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로마와 기독교
이교도 국가인 로마가 세계를 통치하던 시대에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고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신약 교회를 세우셨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시대인가!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자신의 백성에게 얼마나 큰 복을 주셨는지 알기 원하면 사도행전을 읽기 바란다. 이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큰 기적들과 이적들을 많이 이루셨다.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기독교는 초원의 불길처럼 전 세계를 휩쓸었다. 기독교는 산을 에워싸고 대양을 건너갔으며 왕들을 떨게 하였고 폭군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계를 뒤집어엎었다! 실로 그들의 메시지와 그들의 영은 권능으로 충만하였다(행17:6).
그러나 여러 해가 가기 전에 몇몇 사람들은 성령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백성 위에 앉아 **왕 노릇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초기 교회 시대와 같이 영적 방법과 진리로 성도들을 치리하지 않고 자기들의 사상과 방법으로 치리하며 스스로 성령님과 성경 말씀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이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이교주의를 기독교와 합치려는 시도가 심지어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때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는 또한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몇몇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이는 곧 이교도들의 가짜 교리들을 경고한 것이다(살후2:3, 7; 딤전4:1).
** 계2:6, 15에는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이단이 나온다. 그리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니골라당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성도들을 통치하려는 자들이다. 신약 교회가 생기자마자 이런 무리가 생겼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자들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 그런데 로마 카톨릭교회는 아직도 구약 시대의 종교로 남아 자기들의 성직자를 ‘제사장’(priest)이라 부르며 철저히 성직자 계급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제는 교회에서 제사장이 아니라 ‘목사’(pastor)가 감독이나 혹은 장로로서 교회를 치리하며 양 떼에게 꼴을 줌을 보여 준다(행20:17, 28; 엡4:11; 딤전3:1-7; 딛1:5-9; 벧전5:1-4).
그때 성도 유다가 유다서를 기록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한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내가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가 생겼나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들어온 어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그들은 이 정죄를 받도록 옛적부터 미리 정해진 자들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니라(유3-4).
이제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파고들어 온 여러 형태의 바빌론 미스터리 이교주의에 직면하게 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빌론 이교주의의 관습이나 믿음과 상관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짓되이 고소를 당하고 사자 굴에 던져졌으며 화형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 당시에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당하고 순교 당했지만 그 뒤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곧 로마 제국의 황제가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공포한 것이다. 또한 로마 황제는 로마 전 지역에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발표했다. 그 결과 교회의 **주교들(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얻게 되었으며 교회도 세상의 인정을 받고 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 디모데전서 3장에 나오는 감독(bishop)은 특정한 지역 교회의 목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카톨릭교회가 권세를 잡자 ‘bishop’은 원래의 의미를 잃고 여러 지역 교회의 사제(목사)들을 다스리는 의미의 지역 감독이 되었고 지금은 천주교, 성공회 등에서 주교 혹은 대주교라 불린다. 현시대 감리교회의 감독 등은 바로 천주교 시스템에서 나온 후자의 감독을 말한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비싼 값을 치러야만 했고 기독교와 이교주의 사이에는 많은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하게 되기보다는 이 세상 제도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황제는 호의를 보이면서 교회에서 가장 큰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이교주의에서 황제는 항상 신으로서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부터 이교주의가 도매값으로 혼합되어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특별히 이러한 현상은 로마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4. 콘스탄틴과 국가 교회의 시작
로마가 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이 되면서 도처에서 밀려드는 이교도들과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황제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당시 이러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가장 교묘하게 이룬 사람이 바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틴 황제(Constantine, 콘스탄티누스 1세, 272-337년)이다. 그는 306-337년까지 재위한 중기 로마 황제로서 동방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라 부른다.
세속 역사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그는 또한 교회의 수장으로서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그는 330년에 공식적으로 비잔티움(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고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로 타락한 국가 교회는 이교도들의 풍습에 근거한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각종 우상 숭배, 제사장 체계, 교황, 추기경, 교부, 연옥, 면죄부, 유아 세례 등 도저히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가증한 것들을 강제로 성도들에게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국가 교회는 자기들의 범주 안에 거하려 하지 않는 자유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참 성도들을 화형이나 수장 등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이단이란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중세 암흑시대에는 국가 교회인 천주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받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세속 역사가들과 천주교 사관을 가진 교회 역사가들이 한목소리로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을 찬양하지만 우리는 그가 행한 일을 영적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기독교 진흥 정책은 다분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수많은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게 된 콘스탄틴에게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로마 황제는 교회의 권위 내지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인간이 그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하려 하였다. 이로써 국가 교회에서 황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국가와 교회의 수장이 되어 권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국가 교회’(State Church)를 국가 체제의 이상적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 국가’(Church State)를 이상적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고 오직 ‘교회 국가’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국가 교회’나 ‘교회 국가’는 신권 통치라는 측면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황제든 교황이든 국가의 수반이 되어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혹독한 속박 속에 가두려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틴은 사실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묶으면서 대음모를 꾸몄고 그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비성경적 국가 교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5. 콘스탄틴의 개종과 업적
콘스탄틴과 그의 군대가 로마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소위 ‘밀비안 다리 전투’로 알려진 전투에 직면해야 했다. 그 당시 관습에 따라 그는 희생 짐승의 내장을 보고 점을 치던 하루스피스라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는데(겔21:21) 신들이 자기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 자기가 그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다. 그러나 그가 후에 말한 것처럼 환상(또는 꿈) 속에서 그에게 십자가가 나타났으며 “이 표적을 갖고 정복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다음 날인 주후 312년 10월 28일 그는 십자가가 달린 깃발을 내세우며 진격했고 그 결과 그의 적들을 물리치면서 그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드디어 개종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콘스탄틴의 십자가 환상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유일하게 이 이야기의 증거나 권위를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5-340)가 지은 「콘스탄틴의 생애」에 두었다. 유세비우스는 이단인 오리겐의 추종자로서 로마 정권에 아부하며 권력을 누린 어용학자이다. 그래서 현시대 학자들은 콘스탄틴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유세비우스에 의해 교회사와 성경 본문은 카톨릭교회 중심으로 편향되며 크게 왜곡되었다.
