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네팔에서 선교하시는 클라우드(David Cloud) 선교사가 지은 「칼빈주의 비평」(Calvinism Debate)을 번역한 것이다.
성경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칼빈주의를 비평하기 전에 먼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칼빈주의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되어 우선 <위키백과>가 정의하는 칼빈주의를 요약하여 기술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비평이 편파적인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것임을 보여 주려 함이다.
칼빈주의의 정의(위키백과의 칼빈주의 요약)
칼빈이 창시한 칼빈주의(Calvinism) 혹은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 종교 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어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은 사상을 가리킨다. ‘칼빈주의’란 말은 칼빈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일이며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되는 일에 칼빈이 미친 지대한 영향으로 인해 ‘칼빈주의’란 이름이 붙여졌다.
종교 개혁 당시 칼빈주의가 개신교의 주류 신학으로 자리 잡아 가면서 유럽 전역에 개혁 교회가 서서히 자리 잡아 갔다. 이런 개혁 교회를 통해 칼빈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개혁 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빈주의를 말할 때에는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이외에도 칼빈주의에는 여러 가지 별칭이 있는데 우선 그 사상의 흐름이 어거스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어거스틴 전통의 칼빈주의’라고도 하며 또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한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 개혁 때부터 시작된 개혁 교회 외에도 장로교회와 개혁 침례교회 등이 있다.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 개혁은 결국 개신교회(프로테스탄트)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 개혁을 주도한 주요 인물에는 다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칼빈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의 영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칼빈은 개혁 교회 시각에서 그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칼빈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 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 가면서 개신교 신학은 점차 칼빈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는 칼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에 자리 잡은 개신교회가 개혁 교회이며, 박해를 피해 제네바에 거주하면서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낙스(John Knox, 1513-1572)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회이다. 이런 교회들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은 보통 개혁주의라고 불린다.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영국)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신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개혁 교회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리를 악용하여 백인들에게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칼빈주의는 ‘사람의 전적 타락’이라는 근본 교리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칼빈주의자들은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이것은 육체적 생명만 가지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 내지 못함을 뜻한다. 이것은 그들이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여러 종류의 질(質)이 있어서 그중에는 구원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구원받을 수 없는 종류의 믿음도 있는데, 이처럼 구원을 주지 못하는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지만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무능력’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하나님이 참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지 못한다.
이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칼빈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빈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적 타락’에서 언급하였듯이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지속된다. [이것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만 믿을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에 의하면, 사람이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서(중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을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태어나게 하고 그에게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면 그제야 비로소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
종교 개혁 당시 이러한 칼빈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라고 주장한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은 당시 최고의 학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이다. 루터는 자신의 저서 「의지의 속박」(Bondage of the Will)에서 에라스무스를 반박하고 칼빈과 같이 ‘전적 타락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과 관련된 것들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합력설(Synergism):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그것을 취하느냐 여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이 경우에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 된다.
단독설(Monergism):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다 해 주셔야만 사람의 구원이 가능하다. 이 경우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
합력설, 단독설 등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심히 단순한 성경의 진리를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도록 복잡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철학을 세우려는 칼빈주의자들이 창안해 낸 용어들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루터나 칼빈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그중에 잘 알려진 것이 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였고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카톨릭교회는 어거스틴의 편을 들며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이런 결론으로 인해 루터와 칼빈 연구자들은 자기들의 사상이 어거스틴에게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종교 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 9)를 따르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고 이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도르트 종교 회의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 5대 강령’(Five Points of Calvinism)이다.
**아르미니우스 -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인 아르미니우스는 처음에 칼빈의 신학을 따랐으나 그의 예정론에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의견을 진술하였으며 그의 사망 이후 그의 문하생들은 <센텐티아 레몬스트란 티아>라는 5항의 문서를 공표했다. 그 주장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를 믿을 능력은 있다. 2) 하나님은 누구도 불신앙으로 예정하지 않으셨다. 3) 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4) 회심은 성령님에 의한 은혜에 의해 일어난다. 5)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다”(「종교학대사전」, 1998).
아르미니우스는 처음부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믿지는 않았고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을 믿은 성경 신자이다. 그러나 후대에 그의 추종자들이 구원 상실 교리를 첨가하자 칼빈주의자들이 아르미니우스를 비난하기 위해 마치 그가 구원 상실론을 가르친 것처럼 선전함으로써 현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아르미니우스가 구원 상실론의 원조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 초기부터 서방 교회, 즉 카톨릭교회를 제외한 동방의 모든 교회들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르미니우스가 요약한 대로 인간의 자유 의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무제한 속죄를 믿었다. 칼빈주의 혹은 어거스틴주의는 서방 카톨릭교회에서 어거스틴이 득세하던 5세기 초반과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등장한 16세기에만 잠시 세력을 폈다. 이것은 뵈트너(L. Boettner), 벌코프(L. Berkhof) 같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다 동의하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는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뵈트너는 이제 미국에서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역사가 칼빈주의를 지지한다는 진술은 사실이 아니다. 칼빈주의 혹은 어거스틴주의는 오직 서방의 카톨릭교회에서만 그것도 5세기와 16세기에만 잠시 번성하였고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전체 교회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 말씀대로 믿고 행하였다.
