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창세기(1-11)

창세기 3장 20절 - 24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2. 20:39

20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부르니, 이는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였음이라.

아담이 여자의 이름 “이브”(히브리어 하바) 즉 “생명” 혹은 “생명을 주는”이라고 붙인 것을 주목하라. 이 구절은 불가사의한 구절이다. 이브는 아담의 죽음을 야기했고 그녀의 모든 자녀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채로 태어났다. 그녀의 첫아들은 살인자였으며 그녀는 자기 자신을 죽였다.(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다면 이 이름은 아무리 영적인 의미를 지녔다 할지라도 잘못선택된 것 같다. 만약 이 이름이 육체적인 생명만을 언급하는 것이라면 아담이 창세기 3장 이전에 에덴의 동산에서 다른 아이를 갖지 않았을 경우 그 이름은 창4:1 이후에 아담이 이브에게 주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창세기 3장이전에 아이들을 갖고 있었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고 어쩌면 그 어딘가에 살아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틀란티스나 – 지브랄타 해협 서쪽에 있다가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다고 플라톤이 말하는 전설의 섬 – 북극점 지하에 있다는 빈 장소에나 어울릴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아들들과 딸들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창5:4) 결국 아담이 자기 아내를 이브라 칭한 것은 창4:1 이후였을 것이다.

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말하기를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창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더라.

21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이 선언이야말로 창3:20에 이르기까지의 성경의 선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인류는 현재 창세기 2장의 상황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창3:6-24의 상황하에 놓여있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해저를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태양계를 탐사하는 것도 아니며(롬10:6-8)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생활여건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완전한 사회 혹은 왕국을 이땅에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롬10:6-8 그러나 믿음에서 난 의는 이같이 말하기를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인가?' 하지 말라."하였으니,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또한 "'누가 깊은 곳으로 내려갈 것인가?' 하지 말라."하였으니,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노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아주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창조의 구체적인 사실들, 즉 우주의 수수께끼를 모두 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성품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 처음 3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치료해 주기 위해 무엇가를 하셨다는 것이다.

창3:15은 위대한 말씀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직은 미래의 사건이며 따라서 당시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못되었다. 창3장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인간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쳐서 숨었으며 책임을 전가시키고 죄를 정당화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자비를 배푸고 타락의 상태로부터 회복을 시켜주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가죽옷이다.

이 가죽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탈굼(Targum, 구약성경의 아람어 부분역)에는 이 가죽이 뱀의 가죽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마귀가 속죄염소와 죄를 지고가는 분의 예표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재7일 안식교 예수재림교의 메리 엘렌 화이트 여사가 주장한 것과 똑같다. 가죽옷은 의심할 나위없이 양의 가죽이다.(창4:4 22:8 출12장)

창4:4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22:8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

그래서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뱀을 통해 선악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 졸업하게 될 때 “양의 가죽”(sheep skin은 영어로 졸업장이란 뜻도 있음)을 받아야만 된다. 아담과 이브는 양을 묻었고 그때 이래로 여자들은 동물 털코트를 좋아한다.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장면은 우리의 주목을 받을만하다. 먼저 어린 양 한 마리가 숲속에서 등장한다.(요1:29) 이 어린 양은 점도 없고 흠도 없다. 이 어린양은 주의 천사 앞으로 입을 열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나간다. 그는 온순하게 고개를 떨구고(요19:30) 민22:23의 칼이 그 양을 내리친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동맥을 흐르고 있는 액체인 피가 어린양에게서 솟구쳐 흐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풀밭은 검붉게 물들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경고하셨던 죽음이 무엇인가를 최초로 볼 수 있게 허락하신다.

요1:29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요19:30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

민22:23 나귀는 주의 천사가 그의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나귀가 길에서 벗어나 들로 들어가니 발라암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때리니라.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죽임당한 것은 어룡이나 혹은 디즈니랜드에나 나올 것같은 상상의 괴물이 아니었다. 이 피로 흠뻑 젖게 될(사34:7) 지구상에서 흘려진 최초의 피는 열정적인 구애자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터져버린 동굴 속의 원시여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양의 것이었다. 이렇게 어린양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성경은 결국 보좌 위에 앉아있는 어린양(계6장) 도살당하였던 것같은 어린양(계5장) 그리고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양(계5:12)으로 끝나게 된다.

