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거스틴과 국가 교회
콘스탄틴이 세운 ‘국가와 교회의 일치’는 결국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Theocracy)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신정 정치란 신성한 주권을 갖는 신이 임명한 대리자에 의한 정치를 말하며 ‘신권 정치’(神權政治)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 <네이버 지식백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정 정치에서는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으며, 권력자의 명령은 곧 법이고 피지배자의 내면적 심정(心情)까지도 지배한다. 국가의 법은 신의 법 또는 명령이며 국법과 종교가 동일하다.… 이러한 정교일치의 동심원적 권력 지배는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모세가 건설한 신정 국가의 정치가 가장 전형적이다. 신정 정치는 고대 오리엔트, 이슬람 세계,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도 각 문화의 원형과 관계하여 독자적 형태를 보인다. 신정 정치의 **근대의 전형으로서는 칼빈(John Calvin)의 제네바 지배를 들 수 있고, 현대의 신정 정치로는 혁명 후의 이란 정부를 들 수 있다.
** 칼빈주의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칼빈의 제네바 통치가 신정 정치라는 것과 그의 신정 정치 사상이 어거스틴을 통해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칼빈의 제네바 통치는 우리가 현시대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중동과 파키스탄의 이슬람 무력 통치’와 같거나 그 이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칼빈의 5대 강령’(TULIP)으로 잘 알려진 칼빈주의 신학이다. 이런 측면에서 <네이버 지식백과>라는 세속 사전이 칼빈의 제네바 통치를 1979년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탄생시킨 이란 혁명 이후에 이란 정부가 시행하는 신정 정치와 같은 것으로 분류한 것은 객관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성도들은 잠에서 깨어나 이 같은 역사의 진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천주교회 같은 교회교의 속박이나 목사나 교회의 독재에 대항하며 성경에 입각한 바른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콘스탄틴과 그 이후의 로마 황제들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으며 바로 이 일을 위해 이론을 제공한 사람이 어거스틴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교회의 황제인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상 왕국들까지 다스리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통치 모델을 완성하였다. 어거스틴의 ‘국가 교회’ 사상은 1,000년 이상 중세 시대를 지배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칼빈이나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도 세력을 떨치며 신정 국가를 세우는 데 초석이 되었다.
‘선진국들의 정교 관계’라는 글에서 이범성 교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혹은 정교일치(政敎一致) 시스템인 국가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약 시대의 전통은 제정이 일치되거나 적어도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형태를 취했지만 신약 시대 복음 전도자들의 전통은 정교가 분리된 형태를 취했다.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대로 제자들의 의견이 되었고 정부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도 정교 유착이 아니라 정교분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확산되던 4세기 초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손자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화했고 이로써 정교 유착(신정 정치) 시대가 왔다.
종교 개혁을 맞으면서 로마 카톨릭 교권에 대한 민족 국가들의 반대는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일치의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것은 교황과 황제의 제국적 정교일치를 개신교 주교들과 왕 혹은 성주들의 정교일치로 전환한 모양에 불과하다.
여전히, 더욱 밀접하게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했고 국가는 교회의 인정을 필요로 하였다. 루터는 독일에서 정부의 권력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정부와 교회의 선한 역할 분담론을 선전했으며 칼빈은 스위스에서 교회의 적극적 정부 활동을 장려했다. 한편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한 영국 국교회의 탄생은 로마 교황청 대신에 정부와 더욱 밀착된 정교일치를 가져왔다. 종교 개혁은 정교분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형태의 정교 유착에 불과하다.
콘스탄틴과 어거스틴을 거치면서 신정 정치 모델이 확립된 이후로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유럽의 모든 국가는 오직 카톨릭교회만을 국가의 교회로 인정하였고 천주교 외의 다른 믿음은 모두 이단 교리로 정죄받았다. 반면에 동유럽은 정교회(Orthodox Church)가 국가 교회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긴 루터교 역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삼국의 국가 교회가 되었고 칼빈의 장로교는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국가 교회가 되었으며 헨리 8세가 세운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는 잉글랜드의 국가 교회가 되고 말았다.
** 루터나 칼빈, 츠빙글리 등이 이룬 ‘종교 개혁’(Reformation)은 말 그대로 로마 카톨릭 종교의 틀 안에서 항거하며 개혁을 이루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래서 이들이 세운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거의 대부분 카톨릭교회의 것들을 답습하고 있다(유아 세례, 성직자 계급 체계, 예배당의 성전화(聖殿化), 카톨릭교회와의 에큐메니컬 종교 통합 등). 사실 역사는 인간의 종교가 절대로 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유대교라는 종교(행26:5; 갈1:13-14) 안에 갇혀 있을 때 바울은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처럼 종교와 종교인은 대단히 무섭다. 종교는 성경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갈1:14). 이러한 종교인들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 서기관 등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할 때 기독교는 성경적 의미에서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유대교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인 목사, 교회 혹은 성도들을 조심해야 한다. 종교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교단 신학과 교회나 목사의 가르침을 성경의 진리 위에 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가지 못하며 결국 이들은 죽을 때까지 종교 생활을 하다가 정죄를 받게 된다. 우리 성도들은 베레아 사람들처럼 성경 말씀이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늘 살피는 ‘성경 신자’(Bible believer)가 되어야 한다. 유일하게 그것만이 종교의 틀에서 우리를 구출할 수 있다.
