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사상을 검증하려면 무엇보다도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의 사상을 먼저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다수 학자들이 칼빈의 사상은 어거스틴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증언하므로 우리는 먼저 어거스틴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장로교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주의 교리 체계는 ‘어거스틴주의의 대부흥’이라고 말하였다. 칼빈주의/개혁주의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칼빈사상의 대부분이 어거스틴에게서 왔음을 인정할 것이다.
칼빈의 신정 정치 국가 교회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 즉 칼빈주의의 원조는 누구인가? <위키백과>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Augustinian_Calvinism’이라는 항목에 정확히 나와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이 내 속에 전적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내가 내 믿음의 고백을 쓰기 원한다면 나 자신이 완전히 만족해하면서 완벽히 충실하게 그의 책들에서 자료를 얻어 쓸 수 있을 것이다(「칼빈의 칼빈주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한 논문」(Calvin's Calvinism, A Treatise on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 1987, Henry Cole.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p. 3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칼빈이 어거스틴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자기를 칼빈주의자가 아니라 어거스틴주의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칼빈주의자들은 ‘어거스틴-칼빈주의자’로 간주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 칼빈주의는 특별히 어거스틴주의라 불려 왔다.
어거스틴은 생애의 마지막 후반부 18년 동안 어거스틴-칼빈주의 5대 강령의 변형된 것들을 가르쳤다. 그전에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숙명론을 대적하기 위해 믿음에 대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하는 ‘전통적 기독교 관점’을 가르쳤다. 그는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에 10년 정도 마니교에 심취해 있었다. 마니교에서는 신이 일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구원에 이를 자들을 선택하고(택자) 정죄받을 자들(비택자)을 선택한다.
어거스틴 이전의 교회 교부들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예정은 이교도들의 교리라고 하면서 이를 반박하였다. 어거스틴 전에 있던 50명의 초기 크리스천 저자들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숙명론에 대한 논쟁을 기록하였는데 이들 50명은 전부 다 100% 모두 스토아 철학, 영지주의, 마니교의 숙명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자유 의지를 지지하였다. 심지어 어거스틴도 주후 412년 이전에는 무려 26년 동안 이러한 숙명론을 대적하는 전통적 기독교 신학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는 펠라기우스 추종자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틀어서 영지주의와 마니교의 관점을 따랐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먼저 은혜를 주입하지 않으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은혜는 곧 구원하는 믿음이 되고 만다(즉 하나님이 먼저 구원해야 믿을 수 있다는 칼빈주의자들의 교리).
유아 세례와 관련이 있는 어거스틴의 전적 타락과 무조건적 선택 교리 어거스틴이 자기의 신념을 바꾼 가장 큰 이유는 펠라기우스 추종자들과의 논쟁 때문이었다. 주후 200년경에 살았던 터툴리안(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220)은 유아 세례에 대해 처음 언급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까지는 세례나 침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유아 세례를 반박하였다.
사실 주후 400년까지도 아이들에게 유아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한 합의가 교회 내에 전혀 없었다. 그런데 펠라기우스 추종자들은 유아 세례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유아 세례가 영원한 정죄를 수반하는 아담의 원죄를 제거할 수 있다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가르침이다.]
유아 세례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이다.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신이 우주의 모든 것을 미세한 것까지 다 미리 정해서 간섭한다는 개념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 나무에서 이파리가 떨어지면 땅의 어디로 떨어지는지, 수탉들이 싸울 때 목의 근육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도 다 정해져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책 「섭리」(Providence)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유아 세례 대상인 아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그 부모들이 주교들에게 찾아가는 것을 도와주신다거나 혹은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유아 세례를 통해 이 아이들은 영원한 정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서 유아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의 경우, 그 부모를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막아서 그 아이들은 유아 세례를 받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이 아이들은 유아 세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지옥 정죄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천주교 내에서도 논쟁이 있고 학자들은 이런 개념이 플라톤주의, 스토아학파, 마니교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한다.