사34:7 유니콘들이 그들과 더불어 내려오며 수송아지들이 수소들과 함께 내려오니, 그들의 땅이 피로 흠뻑 젖게 될 것이며 그들의 흙이 기름으로 윤택해지리로다.

계5:12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하더라.

성경이 스스로를 계시하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이처럼 어린양을 강조하는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서적도 어린양과 영원한 진리와 연관을 지어 연급하고 있는 책은 하나도 없다. 아벨, 아브라함, 아삭, 야곱, 요셉, 모세, 이세, 다윗 등은 모두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왜 성경은 이처럼 어린양을 강조하는가? 어떤 사람은 그거야 유대인들이 유목민이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어부였던 요한은 어째서 그처럼 어린양을 강조하는가? 왜 꼭 어린양이어야 하는가? 이집트 사람들은 황소와 수소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들은 어린양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린양이 예언되어 있고(창22:8) 적용되어 있고(출12:13) 인격화되어 있고(사53장) 누구인지 신원이 확인되어 있고(요1:29)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계5:6) 영광을 받고 있다.(계5:12) 아무리 유목인이라지만 이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창22:8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

출12:13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는 너희가 있는 집들 위에서 너희를 위한 한 표가 되리니, 내가 그 피를 보면 너희를 지나칠 것이며 그 재앙이 너희 위에 내려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요1:29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계5:6 이에 내가 보니, 보라, 보좌와 네 생물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 도살당하였던 것같은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더라.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계5:12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하더라.

아랍인들은 유목민이다. 그런데 코란 그 어디에서도 이런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어째서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목자였던 다윗은 그 어린양과 자기의 주님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고 목자인 자기를 양으로 말하고 어린양이신 자기 주를 목자라고 하고 있는 것일까?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의 주체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이브는 ㅇ아무것도 죽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옷입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대속제물을 죽인 후 그들에게 옷입혀 주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짐작하겠는가?(엡2:8-9) 하나님께서 죽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고 그것은 발 밑에 둔 채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의 가죽으로 이들을 입히셨다. 이것은 죽음없이 털만 깎아내서 만든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이 죽은 후 얻을 수 있는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다. 자기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기막히게 아름다움 예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엡2:8-9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자기 의라는 더러운 옷들을 벗겨내고(슥3:4) 올바른 옷을 입혀 주셨다.(사61:10)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3:5) 아담의 후손이 아무리 문명에 의해 눈이 멀었다고 하더라도 그 누군가의 것으로 덮지 않는다면 자신은 벌거벗은 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피해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옷을 자라게 할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슥3:4 주께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들에게 대답하여 일러 말씀하시기를 "그에게서 더러운 옷들을 벗기라." 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네게서 네 죄악을 제하였으니, 내가 옷을 바꿔 너를 입히리라." 하시기에

사61: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겠으며 내 혼이 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의복으로 나를 입혀 주셨고 그가 나를 의의 겉옷으로 덮어 주시어, 마치 신랑이 장식물로 자신을 꾸민 것같이, 신부가 보석으로 자신을 단장함같이 하셨음이라.

22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니,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 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하시니라.

23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서 그를 내어 보내어 그가 취함을 입은 그 땅을 갈게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쫓겨나고 말았다. 낙원을 상실했다. 여자는 그녀의 생리적 기능들이 자연과 부조화를 이룬 채로 쫓겨났다. 하등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제 때에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남자는 평생 땀흘려 해야 할 일들을 눈앞에 둔 채 쫓겨났다. 그는 결국 네모난 나무상자 속에서 일생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결국 신들처럼 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고귀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두 명의 학생들은 열심히 지식을 추구한 나머지 병원 침대와 무덤을 유산으로 받게 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동산의 동쪽 문을 나서자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짙은 구름 위로 지기 시작하고 그들 앞에 전개되는 풍경은 그들의 눈 앞에서 왜곡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마치 백만이나 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그들의 시선을 비틀어 놓고 있는 것같다. 그들은 쫓겨나고말았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이라고는 그들을 이끌어 줄 양심과 땀과 노력으로 살아내야만 할 인생뿐이었다.