21세기에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는 국가에 사는 우리로서는 국가 교회에서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국가가 지정해 주는 교회에만 다녀야 하고 거기서 지정해 주는 믿음만을 따라야 하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1,000년 이상 지속된 중세 암흑시대에 양심의 자유를 찾기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성경대로 살고자 애를 쓴 무리들이 있어서 성경적 믿음이 전수되고 결국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헌법을 통해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모두에게 주어지게 되었음에 우리는 큰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콘스탄틴의 국가 교회 확립 이후로 약 1,400년 만에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를 허락한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헌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교회 성도들이 목숨을 버리며 국가 교회와 투쟁해서 얻은 고통의 산물이다.
국가 교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성경을 재해석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Christ killers)로 규정하고 구약 성경의 실제 아브라함의 자손들, 즉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복을 신약 시대의 교회가 대신 차지한다는 이론 곧 **‘이스라엘 대체 신학’을 정립하였다.21) 이 일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성경을 영적으로/비유적으로 해석하여야 하는데 어거스틴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들의 비유 해석을 도입하여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
** 이스라엘 대체신학 - 초기 교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신약)이 모세 언약, 즉 옛 언약(구약)을 대체하고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을 대체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역사적으로 카톨릭교회는 ‘자신들이 유대교의 완성이며 성취’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대인 대학살과 1948년의 이스라엘 국가 형성 이후로 주류 신학자들과 교단들은 이런 관점을 거부하고 있다. <위키백과> 한편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추천사가 붙은 「이스라엘과 대체 신학」(존 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이라는 책이 나왔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이후 멈추었던 하나님의 섭리의 시계 바늘을 다시 돌아가게 하면서 인류 역사를 마지막 정점으로 움직이게 하였다. 그 결과 지난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상징적으로 이해하였던 기독교 신학의 관행이 허물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7.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그리스 제국은 넷으로 분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의 중심지가 되어 헬레니즘이라는 이교도 문화를 온 세상에 파급시키는 중심 도시가 되었다. 거기에는 주전 300년경부터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떠나 그리스 문화와 히브리 문화를 적당히 혼합한 채 이교도들과 더불어 삶을 공유하려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주전 3세기부터 고대 그리스 시인이나 작가들의 본문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플라톤의 철학과 구약 성경을 접목한 인물이다. 초기 크리스천들 중 어떤 이들은 필로의 철학을 신약 성경에 적용해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만들었다.
** 영지주의(Gnosticism)는 초대 교회가 겪은 주요 이단 중 하나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유대교 전통보다는 그리스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자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假現說)로 이해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입은 육신은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육을 영의 감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영을 가두고 있는 육을 제어하고 영을 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를 실행하였다. 또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한 지식(영지)을 추구하였으며, 예수는 그 지식을 매개하는 중재자로 생각하였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지식을 중시하는 것은 영지주의에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영지주의는 결코 통일된 운동이 아니었으며 지역과 지도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을 띠는 종교적 혼합주의의 특징을 다분히 보여 주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양태 안에는 항상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으며 영과 육을 구별하는 금욕주의적 특징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기독교의 교파」, 남병두 저, 2006, 살림출판사).
알렉산드리아는 이러한 ‘영지주의’의 중심지였고 그래서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 등의 유명한 영지주의자가 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다. 현대 성경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카톨릭교회의 ‘70인역’(Septuagint)이라는 그리스어 구약 성경 역본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배도한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하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으므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같다는 그릇된 가정하에 자신들의 해석 체계를 정립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란 죄명을 씌운 카톨릭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대인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도 이를 시행하고 있다. [이것은 보통 반셈족주의(Anti-Semitism)로 불린다.]
신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 180년경에 펜타누스(Pantaenus, 200년 사망)가 복음 선포자와 선교사들을 훈련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교리 학교를 설립했다. 19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가 이 학교를 인수했으며 결국 그는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창설자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이 기독교의 하녀라고 믿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다른 것과 섞지 않고 순수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이교도들의 철학으로 옷 입혀서 전하기를 원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추론적이고 철학적이며 비유적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성경을 읽으며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신비한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이후에는 오리겐(Origen, 185-254년)이라는 배도한 인물이 나와 역시 성경을 **영해하고 성경 본문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하게 살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교사로서 크게 성공했다.
** 영해(靈解)란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비유로 푸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 요한계시록 4장 7절에 나오는 네 짐승을 네 복음서에 비유하면서 마태복음을 사자로, 마가복음을 송아지로, 누가복음을 사람으로, 요한복음을 독수리로 묘사했다. 영해를 따르면 모든 성경 구절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영해를 가장 널리 파급시킨 사람은 필로다. 유대인으로 신플라톤주의자인 필로는 성경의 모든 문자의 배후에는 어떤 신비한 뜻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필로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 실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를 성경에 적용하였다. 신천지를 비롯해서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소종파들(cults)은 성경을 비유적으로 영해하여 성도들을 유혹한다.