그 뒤 어거스틴은 이 개념을 유아에서 어른으로 확장하였다. 유아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어거스틴은 이 개념을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반드시 예정하셔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 즉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믿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영지주의에 물든 마니교에서 빌려온 것이다. 마니교는 낙태나 유산된 아이나 유아 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는 지옥 정죄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니교 신자들의 신은 믿음과 은혜를 먼저 사람에게 주입함으로써 사람의 죽어 있는 의지를 부활시켜야만 하였다. 어거스틴은 전적 타락의 원인을 아담의 죄라고 바꾸었지만 여전히 스토아학파, 마니교, 신플라톤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이 은혜와 믿음을 주입하기 전까지는 사람의 의지는 죽어 있다는 가르침을 유지하였다. [즉 그는 전적으로 숙명론을 믿었고 칼빈은 이것을 그대로 복사하였다.]
결론: 어거스틴이 실제로 칼빈주의 5대 강령인 TULIP을 발명했으므로 ‘어거스틴-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여전히 적합하다. 어거스틴의 5대 강령은 지금도 여전히 개혁신학 내부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위키백과> 말고도 유명한 칼빈주의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한다.
워필드: 칼빈이 가르친 교리 시스템은 어거스틴주의 바로 그것이며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었다. (The system of doctrine taught by Calvin is just the Augustinianism common to the whole body of the Reformers.)
존 파이퍼: 루터와 칼빈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스펄전: 칼빈 자신은 주로 어거스틴의 글들에서 칼빈주의를 유도해 냈다.
그렇다면 칼빈이 어거스틴을 그대로 답습한 이유는 무엇일까?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다 로마 카톨릭교회 출신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를 세워 준 네 명의 박사 중 한 명이고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있으므로 어거스틴과 그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루터, 칼빈 등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카톨릭 시스템에 젖어 있던 종교 개혁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들이 회심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젊은 시절에 뿌리 깊게 형성된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것들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들의 시대정신이 바로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카톨릭교회의 신학과 전통들을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루터 등이 일으킨 사건을 ‘종교 개혁’이라고 하지만 영어로 이것은 ‘종교’라는 단어가 없이 단순히 ‘Reformation’이라고 불린다. 대다수가 알고 있듯이 이 말은 ‘reform’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리폼’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이 쓰이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물건을 리폼해서 쓴다고 하고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곳을 ‘리폼샵’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죽옷을 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행이 바뀌면 새 시대의 유행에 따라 리폼샵에 그것을 가져다준다. 그러면 그곳에서는 원래의 가죽은 그대로 두고 형태만 유행에 따라 바꾸어 준다. 그것이 바로 리폼이다.
16세기 종교 개혁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카톨릭교회라는 종교의 본질은 거의 그대로 두고 형태만 리폼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종교 개혁 이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대다수 유럽 사람들은 카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세상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피우고 전쟁까지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기독교라는 이름이 붙은 종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종교인들이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할 수 있도록 교리적 기초를 놓은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고 칼빈은 그의 제자로서 성실하게 종교를 개혁해서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 사상의 대부분이 어거스틴에게서 나왔다고 객관적 증거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므로 칼빈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어거스틴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를 고찰하고 그의 신학(엄밀히는 황제나 교황의 세상 국가 통치 철학)의 원리와 중심 사상을 살피려 한다.
1. 어거스틴 당시의 시대 상황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년)은 4세기에 알제리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로 서구 교회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서구의 모든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라고 한다면, 서구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에 대한 주석이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서구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그의 공헌은 지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히에로니무스(제롬), 그레고리우스, 암브로스(암브로시우스) 등과 함께 서방(카톨릭)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이며, 아프리카의 북부 도시 히포에서 주교로 활동하였으므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카톨릭교회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축일은 그의 사망일인 8월 28일이다. 그의 상징물은 주교관과 목장·책·펜이며 그는 인쇄공과 신학자의 수호성인이다.
