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ism Debate
― D. CLOUD ―
목차
서 문
1. 어거스틴의 실체
2. 칼빈의 실체
3. 칼빈주의 비평
4. 왜 나는 칼빈주의를 믿지 않는가?
5. 개혁주의 신학의 위험들
6. 로드십 구원이란 무엇인가?
7. 칼빈주의에서의 14년 여정
8. 칼빈주의자의 정직한 의심
9. 칼빈주의 비평 결론
부록
1. 율법과 은혜
2. 두 본성
3.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상태
4. 선택과 자유의지
5. 어거스틴의 창세기6장 해석 변개
6. 마르틴 루터의 흑역사
서 문
장성한 이후로 지난 40년 동안 성경을 읽고 번역하고 목회를 하며 성경 교리를 가르치는 책들을 저술하면서 왜 한국 교회는 샤머니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심히 율법적이며 구원에 관해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찾은 여러 성도들의 간증과 연구를 통해 칼빈주의(Calvinism)라는 구약 시대 율법주의 신정 정치 틀이 한국의 대다수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을 얽어매고 있고 그 결과 신약 시대 목사들이 구약식 교회를 하려는 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를 믿는 분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칼빈이 가르쳐 준 틀을 통해서만 보려 하며 그 결과 성경의 많은 부분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영해하려 합니다. 특히 대다수 칼빈주의자들이 신약 시대의 교회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가르치므로 이런 신학에 종속된 성도들은 성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종말론과 예언에 관한 한 캄캄한 무지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칼빈주의 연구 및 비평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교리가 심히 왜곡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에서는 먼저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무조건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그에게 믿음을 준 뒤에야 비로소 그가 복음을 믿을 수 있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즉 그들의 구원 방법은 복음이 제시될 때 사람이 그것을 듣고 이해하고 믿고 구원받아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자들과 정죄받아 지옥에 갈 자들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치므로 이렇게 배운 성도들의 삶은 극도의 숙명론에 의해 지배를 당합니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많이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구약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성도들에게 부과함으로써 이율배반적 실행을 성도들에게 요구합니다.
또한 한국의 칼빈주의 목사들의 다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근거로 자기의 위치를 거의 하나님 수준으로 높여서 성도들이 스스로를 평신도로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종인 목사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의존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대단히 힘듭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신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왕국을 세우시는 일을 기록합니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권능과 위엄을 보여 주시려고 온 우주와 땅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왕국을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궤계로 사람은 타락하여 죄를 짓고 세상 왕국의 통치권을 마귀에게 내주었고(눅4:5-6) 그 이후로 마귀는 이 세상의 신으로, 통치자로 지난 6,000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멸할 여자의 씨, 즉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로(창3:15) 아담이 망쳐 놓은 왕국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운영해 오시면서 때가 충만히 차자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의 교회 시대가 끝나면 그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 땅에 1,000년 동안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왕국을 세우심으로써(계20:1-10)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에서 세우시려 했던 왕국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런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창조물에게 알리려 하시며 이런 웅장한 계획 속에 사람의 구원과 마귀의 파멸 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는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왕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왕국이 오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카톨릭교도들과 거기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형제들 그리고 이 중에서 특별히 칼빈주의자들은 **그런 왕국이 실제로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 이것은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라고 불리는데 <위키백과>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천년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하면서 예수께서 땅에 재림하여 천년 왕국을 물리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이론의 추종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이 6번이나 언급하는 1,000년은 상징적 숫자이지 문자적으로 수용할 숫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교회 시대를 통해 이미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가 영적으로 실행되고 있으며 최후 심판 때에 그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세상의 끝이 점점 더 다가오면서 이스라엘이 중동의 팔레스타인 땅, 즉 가나안 땅에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려 하는데도 여전히 교회가 왕국이라고 주장하며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이 기록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목사들과 신학자들 또 그들로 인해 무지 속에 빠져 있는 성도들을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구약 성경의 기록대로 저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에 돌아옴으로써 이스라엘 대체신학을 가르치는 칼빈주의는 이미 그 해에 종말을 고하였어야 하지만 오히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청교도 신학, 개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바울을 버려두고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라고 말하며 칼빈과 그의 직계 스승인 어거스틴 탐구에 푹 빠진 목사들을 보면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철저한 로마 카톨릭교도인 어거스틴, 그것도 천주교의 비성경적 교리들을 확립한 공로로 천주교의 대표 박사라 불리는 인물을 탐구하기 위해 ‘어거스틴 연구회’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 애처롭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도랑에 빠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일이 지금 이 시간에도 칼빈주의라는 눈가리개로 눈이 가려져서 성경을 바르게 보지 못한 채 “어거스틴과 칼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외치는 목사들과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완벽하게 무시하고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은 겸손해지는 길이라고 믿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잘 모르기 때문에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는 말을 들어야 할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칼빈주의 시스템에 있음을 파악하고 이런 나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목사로서 어쩔 수 없이 칼빈주의/개혁주의라는 ‘인본주의 신정 국가 통치 철학 시스템’을 분석하고 바르게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번역/편집하여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베버(Otto Weber, 1902-1966)의 「칼빈의 교회관」에 나와 있듯이,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17세기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는 신정 정치라는 통치 사상이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4세기경부터 로마 카톨릭교회가 형성되면서 존재한 ‘기독교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시)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인데 이 개념의 핵심은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어 교회가 국가를 통치하거나 모든 국민들이 국가가 공인한 신앙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 현시대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이런 시스템은 보통 ‘정교일치’ 시스템이라고 불린다.)
