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칼빈주의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혼동하고 국가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을 혼동한다
무조건적 선택과 유기23)에 대한 칼빈의 중요한 논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에 기초를 둔다.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21장에 ‘영원한 선택’이라는 글에 설명되어 있다.
롬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이때쯤에 내가 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것이라.
롬9:10 그뿐 아니라 리브카도 한 사람, 곧 우리 조상 이삭에 의하여 잉태하였는데
롬9:11 (아직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였고 또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을 때에,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부르심에 있게 하시려고)
롬9:12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고 하셨으니
롬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 함과 같으니라.
롬9: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롬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가엾게 여길 자를 가엾게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9:16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
롬9:17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롬9:18 그러므로 그 분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9:19 그러면 네가 내게 "어찌하여 그 분께서 여전히 잘못을 찾고 계시며, 누가 그 분의 뜻을 거역하였느냐?"라고 말하리라.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겠느냐?
롬9:21 토기장이가 같은 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롬9:22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롬9:23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 대해서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으니
롬9:24 그가 우리까지도 부르셨으되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것이 아니냐?
이 구절들이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증거 본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연 로마서 9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죄인들은 구원받도록 선택하시고 나머지는 잃어버리도록 정하셨다고 가르치는가?
이 구절에서 우리는 8개의 중요한 교훈을 볼 수 있다.
① 에서와 야곱의 예는 개인적 구원에 관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적 인류 구원 프로그램에서 민족에 대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12절 즉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리브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의 개인적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형이 동생을 섬기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에서는 구원받을 수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전당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이 구절은 결코 에서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영원히 유기되어 버림받도록 미리 예정되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리스도의 계보의 선조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② 파라오에 관하여 성경은 출애굽기 7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기 전에 이미 5장 2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파라오가 이르되,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해야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하지 아니하리라, 하매(출5:2)
성경은 두 번이나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이 연기된 것을 파라오가 보고는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그가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더라(출8:15).
파라오가 비와 우박과 천둥이 그친 것을 볼 때에 더욱더 죄를 지어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고 그의 신하들도 그리하였더라(출9:34).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유기의 예가 아니다. 성경기록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항상 그분의 뜻이지만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분은 그들을 거부하고 심판하시며 그들을 본보기로 만드신다고 가르친다.
잠언 1장 23-33절을 보기 바란다.
23 너희는 내 책망의 말을 듣고 돌아서라. 보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들을 너희에게 알려주리라. 24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절하였고 내가 내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중시하지 아니하였으며 25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권고를 무시하고 내 책망을 전혀 원치아니 하였으므로 26 나도 너희의 재난을 볼 때에 웃을 것이며 너희의 두려움이 닥칠 때에 조롱하리니 27 너희의 두려움이 황폐함같이 닥치고 너희의 멸망이 회오리바람같이 닥치며 너희에게 고난과 번민이 닥칠 때에 내가 그리하리라. 28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르겠지만 내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일찍 나를 찾아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 29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주 두려워하기를 택하지 아니하며 30 내 권고를 전혀 원치 아니하고 내 모든 책망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니라. 31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길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계략들로 채워지리니 32 이는 단순한 자들의 돌이켜 떠나감이 그들을 죽일 것이며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이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라. 33 그러나 누구든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안전히 거하며 재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온하리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순서는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시며 만일 그들이 그 초청을 거절하면 그분은 그들을 심판하신다.
이사야 66장 3-4절을 보기 바란다.
… 참으로 그들이 자기 길들을 택하였고 그들의 혼이 그들의 가증한 것들을 기뻐하므로 나 역시 그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택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가져오리니 이는 내가 부를 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 눈앞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라.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순서는 매우 분명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기로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는 길을 선택하신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을 보기 바란다.
그[적그리스도]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이적들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하심이라.
이 죄인들, 즉 적그리스도의 시대에 멸망당할 자들은 주권적으로 선택을 받지 못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거부할 것을 개인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보다 더 명백한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강퍅하게 하는 파라오의 예를 드셨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나 성경기록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영벌(유기)에 처할 목적으로 파라오를 창조하시기로 선택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③ 로마서 9장 22-23절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죄인들은 파멸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어떤 죄인들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정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파멸시키기에 합당하게 된 진노의 그릇들’(vessels of wrath fitted to destruction)이라는 구는 대상자가 본인 스스로 어떤 일에 합당한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진노의 그릇들(여기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파멸을 받을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스스로 행동하였다. 「빈센트 언어 연구」에 나오는 다음 주석을 살펴보라.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파멸에 합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형용사적 의미에서 파멸에 거의 다다른 상태, 즉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현재 존재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분사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최종적 진노의 대상들이 이 문제에서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1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 자체가 명백한 말씀들의 의미를 통해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성경기록과 성경기록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죄인이 진리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파멸에 합당하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한다. 복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창조와 양심의 빛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 빛에 스스로 반응함으로써 더 많은 빛이 자기들에게 비치도록 만들 책임을 가지고 있다(행17:26-27).
④ 로마서 9장 23-24절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도록 미리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들’만 부르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로써 영광에 이르도록 자신이 미리 예비한 긍휼의 그릇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려하셨다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 그릇들은 바로 우리니 즉 그분께서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니라.
