대에서 사라져 간 수천 명보다 더 나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고 따라서 개신교 원래의 이념을 분명하게 부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세르베투스가 죽은 지 390여 년이 지난 1903년에는 제네바에 사는 칼빈의 후예들은 그의 처형지인 제네바 근교에 자기들의 조상 칼빈의 만행을 속죄하는 기념비를 세웠고(거리 이름도 미가엘 세르베투스로임) 1908년에는 그가 죽은 곳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프랑스의 도시 안마스에 그의 기념상이 세워졌다.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한 자리에 칼빈주의 추종자들이 1903년에 세운 기념비에는 프랑스어로 “우리의 위대한 개혁자 칼빈을 존경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후예들로서 우리는 그 시대의 오류이자 그의 오류를 척결하고 종교 개혁과 복음의 진정한 원리들을 따라 양심의 자유를 견지하면서 1903년 10월 27일에 이 화해의 기념비를 세운다.”라고 적혀 있다(동일 문서, p.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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