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제④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 10:26

8.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시

어거스틴은 신약 시대에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는 국가 교회가 세상에 확립되는 시대에 태어나 마니교, 플라톤주의, 알렉산드리아 철학 등을 복합적으로 묶어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확립해 준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다.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시」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 교회의 성서로 불린 「하나님의 도시」 - 원제목은 「이교도들에 맞서는 하나님의 도시」임 - 라는 ‘역사 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 사상을 혼합한 것으로, 카톨릭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체한 자들은 하늘로부터 땅에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 교회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 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 무천년주의자들은 현재 교회 시대가 사탄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천년 왕국 시대(계20:1-6)라고 말한다. 그들이 믿는 천 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통치란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육체적 통치가 아닌 영적 통치를 말한다. 그래서 ‘무천년’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천 년이 지금 현재 진행 중에 있으므로 미래에 다가올 천 년이라는 개념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묘사된 것이 교회 시대인 지금 여기에서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와는 매우 다르게 미화되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과 비드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로마, 즉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시」를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교회-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 해답까지 제공하게 되었다.

주후 410년경, ‘영원한 도시’(?)로 간주되어 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교회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시」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편 3절을 주로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시가 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시」 역시 이 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시는도다. 오 하나님의 도시여, 그들이 너에 대하여 영화로운 것들을 말하였도다. 셀라(시87:2-3). 여기의 ‘하나님의 도시’는 시온 곧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옛 바빌론의 ‘도시 국가’(City 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 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 국가’(City State)였다. 그래서 그는 그 책의 여러 곳에서 누차 ‘하나님의 도시’가 카톨릭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시는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시(15권 26)… 하나님의 도시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시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 71편 18절 주해)… 하나님의 도시가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 98편 4절 주해) 등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교회’이다. 우리는 중세를 통해 두 형태의 하나님의 도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다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태어나서 발전한 것들이다.

첫째는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시」를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 제국의 이상을 발견하였으며 이것을 8-9세기의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살해한 로마 교회의 성자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겼다.

12세기의 오토 주교(Otto of Freising, 1114-1158)는 「두 도시의 역사」(Chronicle of The Two Cities)라는 책을 지어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시」가 로마 제국의 연장인 카톨릭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더욱 확장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 로마 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교회는 합스부르크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도시는 니콜라스 1세와 그레고리 7세 등의 교황들에게서 발견되는 교황주의 교회 형태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시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 권세를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 등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자신들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이 위조문서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교회의 신학자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그 이후에는 발라(Lorenzo Valla, 1407-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동로마 황제(비잔틴 제국 황제)의 ‘4세기 것으로 위조한 칙령 문서’이다. 이것은 중세 서유럽의 유명한 위조문서이다. 8세기경에 작성된 이 위조 칙령 문서는 13세기부터 시작하여 중세 기간 동안 세속 황제에 대한 기독교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은 역사 문법적 해석 방법으로 이것이 4세기 문서가 아니라 후기의 위조문서임을 증명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인 로렌초 발라는 이 문서를 역사 문법적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이것이 4세기의 칙령이 아니라 8세기경에 조작된 것임을 밝혀냈다. <위키백과>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자신들의 교리에 첨가하여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비록 루터의 종교 개혁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29)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 르네상스를 통해 카톨릭교회는 더욱더 조직화되었다.

**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가 동등한 제사장(벧전2:9-10)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 사상에 뿌리를 둔 로욜라의 반개혁(Counter reformation) 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한 제사장/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이들은 특별한 의장,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함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11:4)로 둔갑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로욜라가 조직한 제수이트, 즉 예수회는 유럽 사회에서 온갖 악한 일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 ‘예수 없는 예수회’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결국 전체 중세 시대를 통해 서로 갈등을 빚었던 교회와 국가, 교황과 황제의 관계는 서로 다른 두 견해의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두 견해 뒤에는 어거스틴의 두 도시가 왜곡된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종교 개혁 시대에는 어거스틴의 국가 교회 이론이 루터와 칼빈의 국가 및 교회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칼빈은 프로테스탄트계의 교황으로서 천주교처럼 교회가 다스리는 신정 정치 국가를 제네바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9. 어거스틴의 세상 문화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늘 긴장 관계에 있다. 성경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므로 세상에 동화되지 말 것을 곳곳에서 가르친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검증하도록 하라(롬12:2).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무슨 사귐을 갖겠느냐? 빛이 어둠과 무슨 친교를 나누겠느냐?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무슨 일치를 보겠느냐?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무슨 몫을 나누겠느냐?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들과 무슨 합의를 보겠느냐?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안에 거하고 그들 안에서 다니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저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 딸이 되리라. 주 곧 전능자가 말하노라.(고후6:14-18)

초대 교회 이후로 좁은 길을 걸은 믿음의 성도들은 성경의 분리 모델에 따라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았고 그 결과 국가 교회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 1세기 후반에는 그 당시의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또 국가 교회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짊어지고 도시를 떠나 산지에서 계곡에서 유랑하며 꾸준히 순례의 행보를 이어갔다.

