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창세기(1-11)

창세기 4장 23절 - 26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1. 09:55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말하기를 "아다와 실라여, 내 음성을 들으라. 너희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의 상처 때문에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 때문에 청년을 죽였도다.

24 카인이 7배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은 77배로다." 하였더라.

히브리 학자들에 따르면 이 노래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시라고 한다. 이런 결론은 운율을 연구한 결과 나왔다고 하는데, 각운, 두운, 비유 등과 같은 히브리 시에 대한 연구를 아무리 해봐도 본문에 어떤 특별한 조명을 받을 수는 없다. 이런 연구들은 학자들의 번득이는 재치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런 형태의 시는 있다. 슥9:9에 보면 예수님은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의 동물 위에 타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시33:12에서도 두 나라가 아니라 한 나라이다. 시34:22에서도 두 번째 절의 “자”(them)는 첫 번째 절의 종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것이 시의 반복기법이다.

슥9:9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지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오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지니셨고, 겸손하시며 나귀를 타시니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니라.

시33:12 자기들의 하나님이 주이신 민족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자기 유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34:22 주께서 그의 종들의 혼을 구속하시나니, 그를 신뢰하는 자는 아무도 황량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내 음성을 들으라”는 표현은 아담이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라멕의 아내들은 남편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남자의 지배는 드디어 시작되었고 아주 드문 예외적인 경우, 예를 들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지시하는 것(창21:12)을 제외하고는 여자는 오직 순종함으로 조용히 해야 한다.(딤전1:11-14) 사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딤전2장에 나오는 순종하라는 헬라어는 매우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창3:17 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까닭에 내가 네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너의 전생애 동안 고통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21: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인하여 네 눈에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말한 모든 것에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이삭 안에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이며

딤전2:11-14 여자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게 하라.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그 후에 이브이며 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범죄하였음이라.

라멕은 자기 방어를 위해 한 젊은이를 살해했다. 그는 카인은 냉정한 가운데 사악한 생각을 가지고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으므로 자기는 카인보다 7배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멕의 노래는 아마도 유발 악단과 그의 무회들에 의해 유행되었을 것이며 대단한 흥행을 했을 것이다. 창4장의 상황은 원시 고대의 것이라고 피상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학자들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살인자의 노래들과 자기 방어는 이미 인기순위를 장악한 지 오래되었고, 정부를 두고 삼각관계를 벌이는 행위들은 유행가의 주요한 주제들인 사실을 누가 모르는가? 오늘날 유행하는 노래 가사말을 들어보면 라멕과 유발은 수메르 문명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주신 복보다 7배의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라멕의 일방적인 선언은 사실 교황의 칙서만큼이나 비성경적이다. ‘짐이 말하노니...’라는 투의 종교적 선언에 불과한 라멕의 선언은 입다의 서원과 비슷한 성격의 종교행위일 뿐이다.(삿17:13) 신구약 어디에도 살인자에게 7배의 보호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암시된 바 없다. 민수기와 여호수아서에는 도피성입이 있긴 하지만 이 경우는 그가 성읍의 경계로 나가는 경우에는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민35:25-28)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언들이 전부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하도록 제시한 진리의 교리들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선언 중에는 죄인들의 제안들과 공상들과 불평들과 나쁜 상상들이 들어있다. 때로는 분명한 거짓말들도 있다.(욥12:6 말3:15)

삿17:13 그때 미카가 말하기를 "이제 레위인이 내게 제사장이 되었으니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실 줄 아노라." 하더라.

민35:25-28 회중이 그 살인자를 피의 보복자의 손에서 구해 내어 그가 도피하였던 도피성읍으로 다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곳에 거할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가 도피하였던 그의 도피성읍 경계 밖으로 나갔으면 피의 보복자가 그의 도피성읍 경계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그를 죽여도 그에게 피흘린 죄가 없느니라. 이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의 도피성읍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그 살인자는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음이라.

욥12:6 강도들의 장막들은 번성하며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들은 평안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풍성하게 가져다 주심이라.

말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를 행복하다 하니, 정녕 악을 행하는 자들이 세워지며, 정녕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까지도 구제를 받는도다." 하였느니라.

25 아담이 그의 아내를 다시 알았으며 그녀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그녀가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께서 카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내게 또 다른 씨를 정하셨음이라." 하더라.

아벨을 대신하여, 이 말에 따르면 셋은 아벨이 죽은 후 태어난 것같다. 물론 연대기적으로 보아 이 사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벌링거는 아주 흥미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만약 아벨이 125세에 죽고 아벨과 카인이 그 전에 자식들을 두었다면 그들이 65세가 될 때까지는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담은 약 130명의 자녀를 두었을 것이다.’ 벌링거에 따르면 이 아담의 자녀들이 65세부터 자녀를 두었다면 타락 이후 139년쯤에는 1,219명의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26 셋도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부터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더라.

에노스는 히브리어로 ‘나약한’ ‘깨지기 쉬운’ ‘병든’ ‘치료할 수 없는’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욥7:17 단2:43 시9:20 등 기타 여러 구절에서 인류 전체의 속성을 의미하고 있다.

욥7: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높이시나이까? 주께서 주의 마음을 그에게 두시나이까?

단2:43 왕께서 철과 차진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으니, 그들은 다른 인종과 섞일 것이나 그들이 서로 합하지 못하는 것이 철이 진흙과 섞이지 못함과 같으리이다.