다음은 영해의 한 예이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보자.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하고 여리고는 세상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강도를 만난다. 우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한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포도즙과 기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여기서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피요, 기름은 성령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치료를 받아서 영혼의 상처를 고쳐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잘 치료받으려면 이 데나리온이 필요한데 이것은 신약과 구약이다. 강도 만난 자를 태우고 가는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를 말하므로 우리는 사복음서라는 짐승을 타고 가야 한다.”
그의 삶은 세르베루스 황제의 박해가 있던 주후 202년경에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했고 그의 가정은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1년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오리겐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가 창설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천재였으며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고 저술했고 또 영지주의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암브로스(Ambrose of Alexandria, 212-250)의 책들을 소장했다.24) 그는 또한 이교도로서 신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카스 밑에서 공부했고 매우 금욕적 삶을 살면서 신발도 신지 않고 맨땅에서 잤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세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 이 암브로스는 어거스틴의 스승 암브로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오리겐은 클레멘트의 제자로서 필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성경 본문이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 혹은 풍유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신비 혹은 풍유적 의미를 통해 진정한 해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셋째 의미는 상징적이며 은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성경 해석 방식을 ‘영해’라고 한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그리고 이교도들의 사상을 혼합하여 비유 해석(영해)이라는 오류를 만들어 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오리겐과 유세비우스는 성경 및 교회사 변개의 주범이다.
오리겐은 특히 성경 본문 부패의 장본인이다.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회사가 카톨릭 교회사이므로 대부분의 신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는 오리겐을 가리켜 ‘위대한 크리스천 학자요, 고대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던 신학자 중 하나’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리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다 콘스탄틴의 어용학자인 유세비우스의 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오리겐은 한때 그리스의 아테네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 이단자로 판명되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창조된 하나님이다.”라는 이단 교리를 퍼뜨렸다.
오리겐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로고스 교리’였다. 이 사상은 요한복음 1장 1-5절과 다른 기독교 저술 안에도 나타나 있는데 특히 오리겐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란 창조의 신적 원리와 이성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름이었는데 오리겐은 이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하였다. 그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이성을 가져다주는 존재, 즉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로고스’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실제로 이 땅에서 살며 가르치기도 하신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다. 이 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가 교리를 정립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오리겐은 콘스탄틴 황제의 문화 비서 역할을 하던 유세비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성경 본문 복사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유세비우스는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본문을 사용하려고 기독교의 모태가 된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대신에 이교도 교육과 철학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는 거기서 ‘학자들의 수정판’인 국지적 소수 본문을 얻었고 이것을 50개의 복사본으로 만들어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 하나가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된 ‘바티칸 사본’이며 이 사본은 NIV, 개역성경 등과 부패한 현대 역본들의 모체가 되었다.
오리겐과 유세비우스 이후에 알렉산드리아 철학은 암브로스라는 밀라노의 주교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비유 해석 체계를 근간으로 카톨릭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하였다. 암브로스는 340년 독일의 트리어에서 출생하였다. 부친과 사별한 후 그는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368년에 변호사가 되었으며 370년에는 북이탈리아 밀라노의 집정관이 되었다. 밀라노에 있을 때 그는 밀라노 성당의 주교 후계자 논쟁을 수습하면서 아리우스파와 카톨릭 양쪽의 신망을 얻어 374년에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교가 되었다. 암브로스는 믿음이 아니라 정치적 수완을 동원하여 국가 교회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국가의 수반인 황제를 교회 밑에 두려 하였다.
그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 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 놓은 첫 번째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교회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①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다 배제하였고 믿음의 영역에서 주교는 황제를 판단할 수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② 그는 국가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가에서의 반란 진압 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회(고해 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③ 그는 교회와 국가 간의 긴밀한 결속 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 확신하였다.
암브로스는 불굴의 의지와 절대적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카톨릭교회의 왕자였다. 그는 로마 제국과 앞으로 세워질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것들을 확립하였다.
① 국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과 투쟁하거나 논쟁하는 방법
② 오리겐과 필로처럼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기
③ 마리아의 무원죄(無原罪)를 주장하여 중세 마리아 숭배 기초 확립
④ 수호성인 만들기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암브로스를 존경하였으며 그는 설교를 통해 이단에 빠져 있던 어거스틴을 인도하여 카톨릭 신앙을 고백하게 했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책에서 모니카가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에서의 출세를 위해 이미 아들까지 낳고 동거 중인 그의 내연의 처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 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로마 교회 역사가들에 의해 미화되어 개신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에 빠뜨리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함으로써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했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다. 이 씨의 열매들은 첫 번째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에게 전달되며 로마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개신교 목사들은 성경에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며 이제는 ‘성경 메시지’ 대신 ‘카톨릭 미사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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