주후 2세기에는 처음으로 소아시아에서 몬타니스트들(Montanists)이 사도 교회의 순수성을 외치면서 믿는 성도만이 교회의 회원이 됨을 주장했으며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베푸는 유아 세례는 전적으로 비성경적임을 선언하고 재침례(Ana-baptism)를 행했다.

주후 3세기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노바티안들(Novatians)이 일어났다. 이들 역시 유아 세례의 죄악을 폭로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외쳤다. 이들은 그 순수성으로 인해 후에 ‘순수한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카타리들(Cathari)이 되었다. 그 뒤 4세기 초에는 아프리카에서 도나티스트들(Donatists)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외치며 일어났다.

또한 7세기경에는 타우루스 산지에서 폴리시안들(Paulicians)이 초대 자유 교회의 맥을 이으며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역시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침례와 그런 성도들만의 교회 회원권을 주장했다.

그 뒤 그리스도의 자유 교회는 12세기경의 왈덴시스들(Waldensians)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알프스 계곡에서 바른 성경을 붙들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임을 외치면서 천주교회와 분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불가리아와 보스니아에서는 보고밀(Bogomil)이라는 이름의 자유 교회가 천주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으면서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폴리시안의 뒤를 이은 **알비겐시스(Albigenses)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 인터넷 검색 엔진에서 ‘발도파와 알비파’라고 치면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사람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가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절대자가 기술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나 지배층이 기술하고자 한 것만 기술한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에서 잊히거나 잘못 알려진 사건 또는 존재들을 캐내는 작업은 뜻도 있고 재미도 있다. 발도파와 알비파도 역사와는 썩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곡된 채 알려졌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제대로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알비파는 프랑스의 알비시 근처에 살면서 성경에 근거한 삶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청빈한 삶,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삶, 신자와 수도자 사이에 평등함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했고, 교황과 기존 교회는 이러한 삶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Martyrs mirror>(Thieleman J. van Braght, Herald press)는 1158쪽의 책으로 중세 천주교회의 성경 신자 박해 역사(왈덴시스와 아나뱁티스트 처형)를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고 그 부패한 본성이 왜곡된 문화를 산출하였으며 왜곡된 문화가 다시 인간의 본성을 더욱 썩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죄가 용서되고 사탄의 지배를 받던 세상이 새로운 창조물로 갱신됨으로써 창조 세계가 변화된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어거스틴은 **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통치를 받으며 사람들이 변화되어 이 땅에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 후천년주의자들은 천 년이 흐른 후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며 그 결과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세상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바뀌어간다고 본다. 이러한 현상이 점점 더해지면, 점차적으로 ‘평화’와 ‘의’의 천 년 시기가 이 땅 위에 도래하게 되고, 정확한 수치로서의 천 년은 아니지만 그 천 년만큼의 오랜 세월을 의미하는 기간이 지속된다고 믿는다. 만약 세상에 전쟁과 갈등이 점점 사라져 간다면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오늘날과 같이 분쟁이 더욱 심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이러한 후천년설은 하나의 바람에 불과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따라서 그의 이론에 의하면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생긴 대립, 갈등, 탄압, 착취, 전쟁 등 각종 무질서를 바로 세우고 또한 어그러진 문화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보통 현대 개신교회들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정복 이론이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하나님의 도시」에 잘 나타나는데 그가 이 작품을 쓴 목적은 이교도들이 로마 제국의 쇠퇴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는 것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어거스틴 당시에 로마 제국의 문화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교 문화를 기독교 문화로 변혁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교의 덕이 기독교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을 떠난 부패한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나온 왜곡된 문화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변혁되고 갱신된다고 믿었다.

문화 변혁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목표는 모든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인격이 문화 자체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심지어 국가나 교회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불신자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바로 이것이 중세 천주교 무력 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칼빈 역시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복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스며들어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과 칼빈 그리고 루터 등의 종교 개혁자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력을 써서라도 신정 정치를 이 땅에 구현하려 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