** 교부 - 앞으로 전개되는 논의를 통해 알 수 있지만 ‘교회의 아버지’를 뜻하는 ‘교부’라는 호칭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카톨릭교회의 성인들로서 신약 성경의 믿음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실 그들은 정확하게 ‘카톨릭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려야 한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교회사 - 특히 종교 개혁 이전의 16세기까지의 교회사 - 는 엄밀한 의미에서 카톨릭교회가 포장한 ‘카톨릭교회사’이다.
** 히포의 어거스틴 -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어거스틴은 콘스탄틴 황제가 세운 국가 교회의 통치 규범을 확립하고 무력으로 성경 신자들을 제압할 것을 규정한 인물이다. 그는 마리아를 숭배하고 연옥 교리를 창안하였으며 사람의 자유 의지를 전적으로 부인하였다.
어거스틴은 낡은 세계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던 격동의 변천기에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이 그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통치되다가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재통일되던 해인 354년에 태어났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자 그의 사촌인 유리아누스가 왕위에 올라 2년 정도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 그 뒤 몇 명의 황제가 제국을 다스린 뒤 395년에 테오도시우스가 죽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로써 로마 제국의 위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바로 이때에 북방의 여러 민족이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대량 유입되어 왔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알려진 이 침입으로 인해 유럽 정치 무대의 주인공이 바뀔 위기에 놓였다. 훈족, 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등의 연쇄적 이동과 침입으로 인해 로마 제국은 세력을 잃게 되었고 마침내 서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인 476년에 완전히 멸망하였으며 정치권력은 게르만족의 손에 넘겨졌다. 이로써 5세기의 교회 - 엄밀한 의미에서 카톨릭교회 - 는 게르만 민족의 이교 문화에 맞서며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기독교적 문화를 보존/발전시켜야 할 사명을 떠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어거스틴이라는 인물이 태어나 **‘로마 카톨릭교회’라는 비성경적 교회의 기초를 확고히 놓게 되었다.
** 19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알려진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사람은 주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라.”(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 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20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목사는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로마 카톨릭 시스템을 ‘마귀의 걸작품’이라고 불렀다.
2.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어거스틴 자신의 저서인 「고백록」과 그의 제자인 포시디우스가 쓴 전기를 통해 자세히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은 354년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의 소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회가 전반적으로 혼혈 결혼을 허용하였으므로 그는 이교도 아버지인 파트리키우스와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니카가 어거스틴을 교육했으나 어렸을 때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고향과 인근 도시 마다우라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뒤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370년경 집안 사정이 나아지자 그의 아버지는 16살의 어거스틴을 카르타고로 보내 수사학을 배우도록 했다. 카르타고에서 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자기와 같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도로서 10여 년을 지내며 마니교를 지지하여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했다. 또 371년에 17세이던 그는 한 젊은 여인과 동거를 시작하여 14년 동안 함께 살면서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을 낳기도 하였다. 자기 아들의 이러한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던 모니카는 아들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 마니교는 3세기에 ‘빛의 사도’로 알려진 예언자 마니(Mani, 210?-276)가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마니의 활동 초기에 그것은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이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고유한 종교로 자리 잡았다.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붓다, 예수, 조로아스터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또한 종교적 진리는 한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 여겨 그는 선교 초기부터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니교에는 간명한 교의(敎義)와 예배 양식, 엄격한 도덕 계율이 있었다. 그들의 교의는 빛과 선 그리고 어둠과 악의 이원론과 진리에 대한 영적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영지주의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다른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처럼 마니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지혜가 이를 해방한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은 신화를 통해 설명된다. 신화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간음·출산·소유·경작·추수·육식·음주 등의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 <두산백과>
시간이 지나면서 어거스틴은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느껴 소아시아와 이집트 등에서 전래된 종교 사상과 신비주의 철학을 사변적으로 종합한 이원론적 세계관의 신플라톤주의의 신봉자가 되었다가 마니교도 동료의 추천으로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그는 그 당시 밀라노의 주교인 암브로스(혹은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of Milan, 340-397)를 만났다. 암브로스 주교는 어거스틴과 같이 수사학이나 철학에 능한 언변의 달인으로 타협의 명수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그의 설교대로 따르기로 결심했지만 한동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고 결국 386년 여름의 부활 주일에 암브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 이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카톨릭교회와 여러 개신교회에서는 사람이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는 것으로 가르치며(보통 ‘세례 중생’ 교리라 함) 세례를 구원과 동일시한다.
