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주의의 주요 오류들②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1. 10:02

(4) 칼빈주의의 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순된다

■ 믿음이 행위라는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의 증언

칼빈주의자들은 은혜란 인간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믿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가 될 수 없고 죄인이 스스로 자랑할 무엇인가를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선 이것은 비성경적인 말이다. 그 이유는 성경이 명백하게 믿음과 믿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엡2:8-9).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은 믿음이 아니라 구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선물을 주려 하실 때 앞으로 내밀어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손’과 같다. 믿음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기록이 무어라고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하느니라. 그런데 일하는 자에게는 품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겨지지만 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의롭다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4:2-5).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믿음이 행위와 정반대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인이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칼빈주의자들이 ‘믿음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유된다. 또한 사면을 받아들이고 구명 장비를 취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값비싼 선물을 사서 준비하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과연 내가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나의 범죄로 인해 사형수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데 재판장이 긍휼을 베풀어 내게 죄들의 사면을 주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과연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라도 있는가? 만일 내가 바다에 빠져 죽어 가고 있을 때 배 한 척이 다가와서 나를 구해 주겠다고 제안하고 내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다면 바다에 빠져서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내가 구원받는 일에 있어 내가 무엇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는가?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나 자신이 하였는가? 물론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죄인의 경우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이제 그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 하므로 이에 죄인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그 큰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 이것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그 죄인에게는 자기가 얻은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 믿기 전에 먼저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 말씀

핑크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은 새로운 탄생, 즉 구원을 가져오는 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이다. 이것은 결코 논쟁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하나의 영적인 은혜요 영적인 본성의 열매이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즉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부터 믿음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롬8:8). 육신이 믿을 수 있다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성령님의 일이 먼저 있어야 함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이 매우 명료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주께 사랑받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만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과 진리를 믿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이라.’ 여기서 보듯이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이 먼저 있은 뒤에야 그것이 진리를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하나님의 주권」, p. 73).

성경에서 새로운 출생, 즉 구원에 대한 주요 구절은 요한복음 3장에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니고데모에게 그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가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9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10-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답하시며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설명한다. 그 답은 사람이 믿음으로써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그렇게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요3:14-18).

이것은 칼빈주의들이 죄인들은 결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것, 즉 믿는 것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칼빈주의자들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믿을 수 있는가?”라고 추론한다. 만일 우리가 ‘죽은 사람’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사실 죽은 사람은 죄도 지을 수가 없다. 성경이 죄인들은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죄들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삶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이지 진짜로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죄인들은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기 때문에 결코 믿을 수 없다고 추론하는 것처럼 실제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 이런 비유적 표현을 확대 해석하거나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단 교리로 옮기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3절은 또한 분명하게 구원의 순서를 말한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리스도를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 분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는데

먼저 죄인이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으면 그는 성령님을 받는다. 구원의 순서는 사도행전 16장 30-31절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회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간수가] 그들을 데리고 나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므로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네가 구원을 받고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며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간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며 이때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분명히 바울은 그 사람이 바로 그 일, 즉 믿는 일을 할 수 있으며 그 믿음에 의해 다시 태어나게 됨을 잘 알고 있었다.

구원의 순서는 또한 에베소서 2장 8-9절에도 분명하게 나와 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구원]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가 그분께 내미는 손이다.

그러면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과 진리를 믿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위에서 살펴본 구절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이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일들의 정확한 순서를 언급하고 있지 않음은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진리를 믿는 믿음이 새로운 출생 이전에 있어야만 함을 배웠다. 사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보여 주는 핵심 교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과 우리가 진리를 믿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우리에게 조명의 빛을 주시고 자기에게로 우리를 이끄시며 깨닫게 해 주시고 마침내 다시 태어나게 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께서 일하신다는 배경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는 것’과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을 명확히 분리하여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 전적 타락이라는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 말씀

성경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부패했고(렘17:9; 롬3:10-18)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으며(엡2:1)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고(고전2:14) 가르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인간이 복음에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없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인간이 복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을 단 하나라도 제시해 보라고 했을 때 칼빈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러한 구절을 하나도 내놓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에베소서 2장을 제시하였지만 에베소서 2장에서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사람이 ‘전적 타락’이라는 칼빈주의 교리를 성경기록 안으로 집어넣고 칼빈처럼 해석해야만 이런 교리가 나온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고(요1:9) 그들을 이끄시며(요12:32) 깨닫게 하시고(요16:8) 복음을 통해 그들을 부르시며(막16:15-16; 살후2:14) 그들에게 회개하고(행17:30)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령하시면서(행16:31) 사람이 복음에 반응할 수 있게 하셨다고 가르친다. 

■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 말씀

가인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분을 내느냐? 어찌하여 네 얼굴이 침울해졌느냐? 네가 잘 행하면 내가 네 헌물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네가 잘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그의 열망이 네게 있으리니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니라(창4:6-7).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면서 그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는 시기심의

분노대로 행동하지 말 것을 촉구하셨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저항하고) 자기 동생을 죽였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분명히 선택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영원히 버림받을 자가 될 것을 미리 정하셨다고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게 만드는 단서는 이 구절에 단 하나도 없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상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들과 다투셨고 노아를 시켜 방주를 만들게 하시면서 그가 120년 동안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저항하고)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라.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는 이르기를, 내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토록 내손을 내밀었노라, 하느니라(롬10: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원하셨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미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 당시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라.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야,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5:40).

이런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며 그들에게 대언자들을 보내셨던 하나님의 아들의 주권적 의지가 그들에 의해 완벽히 거부되었음을 본다(그들은 저항하였다).

이제 우리 시대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려졌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려졌느니라.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4:3-4).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해 복음의 빛에서 가려졌고 복음을 거부하므로(저항하므로) 구원받지 못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음을 본다.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지만(딤전2:3-4; 벧후3:9) 분명히 죄인들은 그분을 거부할(저항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통치할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가 오는 것은]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하려 하심이라(살후2:10-12).

왜 이러한 죄인들이 멸망하게 되는가? 그 이유가 여기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했거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영원히 내버려졌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거역하고(저항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멸망한다.

■ 제한 속죄라는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 말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긍휼을 얻기를 원하신다(롬11:32).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화해하기를 원하신다(고후5:19).

예수님에 의한 믿음의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갈3:22).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다(딤전2:6).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히2:9).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구원받지 못한 거짓 교사들까지도 사셨다(벧후2:1).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벧후3:9).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화해 헌물이시다(요일2:2).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불법을 담당하셨다(사53:6).

따라서 제한 속죄라는 칼빈주의 교리는 성경기록의 명백한 가르침과 전적으로 반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