종교/정치적으로 이런 국가는 ‘교회 국가’(Church State)라고 불리며 이런 국가의 교회는 ‘국가 교회’(State Church)라고 불립니다. 칼빈주의는 바로 이런 국가 교회의 신정 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체주의 국가 통치 철학’입니다. 즉 종교 개혁 당시 칼빈과 개혁자들은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신약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교회를 통해 구약의 신권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 시대에 편견 없이 신약 성경을 읽는 신자라면 누구라도 교회는 그와 같은 신정 정치 국가 체제가 아니며 그런 체제가 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이라는 사람이 그 시대의 조류에 따라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만든 이런 철학은 이 자유의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배설물같이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 성경의 단순함을 버리고 교묘한 궤변으로 가득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같은 책에 성경과 동등한 권위 혹은 그 이상의 권위를 부여하기에 많은 성도들이 올바른 교리의 부재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 체계가 소위 ‘다섯 솔라’라 불리는 주장과 합치된다고 주장합니다.
1.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
2.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3. ‘Sola Gratia’(오직 은혜): 구원은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거저 주어진다.
4. ‘Sola Fide’(오직 믿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5.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전혀 없으므로 이 모든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간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오직 성경대로 오직 믿음에 의해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다섯 솔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이런 위대한 ‘다섯 솔라’를 대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심장이 뛰지 않습니까?
그런데 총론을 떠나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칼빈주의자들의 ‘다섯 솔라’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거나 이해하는 ‘다섯 솔라’가 아니라 칼빈이 해석한 ‘다섯 솔라’입니다.
1. 칼빈주의의 ‘오직 성경’: 성경이 있다고 해서 ‘오직 성경’이라는 주장이 삶과 믿음에서 구현되지는 않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구분하지 않고 은혜와 율법을 혼합하여 ‘로드십 구원’(Lordship salvation)같은,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실 사이비 이단들도 다 성경대로 믿고 행한다고 주장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여 유대인 조상들이나 유대인들이 멜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오직 성경’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구약과 신약을 바르게 나누어 신약의 교리를 제대로 전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너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였습니다(딤후2:15). 성경 말씀의 적용 시대를 구분하지 못하면 성경 자체가 성도를 얽어매는 속박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 시대는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인데(갈4:4-5, 히9:16-17) 대부분의 목사들이 십자가 사건 이전에 예수님이 말씀 선포하던 때를 신약 시대로 이해하기에 성도들은 율법의 속박 아래로 들어갑니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 예가 바로 칼빈주의/개혁주의입니다.
2. 칼빈주의의 ‘오직 그리스도’: 칼빈주의의 그리스도는 신약 성경이 알지 못하는 무자비한 그리스도입니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거나 고문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도 생각하거나 실행하신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분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보시며 그들이 알지 못해서 이 일을 하니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그리스도께서는 창녀와 세리같이 세상 법으로도 정죄받을 상황에 있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지성인으로 여기며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고 정죄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이 땅을 통치한다고 한 번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재림하셔서 친히 왕국을 세우시는 것이 성경의 교리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칼빈주의의 그리스도는 신약 성경의 그리스도와 매우 많이 다릅니다.