어거스틴은 이듬해 낙향하여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 돌아온 그는 동료들과 스스로 수도회를 설립하는 등 수도사 생활에 전념하였다.
391년에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 과거에 자기가 몸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을 하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며 예정론을 반대하던 펠라기우스 추종자들을 단호히 대적하였다. 펠라기우스가 어거스틴의 예정론이 마니교나 플라톤주의의 숙명론과 같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고 하자 이에 어거스틴과 그의 동료들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도덕적으로 완전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펠라기우스를 대적한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후대에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 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발레리우스 주교가 죽자 어거스틴은 395년에 히포 교구의 부주교가 되었다가 곧바로 주교가 되어 죽기까지 평생 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일하였다. 427년에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쳐들어와서 히포를 점령하기 전인 430년에 그는 76세의 나이로 열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 세속 백과사전과 역사서 그리고 종교 사전 등에서 언급되는 교회 - 특히 16세기 이전의 교회 - 는 다른 언급이 없는 한 로마 카톨릭교회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자유 교회’(Free church)가 아니라 국가의 지배를 받는 ‘국가 교회’(State church)이다.
어거스틴은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이 저서들을 통하여 ‘사람의 전적 타락’,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 및 하나님의 통치의 불변성’ 등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인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irresistible)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사상을 확립하고 이용하여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신권 통치 국가 혹은 그런 국가의 교회에 종속된 인간, 즉 교회의 권위에 충성해야만 하는 로봇 형태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에 따르면, 로봇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먼저 다시 태어나야 하고 그 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항력적 믿음을 받아야 구원자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그래야 그는 로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로봇 조절 프로그램 혹은 리모컨에 의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구원과 관련된 이 모든 일은 오직 [카톨릭] 교회와 교회의 제사장들이 베푸는 **성사(聖事)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성사(sacrament)란 카톨릭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종교 의식을 뜻하며 여기에는 유아 세례, 견진, 고해(고백), 성체(미사), 신품, 혼인, 종부 성사가 있다. 이 중에서 성체 성사는 미사 때 제사장(신부)에 의해 축성되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의식을 뜻하며 이를 영성체(領聖體)라고 한다. 성체 성사는 일곱 성사 중 가장 큰 성사로 다른 성사들은 성체 성사를 위한 준비이고 영성체로 완성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래서 이런 국가 교회에 예속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교회를 그리스도가 주인인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니라 교회가 주인인 **‘교회교’(Churchianity)라고 부른다.
**교회교 - 교회가 국가와 하나가 되거나 혹은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며 국민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국가 교회’라고 하며 기독교는 이와 정반대의 개념, 즉 예수님께서 친히 마22:21에서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시며 가르쳐 주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지지하므로 앞으로 이 책에서는 ‘국가 교회’를 기독교의 ‘자유 교회’와 대비되는 말로 ‘교회교’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거스틴의 ‘교회교’ 사상은 결국 로마 카톨릭교회가 세상 국가들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침이 되었고 중세에 예수님의 자유 교회를 억누르는 무기로 이용되다가 1,200년이 흐른 뒤에는 마침내 개혁 교회 및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그대로 반영되어 제네바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어거스틴의 삶과 저서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로마 제국과 기독교 그리고 어거스틴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틴 황제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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