루터와 칼빈 이후로 오웬(John Owen, 1616-1683),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 등의 개혁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칼빈과 루터가 정의한 ‘전적 타락설’에 의거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였다.
한국 교회는 칼빈의 전통에 서 있는 장로교회가 가장 강한 나라이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거의 다 장로교 선교사들이었으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50% 이상이 장로교 교인이다. 신학교의 경우에도 장로교 교단 신학교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칼빈의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사업회는 2009년에 칼빈 5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끝으로 [현시대의 온건한] 칼빈주의 - 맥아더 목사 등이 주장하는 것 - 와 극단적 칼빈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대상과 속죄의 유효성과 범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온건한 칼빈주의는 복음의 유효성에 있어서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그리스도의 속죄는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계량적인 뜻만이 아니라 한정적 또는 특정적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대에 칼빈이 주장한] 극단적 칼빈주의는 인류에 대한 복음의 유효성과 제한에 있어서 예수님의 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예배의 전통과 형식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초기 종교 개혁 시대의 전통을 고수한다.
< 구원에 관하여 우리가 믿는 것 >
(칼빈주의자들이 아닌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구원에 관하여 믿는 것을 요약합니다.-편집자 주)
■ 모든 사람은 타락한 죄인들이며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義)를 자기 스스로 창출해 낼 수 없다. 인류는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다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으며 이로써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롬5:12).
사람의 이 무서운 타락의 상태는 로마서 3장 10-18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10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12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었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돌무덤이고 그들은 자기혀로 속임수를 썼으며 그들의 입술 밑에는 독사의 독이있고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쓴 것으로 가득하며 15 그들의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르므로 16 파멸과 고통이 그들의 길에 있어 17 그들이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타락한 사람들은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 있고(엡2:1)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며(엡2:3)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엡2:12). 사악한 자들은 태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으며 그들은 태어나는 즉시 길을 잃고 거짓을 말한다(시58:3).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므로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렘17:9).
사람들은 이미 정죄를 받은 상태에 있고(요3:18) 하나님의 진노 아래 거하며 자기들의 죄와 불신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롬1:18-20).
■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고전11:7) 선과 악을 구별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롬2:14-15)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행10:1-2). 그러나 그는 구원에 필요한 행위는 할 수 없다. 죄인이 행하는 모든 일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심지어 그의 의로운 행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걸레 누더기와 같다(사64:6).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 무서운 상황에서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죄의 시장에 노예로 팔려 나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죗값 지불이나 구원 방법에 의해 그 상태에서 구속될 수 없다(시49:7-9).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일들을 수행하신다(엡1:11; 시135:6; 사46:10-11; 단4:35).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는데 그 이유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는데 이것은 정해진 때에 확증될 것이다(딤전2:4-6).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이행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3:16).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며 우리 죄들뿐만 아니요 또한 온 세상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다(요일2:1-2).
■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엡2:8-9).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 구원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100%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며 이 일에 기여하는 사람의 행위는 0%이다(롬11:6; 딤후1:9; 벧전1:18-21).
■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롬3:25, 30, 31; 갈3:8, 14; 엡2:8; 3:15; 히6:12).
■ 믿음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 성경은 믿음을 행위와 대조해서 보여 준다(롬9:32; 갈2:16; 3:2). 구원이 믿음의 법이 아니라 행위의 법으로 된다면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배제되었느니라. 무슨 법으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결론을 내리노라”(롬3:27-28).
■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손과 비슷하다. 선물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며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 구원 과정의 모든 영광은 선물을 주는 이에게 돌아간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일을 하신다.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죄 있는 존재임을 확신할 수 없으며 스스로 빛을 발하거나 회개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수 없으며 스스로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땅에서부터 들리면 모든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리라”(요12:32).
■ 하나님의 영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선포자들에게 능력을 입혀 주시고(행1:8) 죄인들이 죄를 깨닫게 하시며(요16:7-11) 죄인들에게 조명의 빛을 주신다(히6:4). 한 죄인이 하나님의 이끄시는 사역에 반응하여 성령님의 유죄 확증에 동의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분을 부르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그런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죄의 노예 시장에서 구속을 받고(엡1:7) 모든 죄를 용서받으며(엡1:7) 다시 태어나고(딛3:5)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며(엡2:1) 즉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진다(골1:13).
■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는데 이들은 혈통이나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다(요1:12-13). 사람들이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 구절이 분명히 말하므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결코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않는다. 죄인은 자기 뜻에 따라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죄인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요일5:11-13) 어둠의 권능에서 구출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으며(골1:13)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복을 받았고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수용이 되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과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엡1:3-7).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처소들에 앉혀졌다(엡2:5-7). 그들의 생명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3:3).
그들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이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데 앞서 달려가신 분 곧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사 그들을 위해 거기로 들어가셨다(히6:19-20).
■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마련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사라지지 아니하는 상속 유업을 받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마지막 때에 드러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다(벧전1:3-5).
■ 구원은 회심한 성도의 삶에 의해 증거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내가 그분을 아노라, 하고 말하면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진리가 그의 안에 있지 아니하나”(요일2:4).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른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므로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10:27-28).
■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다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그들이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다(엡2:10).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자신을 주신 목적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그들을 구속하시고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 소유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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