3. 칼빈주의의 ‘오직 은혜’: 칼빈주의의 하나님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은혜를 주셔서 먼저 다시 태어나게 하고 또 복음을 받아들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반면에 그 동일한 하나님은 지옥 불의 정죄를 받도록 예정하신 자들에게는 아무리 그들이 복음을 믿으려 해도, 은혜를 받으려 해도 냉정하게 은혜 베푸시기를 거부하는 분이십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극도로 무자비하신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은혜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좋은 것이라 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공평과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칼빈주의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공평과 공의가 없는 은혜로서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매우 많이 다릅니다.
4. 칼빈주의의 ‘오직 믿음’: 루터 이후의 프로테스탄트들의 믿음은 한마디로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의’ 즉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는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칼빈주의의 믿음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시는 믿음입니다. 칼빈주의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강권적으로 그 믿음이 오게 되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 반대에 속한 자들은 아무리 믿고자 노력을 하고 알고자 노력을 해도 결코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믿음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쇳덩어리 로봇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되어야만 신권 통치가 가능하므로 칼빈은 사람을 그런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5. 칼빈주의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모든 일에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사람의 속성 혹은 본성을 왜곡하면서까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 신자들은 이것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salvation)과 구속(redemption)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행위’(works)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의 자유 의지 능력을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온 인류는 죄로 인해 노예 시장에 팔려 나갔습니다.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이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속하시기5)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그분께서 자신의 피값으로 온 인류를 사게 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인간이 기여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선물을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주시는데 사람들 중에서 얼마는 자기의 의지를 동원하여 믿음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여 구원받고 나머지는 믿음이 없어, 불신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받지 못합니다. 즉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칼빈주의 틀에 얽매이기 전에 정상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정상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누구나 다 이런 명백한 결론에 다다를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선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인 지정의를 동원하여 사람이 복음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믿는 것은 결코 ‘행위’가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롬4:5). 그러하기에 구원과 관련해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신학자나 목사의 말이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그 말이 정말로 문자 그대로 그들이 말한 바를 의미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심지어 베레아 사람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을 때 그의 말이 성경에 합치하는지 여부를 꼼꼼히 살펴봄으로써 고귀한 자들이라 불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행17:11).
이 책은 칼빈주의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어두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성경과 역사의 진리를 보여 줌으로써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올바른 신약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저술되었습니다.
1장과 2장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시대와 삶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구체적 행적을 제시함으로써 칼빈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지금까지 국내에도 칼빈주의 비평서들이 더러 있었지만 이런 책들은 거의 대부분 시작부터 끝까지 성경 구절을 들어가며 칼빈주의 신학의 오류만 비판합니다. 그러나 실용 학문인 공학을 전공한 저는 일단 그런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과 그 이론이 적용된 실례를 보여 줌으로써 이런 이론의 허구와 폐해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칼빈주의는 한마디로 어거스틴주의이고 카톨릭 종교 시스템을 개혁하려 한 종교적 가르침이므로 성경의 복음이 아닙니다. 천주교의 어거스틴주의가 조금 개혁된다고 해도 어떻게 그것이 참된 복음이 될 수 있습니까?
3장은 네팔에서 선교하시는 클라우드(David Cloud) 선교사가 지은 「칼빈주의 비평」(Calvinism Debate)을 번역한 것입니다.(http://www.wayoflife.org/free_ebooks/the_calvinism_debate.php) 클라우드 선교사는 성경대로 믿는 독립침례교회 신자이고 그의 웹사이트에는 주옥 같은 글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는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칼빈주의 비평」처럼 성도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무료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https://www.wayoflife.org/free_ebooks)
4장은 20세기 최고의 크리스천 변증가 중 한 사람인 가이슬러(Norman Geisler) 교수가 왜 자기가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믿지 않는가를 요약한 것입니다. 가이슬러는 미국 최고의 신학교로 알려진 댈러스 신학교에서 조직 신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고 다양한 주제로 수많은 책을 저술한 크리스천입니다.
5장은 미국 미들타운성경교회의 젤러(George Zeller) 목사가 쓴 ‘개혁주의 신학의 위험들’이라는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http://middletownbiblechurch.org/doctrine/dangerso.htm) 미들타운성경교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성경 공부 자료들을 교회 웹사이트에 올려놓았고 아무나 무료로 다운받아 공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해석과 견해 차이에 따라 이견이 다소 있을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교회의 자료들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6장은 미들타운 성경교회의 젤러가 쓴 로드십 구원(Lordship salvation) 반박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7장은 14년 동안 칼빈주의에 빠져 있던 니켈(Brenda Nickel)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은 간증입니다.