여기서 칼빈주의를 주장하려면 이 절들에 있는 말들에 ‘주권적 선택’이라는 말을 임의로 집어넣어서 읽어야만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24절이 ‘유효한 부르심’, 즉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부르심’이라고 불리는 용어를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부르시며(살후2:14) 복음은 모든 창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막16:15).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자’를 부르신다(롬10:13; 계22:17).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니 곧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 것이니라.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하시니라(요6:40).
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도 ‘주권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유대인들 개개인의 구원 역시 개인의 믿음에 기초를 둔다.
의의 법을 따른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이라.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느니라. 이것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1-33).
⑥ 로마서 10장은 이것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다. 구원의 약속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것이 무어라고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어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느니라, 하나니 그것은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 위에 계신 같은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9:33; 10:8-13).
이 구절에서 ‘누구든지’와 ‘모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과연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는 그 뒤에 주권적으로 선택을 받은 자들이 실제로 그러한 믿음을 발휘할 수 있어야만 구원을 주신다고 하심으로써 죄인들을 놀리셨단 말인가?
⑦ 하나님의 주권은 그분의 뜻이 사람들 안에서 항상 성취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르기를, 내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토록 내손을 내밀었노라, 하느니라(롬10:21).
마태복음 23장 37절도 참조하기 바란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야,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뜻을 행사할 수 있다. 사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늘 ‘아니요’라고 말해 왔으며 하나님을 거역해 왔다고 증언한다.
만일 하나님의 주권이 그분의 뜻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혹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벧전1:16)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우리는 그 뜻이 항상 그렇게 이루어지지는 않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서 완벽하게 거룩하게 될 수도 없음을 모두 잘 알고 있다.
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눈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파라오처럼 그들이 먼저 자기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이다.
겔12:2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반역하는 집의 한가운데 거하고 있는데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
대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반역하며 듣기를 거절한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을 눈멀게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마13:15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졌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자기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하느니라.
성도 마태는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눈을 감았으며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은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이 회심하지 않은 이유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영벌(유기) 같은 것이 전혀 없다.
행28:25-27 그들[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여 바울이 한마디 말을 한 뒤에 떠나니라. 그가 이르기를, 성령님께서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우리 조상들에게 잘 말씀하셨도다. 이르시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졌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그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하라, 하셨느니라.
여기서도 우리는 이스라엘이 회심하지 않으려고 자기들의 눈을 감았음을 보게 된다. 이 구절은 칼빈주의의 주권적 유기를 지지하지 않는다.
(8) 칼빈주의는 권위를 얻기 위해 순전하게 신약의 사도들과 대언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대신에 ‘교부들’에게로 돌아간다
칼빈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권위는 어거스틴이었다고 인정했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라.
내가 만일 어거스틴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통째로 편집하려고 한다면 나는 나의 독자들에게 그의 말 외에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을 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기독교 강요」, 3권 22장).
나를 대신해서 어거스틴이 대답하게 하라(동일 문서).
어거스틴은 과거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최고의 신실한 증인으로 가장 많이 빈번하게 인용하는 사람이다(「기독교 강요」, 4권 14장).
어거스틴이 내 속에 전적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내가 내 믿음의 고백을 쓰기 원한다면 나 자신이 완전히 만족해하면서 완벽히 충실하게 그의 책들에서 자료를 얻어 쓸 수 있을 것이다(「칼빈의 칼빈주의」(Calvin’s Calvinism), Henry Cole, Reformed Free Publishing, 1987, p. 38, 「칼빈주의의 이면」(The Other Side of Calvinism), Laurence Vance, 1999, p. 38).
어거스틴은 어떤 사람인가?
어거스틴은 이단 교리로 심히 크게 오염된 사람으로 로마 카톨릭교회는 그를 ‘자기들 교회의 4명의 박사들’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점진적 구원이라는 거짓 복음을 가르쳤다.
어거스틴은 소위 자기의 ‘동산 체험’이라 불리는 것과 물세례가 일생동안 지속되는 점진적 회심의 시작 단계라고 말한다(「어거스틴: 그의 삶과 영향」, David Beale, Historical Theology In Depth, 2013, 1:334-50).
어거스틴은 참 성도들에게 박해를 가한 자였으며 카톨릭교회의 박해 교리를 세우고 실행한 교부였다. 역사가 네안데르(August Neander, 1789-1850)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영적 독재, 편협, 박해로 이루어진 전체주의 시스템이라는 세균을 포함하며 그것은 중세의 종교 재판소의 법정에까지 진출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들의 신앙에 의거하여 순수한 교회를 유지하려고 애쓰던 성경 신자들인 도나티스트들을 심하게 박해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직접 그들을 박해하였다.
어거스틴은 또한 무천년주의의 아버지로 성경의 예언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가르쳤다.
어거스틴은 마리아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가르쳤으며 연옥을 믿었다.
어거스틴은 유아 세례라는 이단 교리를 확립한 교부들 중 하나로서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은 영원히 버림받아 유기된다고 주장하였고 유아 세례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이교도’나 ‘저주받은 자’로 불렀다.
어거스틴은 성경보다 교회 전통을 높이면서 “카톨릭교회의 권위가 복음을 믿도록 나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I would not believe in the Gospel if the authority of the Catholic Church did not move me to do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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