또한 콘스탄틴이 실제로 환상을 보았다 해도 과연 우리는 그 환상을 준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평화의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교도 황제에게 십자가를 나타내는 군기를 만들고 그 표적으로 사람을 정복하고 죽이도록 지시했단 말인가? 만일 그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콘스탄틴의 개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사실 그의 개종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설령 그가 그 시대의 교회 행습들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제정했다 할지라도 그가 성경적 의미에서 참다운 개종(혹은 회심)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사실이 매우 많다. 역사가들은 그의 개종이 그 시대의 표준에 의한다 할지라도 명목상의 개종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참다운 회심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회심 후 그가 몇 차례 살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심지어 자기 아내와 자기 아들을 죽였다. 성경은 “살인자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한다(요일3:15).
콘스탄틴은 미네르비나를 첫째 아내로 두었고 그녀를 통해 크리스푸스라는 아들을 얻었다. 그의 둘째 아내는 파우스타인데 그녀를 통해 그는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크리스푸스는 뛰어난 군인으로서 그의 아버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니케아 공회가 열린 직후인 주후 326년 그는 자기 아들 크리스푸스를 사형에 처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의 둘째 아내인 파우스타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것은 파우스타의 고소 내용이었다. 파우스타는 그의 첫째 아내의 아들 크리스푸스를 그런 방법으로 몰아내고 자기 아들 가운데 하나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어머니는 그를 설득하여 사실은 그의 아내 파우스타가 그의 아들에게 몸을 바친 것으로 믿게 했으며 그래서 결국 콘스탄틴은 자기 아내 파우스타를 펄펄 끓는 목욕탕 속에 넣고 질식시켜 죽였다. 이런 일이 있을 즈음에 그는 자기 누이의 아들을 태형으로 죽였고 누이의 남편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목 졸라 죽였다. 이처럼 잔인한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런 황제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온통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고 십자가 처형을 폐지하고 로마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행하던 박해도 중지시켰다. 그러나 과연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호의를 베풀었을까, 아니면 정치적 동기에서 그렇게 했을까? 「카톨릭 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몇 주교들은 궁전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심지어 황제를 거룩한 존재인 하나님의 천사로 높여 찬양했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하늘에서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호의를 베푼 것은 순전히 정치적 동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그는 자기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 약삭빠른 폭군으로 간주될 수 있다.
유명한 역사가 두란트가 콘스탄틴에 대해 내린 결론도 위의 진술과 거의 같다.
콘스탄틴의 회심은 참된 것이었는가? 과연 그것은 종교적 신앙 행위였는가, 아니면 정치적 지혜의 극치였는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필요한 의식에 거의 순응하지 않았다. 그가 기독교 주교들(감독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비록 그가 제국의 단합을 위해 종교적 불일치 의사를 표명하는 자를 억압하긴 했지만 사실 그 당시 기독교계를 동요시켰던 신학적 차이점들에 대해 그가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중 주교들을 자신의 정치 조력자로 취급하였다. 그는 주교들을 소집해서 공회를 주재하였고 무엇이든지 대다수가 일치하는 의견을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참된 신자라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후에 정치가가 되어야 하는데 콘스탄틴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기독교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콘스탄틴은 극심한 박해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 제국이 분열되자 그는 기독교와 이교도들의 종교를 혼합하여 제국에 필요한 통일된 힘을 형성시킬 필요가 있음을 직시하고 이러한 조처를 취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두 종교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하며 십자가 상징도 양측을 나누는 요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때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콘스탄틴 군대에서 미트라 - 고대 인도와 이란의 신화에 등장하는 빛의 신 - 를 숭배하는 자들에게도 십자가가 실족거리가 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오랫동안 미트라의 빛의 십자가 군기를 지니고 싸웠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의 기독교는 혼합물이었다. 비록 그가 이교 신전들로부터 자기의 형상을 제거하고 자기에게 희생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계속해서 황제의 신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황의 호칭인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지도자로 불린 그는 이교 예배를 돌보고 계속해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였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의 봉헌식에서도 그는 반은 이교도 의식을, 반은 기독교 의식을 사용했다. 태양신 마차가 시장에 진열되었으며 그 위에 십자가가 놓였다. 콘스탄틴이 만든 동전들 중 어떤 것들은 십자가를 지니고 있지만 마르스나 아폴로를 나타내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이교도들의 마술적 방식을 신봉하고 이로써 농작물을 보호하고 질병을 고치려 했다. 심지어 「카톨릭 백과사전」이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 콘스탄틴의 방법, 즉 혼합주의 개념은 분명히 로마 카톨릭주의가 발전되고 재물을 늘리며 부유하게 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다.
콘스탄틴은 죽을 때에야 비로소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까지 그가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는 세례를 통해 모든 죄가 제거되는데 죽기 오래전에 세례를 받으면 세례 받은 이후의 모든 죄를 처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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