8장은 헌트(Dave Hunt)가 지은 「대체 이게 무슨 사랑인가?」(What Love Is This?)에서 칼빈주의에 빠졌다가 벗어난 사람의 예를 다룬 부분을 번역한 것입니다.(http://www.amazon.com에서 ‘What Love Is This?’를 치면 데이브 헌트의 유명한 책이 나온다.) 7장과 8장의 예를 통해 우리는 칼빈주의가 어떻게 사람을 혼동에 빠뜨려 고생하게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573쪽에 달하는 헌트의 책은 많은 참고 문헌을 동원하여 칼빈주의 역사와 오류의 실행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실로 귀중한 교과서입니다.
다음은 헌트가 그 책을 기록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동일한 목적으로 이 책을 편집하였기에 그의 글을 소개합니다.
제 주변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칼빈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성경의 하나님이 칼빈주의의 하나님처럼 무자비하고 불공평한 분이라면 그분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칼빈주의의 주장을 반박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기를 원치 않아서 멸망 받도록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기회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나 목사라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임을 인정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서(롬1:16)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합니다(눅2:10).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어떻게 성경적 교리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런 것을 믿어 온 칼빈주의자들이 이 책을 통해 변화되어 어떤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 복음을 이해하고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는 하나님을 머릿속에서 내버리고, 성경에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바르게 믿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과거에 얼마나 많은 불신자들이 칼빈주의의 왜곡된 신념으로 인해 하나님을 거부했는지 아십니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이 좋은 복음, 즉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를 원합니다.
롬10:9-13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니 이는 만민에게 동일한 주께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심이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
계22:17 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하더라. 듣는 자도 "오라."말하게 하고 또 목마른 자도 오게 하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시게 할지어다.
계22: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9장에는 칼빈주의 비평의 총결론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칼빈주의 그 자체를 비판할 뿐이며 그렇게 믿는 분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성경과 그 해석이 하나님의 속성을 왜곡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위적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분들이 그리스도와 성경이 주는 해방의 자유를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
갈5: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으니 해방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속박의 멍에에 얽매이지 말라.
부록에는 클라렌스 라킨이 지은 「성경 바로 보기」(Rightly Dividing The Word)에서 율법과 은혜를 다루는 17장, 사람의 두 본성을 다루는 19장,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상태를 다루는 20장 그리고 선택과 자유 의지를 다루는 22장을 실었습니다.
이정원 자매님께서 클라우드의 책과 헌트의 책을, 남윤수 자매님께서 젤러의 글을 번역해 주셨고 태은상 자매님께서 표지를 만들어 주셨으며 김지훈 형제님과 김애리 자매님, 그리고 여러 성도님들이 꼼꼼히 교정해 주셨습니다. 제가 여러 자료들을 참조하여 1-2장을 기록하고 5장과 7장을 번역하였으며 부록의 어거스틴과 루터 부분을 번역하고 기록하였습니다.
꼼꼼하고 의지가 강철같이 투철했던 칼빈은 그가 살던 종교 개혁 시대의 시대정신에 사로잡혀 당시 세상 변화를 보면서 성경과 자기 시대를 합치시키려는 불굴의 시도를 하며 많은 저서에 자기의 사상을 담았습니다. 만일 칼빈이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허락된 21세기에 살았다면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신약 시대의 원리로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약 교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경 신자로 살아갔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칼빈의 오류들이 그 시대가 만든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 시대의 오류들을 그 시대로 밀어 놓고 영혼의 자유가 주어진 이 시대에 마음 놓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영께서 물 흘러가듯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보여 주시는 교리들에 순종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4-500년 전에 유행하던 시대정신과 그 시대의 유물을 성경 위에 두면서 지금도 심혈을 기울여 그것을 지키려는 시도는 예수님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하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청교도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은 다 종교 개혁 시대의 낡은 유물입니다. 그래서 이미 자유정신이 지배하는 이 시대와 또 신약 성경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칼빈주의자들이 늘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사람이나 사람이 만든 체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만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작은 책을 통해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배제하고 오직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이 한국 교회 안에 많이 생기기를 원합니다.
2023년 1월 사랑침례교회 목사 정동수
'칼빈주의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체⑤ (1) | 2025.04.02 |
---|---|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제④ (2) | 2025.04.01 |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체③ (3) | 2025.03.31 |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체② (3) | 2025.03.30 |
칼빈주의 비평 - 어거스틴의 실체① (1) | 2025.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