이들은 구원받았는가? 그렇다. 구원은 받았다. 하지만 불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과 같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최초의 부부는 그 어떤 부부도 향유해 보지 못한 최상의 조건과 특권들을 잃어버렸다. 다윈은 크게 빗나갔다. 다윈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고도 넓은 길을 따라 갔던(잠14:12) 수십억의 부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윈은 어린양의 피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옷을 만드는 전문가였다.

잠14:12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이니라.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 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이 생명나무는 계2:7 22:14에서 발견되는 나무와 똑같은 나무이다. 창세기나 계시록이나 생명마누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은혜가 아닌 행위에 근거해서 생명나무에 참여할 수 있다. 생명나무를 갈보리의 십자가의 상징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둘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신비종교들과 로마 교황들에 의해 상속된 바빌론 종교에서나 똑같이 취급된다.(랄프 우드로우의 로마카톨릭주의의 정체 참조)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

계22:14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나무에서부터 나오는 생명이란 인간이 창3장을 통과하지 않고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영원한 시도들 중의 또 다른 시도임이 곧바로 입증된다. 하나님께서 지은 하늘아래에 땔감과 톱밥 이외에 그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 나무는 하나도 없으며 얼마간의 좋은 음식보다 더 영원한 무엇을 줄 수 있는 나무도 없다. 그러나 창3:22에는 초자연적인 나무가 존재했었다. 이 나무는 창2장에서 아담에게 값없이 제공되었다. 아담은 그 나무를 따먹지 않고서는 비록 영적으로 죽지는 않을지 몰라도 육체적 생명은 결국 그 수명을 다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생명나무는 성경에서 언급될 때마다 영원한 육체적 생명을 말한다.

이미 타락해 버린 아담에게 이 나무가 금지된 것은(창3:20)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그의 영이 죽어버린 상태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 참여했다면 아담은 영원토록 자기 육체의 노예로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이 그랬다면 오늘날에는 살아있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영이 죽어있고 혼은 썩어가는 부패한 육체에 들러붙어 있는 채로 5,000년 이상을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아마 걸어다니는 마귀같다. 주님께서는 자비로 그를 대하사 아담이 제2의 사탄이 되는 것을 막으셨다. 그래서 아담은 육체적으로 죽게 된 것이다.

24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타는 칼을 놓아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Cherubims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 그룹들은 에스겔 1장과 10장 그리고 계시록 4,5장에서도 보인다. 이들은 사르곤 왕궁 우에 세워진 그 유명한 앗시리아의 날개달린 황소와 약간 유사한 모습이다.

이들 그룹은 천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창6장) 이들 그룹은 움직이면서 모습과 위치가 마뀌거나 움직이지 않은 채 멈추어 있기도 한다. 이들은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존재들이다.

성경에서는 천사, 천사장, 그룹, 스랍(사6장) 등이 구분된다. 이들 영적 존재들에 관해서는 주석서들마다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나 그 어떤 주석도 <KJV 1611>에 이미 인쇄되어 있는 것 이상으로 기여한 바가 하나도 없다. 히브리어 어원연구 역시 이들 존재들의 규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Cherub은 “굳건히 붙잡힌 자” 혹은 복수인 경우(Cherubim) “붙잡힌 자들” 혹은 “굳건히 붙잡힌”이란 뜻이다.(창3:1)

“불타는 칼”은 쓰인 그대로 불타는 칼이다. 이것은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불칼에 다가설 수도 있었고(창4:3 4:16) “문 앞”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지만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제는 아담도 그의 아내도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게 되었다. 이들은 선악과를 먹을 때 영적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육체의 길을 택했고 결국 육체적 죽음이 그들의 인생 여정을 끝내게 할 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3장은 침울한 분위기 가운데서 끝맺게 된다.

창4:3 시간이 흐른 후에 카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를 가져와서 주께 제물로 드렸고

창4:16 카인이 주 앞에서 떠나가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하였더라.

'강 해 > 창세기(1-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4장 3절 - 5절  (0) 2025.04.04
창세기 4장 1절 - 2절  (2) 2025.04.03
창세기 3장 17절 - 19절  (1) 2025.04.01
창세기 3장 14절 - 16절  (2) 2025.03.31
창세기 3장 10절 - 13절  (0) 2025.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