시9:20 주여, 그들을 두려움에 두시어 민족들로 자기들이 사람에 불과함을 알게 하소서. 셀라.

이 구절은 매우 까다롭다. 3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 번째는 기도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이 기도와 관련해 성경천체에 걸쳐 쓰였다.(롬10:13 행2:21 대상4:10) 문제는 아담 이후 두 세대가 지닌 지금에 와서 왜 갑자기 기도에 대한 부담이 생겼는가에 대한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6세대가 될 때까지는 홍수도 없었고 홍수의 위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롬10: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대상4:10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말하기를 "오, 주께서 정녕 나를 복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주의 손이 나와 함께 하시고, 주께서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어 나로 근심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 하나님께서 그가 요청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주의 이름을 부르긴 불렀는데 무엇을 위해 불렀다는 것인가? 70인역에서는 인간은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추측일 뿐이요, 그것도 아주 악한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뒤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호와(Jehovah)를 의미하는 “Je”나 “Jah”라는 접두사나 접미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Jehovah는 창4:26에서 “LORD”로 히브리어로 발음이 불가능하며 영어로 번역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대인 회당에서는 아도나이로 발음되었다)

세 번째 해석은 온켈로스의 탈굼에 의해 제공되는 것으로 킴치, 라쉬 및 기타 유대성경해석학자들도 이에 동조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인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치고 그들의 우상에다 그분의 이름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신들에다 그분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1168년 경 미쉬나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마이모니테스는 동일한 해석을 제공한다.

우리는 실로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킴치, 라쉬 및 마이모니데스 등과 KJV의 본문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에 있어서 의심할 나위없이 간단하다. 그 열매로 사람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대인들의 해석에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에녹이 관능적인 배교자들인 불경건한 세대(유14)에게 예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1:14 아담의 칠 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하여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께서 수만 성도들과 함께 오시나니

유다서 7-13절에서 말하는 유리하는 별들이나, 애찬의 흠, 시들어 열매 없는 나무, 뿌리뽑힌 나무, 사나운 짐승들, 더러운 꿈을 꾸는 자들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에노스(제3대)로부터 에녹(제7대) 사이에 등장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에녹시대에는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지만(창6:1-6) 에노스 시대에는 신들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이른 것같다.

유1:7 소돔과 고모라와 또 그같은 방식을 따르는 그 주위의 성읍들까지도 자신들을 음행에 내어 주어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한 본보기가 되었느니라.

유1:8 이와 같이 이러한 더러운 꿈꾸는 자들도 육체를 더럽히며 다스림을 경시하고 권위 있는 자들을 비방하는도다.

유1:9 제 그러나 천사장 미카엘도 모세의 몸에 대하여 마귀와 더불어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그를 모독하는 비난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느니라."고 말하였느니라.

유1:10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방하고 또 사나운 짐승들처럼 본능적으로 아는 것들로 자신들을 부패시키느니라.

유1:11 그들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그들이 카인의 길로 갔고 또 상을 위하여 발라암의 잘못을 따라 탐욕스럽게 달려갔으며, 코라의 모반으로 멸망하였느니라.

유1:12 그들이 너희와 더불어 잔치를 할 때 두려움 없이 자신들을 먹이는 너희 애찬의 흠이요,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물기 없는 구름이며, 두 번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가 시들어 열매 없는 나무요

유1:13 자기의 수치를 거품처럼 내뿜는 바다의 성난 파도이며, 유리하는 별들이니 이들에게 캄캄한 흑암이 영원히 간직되어 있느니라.

창6:1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 딸들이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때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들로 삼으니라.

창6:3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 이는 그도 육체임이라. 그래도 그의 날들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6:4 그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들어와서 그녀들이 그들에게 자식들을 낳았을 때이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더라.

창6: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세상에 창대해짐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구상이 계속해서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6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으니, 그 일이 그의 마음을 비통케 하였더라.

따라서 이 구절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은 이 구절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불경스럽게, 즉 주의 이름을 욕되게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본문에 손을 대지 않고도 세 번째 해석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욕되게 하는 것은 맹세로부터 시작해서 저주 혹은 콜럼버스 동상을 보고 거룩한 콜럼버스라고 부르는 것까지 전부를 포함한다.(고전8:4)

고전8: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일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우상들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 밖에 계시지 아니한다는 것이라.

다소 분명치 않은 해석을 끝으로 창4장은 끝을 맺는다. 성령께서는 이제 도 다른 족보를 우리에게 제공하신다. 즉 아담부터 셋에 이르기까지의 혈통이다. 경건한 독자라면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를 기술하는데 31절을 할애하신 반면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데는 32절을 할애하고 계신 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받는 교훈은 분명하다. 즉 자신의 창조주 앞에 개인적인 상황을 점검하기 전에 자연과학적 정보를 얻기 위해 성경을 찾는 사람은 실망을 얻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과학자들이 그처럼 매료되고 있는 천문우주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단 10장 정도로 간략히 수술하고 말지만(창1장 욥26,38장 출36-39장) 과학자들의 죄들과 그들의 생각들, 숨은 동기들, 목표들, 목적들, 배경, 가문, 미래, 현제상황 들은 500장 이상에 걸쳐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계신다.

실로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같지 아니하느니라.(사55장)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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