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주의의 주요 오리들⑤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1. 10:18

(9)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경고와 그분의 심판을 설명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자신을 믿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경고하셨다(눅13:3, 5; 요8:24 참조). 그분께서는 또한 죄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셨다.

눅10:12-1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날에 소돔이 그 도시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고라신아,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벳새다야,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 안에서 행한 강력한 일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오래 전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속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그러나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여졌으나 지옥으로 쫓겨 내려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고 너희를 업신여기는 자는 나를 업신여기며 나를 업신여기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업신여기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견인(은혜), 선택받은 자들의 다시 태어남에 대한 칼빈주의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경고와 심판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왜 그분은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셨으며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면서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들에게 심한 심판이 닥칠 것을 말씀하셨을까?

(10) 칼빈주의는 사도 바울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많은 사람을 얻으려함이라(고전9:19).

선택받은 자들의 수가 영원부터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 바울이나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바울의 사역의 목적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으려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함이라(고전9:22).

칼빈주의에 따르면 바울의 도움이 없어도 구원받은 자들을 선택하는 것은 이미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은가?

바울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자신을 희생했다.

내가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서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같이 바로 그렇게하라(고전10:33).

구원의 선택이 주권적으로 미리 예정되었거나 불가항력적이라면 바울의 이 같은 진술은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바울은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공포를 알고 있기에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밝히 드러났고 또 너희 양심에도 밝히 드러났음을 나는 또한 확신하노라(고후5:11).

바울이 만일 칼빈주의자였다면 그는 선택받은 자들은 설득할 필요가 없고 선택받지 않은 자들은 설득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위해 기꺼이 심지어 지옥의 저주도 받을 태세였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들,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랐겠노라(롬9:3)

어떻게 미약한 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운명에 대해 하나님보다 더 걱정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마음에서 나오는 외침이 단순히 구원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외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11) 칼빈주의는 히브리서를 설명할 수 없다

히브리서는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이나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장하는 칼빈주의의 TULIP 교리,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며 선택받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도 불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임의로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하시고 절대적으로 그들을 이끄신다는 교리를 논박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령님께서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배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그렇게 무서운 경고와 권면들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택받았다면 멸망할 가능성이 없으며 선택받지 않았다면 그들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들을 살펴보라.

히2:3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이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인데

이 권면은 칼빈주의 교리에 비추어 보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칼빈주의가 가르친 대로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선택받은 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소홀히 할 수 있으며 반면에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을 소홀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히3:12-14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 있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오히려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날마다 서로 권면하여 너희 중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이는 우리가 우리의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고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니라.

선택받은 자들이 ‘주권적으로’ 미리 예정되었다면, 그래서 선택이 죄인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선택받은 죄인들이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께로 이끌린다면 이런 권면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권적으로 선택을 받고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신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며 반면에 어떻게 선택받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히4:9-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도 자기 일들을 그쳤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지니 이것은 아무도 불신이라는 그 동일한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이 권면이 어떻게 칼빈주의 TULIP 방식의 선택에 적용될 수 있을까? 이 구절은 구원이라는 안식은 모든 사람이 들어가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촉구받고 있음을 말한다. 반면에 칼빈주의의 ‘주권적’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정되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확실하게 그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히6:4-6 이는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만일 칼빈주의 TULIP 신학이 맞는다면 왜 이런 권면이 있는가? 어떻게 선택받은 자들이 떨어져 나갈 수 있는가? 어떻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가?

히10:26-29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있지 아니하고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있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보라.

칼빈주의 TULIP 신학이 맞는다면 왜 이러한 권면이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주어졌는가? 그들이 주권적으로 선택을 받았다면 그들은 확실히 끝까지 견인될 것이며 그들이 선택받지 못했다면 그들은 확실히 끝까지 견인되지 못할 것이다. 칼빈주의 교리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이나 그들이 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칼빈주의 관점에서 선택이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믿는 자들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어떤 선택권도 없다면 이 구절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이 그분의 미리 아심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벧전1:2) 죄인의 입장에서 개인적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면(‘누구든지 믿는 자는’ 요3:15, 16; 12:46; 행10:43; 롬9:33; 10:11; 요일5:1; 계22:17 등) 히브리서에 나오는 권면이나 경고는 완벽하게 이치에 들어맞는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성경이 모든 곳에서 이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임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죄인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능력 부여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고(요1:9)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림을 받으며(요12:32) 성령님에 의해 깨우침을 받고 조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한 죄인이 실제로 구원을 소유하지 않고서도 구원에 가까이 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죄인들은 진실로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고 진짜로 다시 태어나서 성령님이 내주하며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도록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다.

(12) 칼빈주의는 기도를 설명할 수 없다

핑크는 “하나님의 뜻은 변경될 수 없고 우리의 울부짖음으로 바뀔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하나님의 주권」, p. 173).

사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기도로 변경될 수 있다. 우리는 절대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시라고 요구할 수 없다. 기도는 요구하는 것(demanding)이 아니라 구하는 것(asking)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롬1:10).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말을 들으신다(요일5:4). 이런 말씀들은 결코 기도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영원히 미리 예정하셨던 것에 대해 로봇같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도할 책임을 주셨고 그 기도가 그분의 뜻에 맞는다면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말은 기도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얼마나 기도할 것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할 것인가가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도들은 세상에서의 일들을 바꾼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도 있다. 시내산에서 일어난 놀라운 다음의 장면을 살펴보라.

출32:9-14 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백성들을 보았더니, 보라,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러므로 이제 나대로 하게 하라. 그들에 대한 내 진노가 맹렬해져 나로 그들을 진멸하게 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 모세가 주 그의 하나님께 간구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위대한 능력과 강력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에 대하여 어찌하여 주의 진노가 맹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집트인들로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그들에게 악을 가져와서 그들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데리고 나왔도다.' 하게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진노에서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을 향한 이 재앙에서 돌이키소서. 주의 종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는 스스로 맹세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씨를 하늘의 별들처럼 번성시키고 또 내가 말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씨에게 주리니 그들이 그것을 영원히 유업으로 받으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행하려고 계획하신 그 재앙에서 돌이키시니라.

분명히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소멸시키고 모세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그분께 간청하였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칼빈주의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전혀 맞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시고 문자 그대로 인간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신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가 이 시점에서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을 언급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오? 그분께서 이르셨으니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오?

민수기 23장 19절과 출애굽기 32장 14절 사이에는 모순이 전혀 없다. 민수기 23장에서 발람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분은 절대로 뜻을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롬11:29).

그러나 여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전체적 계획의 맥락 안에서 그분은 인간의 행동과 관련하여 많은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시거나 바꾸시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의 신비이다.

사무엘기상 15장 29절은 어떤가?

또한 이스라엘의 힘이신 분은 거짓말을 하거나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니 그분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진술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거절하시고 새 왕으로 다윗을 선택하신 뒤에 사무엘이 한 말이다. 사울은 그 결정에 대해 사무엘에게 그분의 마음을 돌이켜 달라고 간청하였고 사무엘은 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결정은 변경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마음(혹은 뜻)이 변경될 수 있는 때가 있고 될 수 없는 때가 있다.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두 명의 대언자들에게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렘7:16; 겔14:4) 그것은 이스라엘이 극심하게 반역의 길을 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성하신 뒤의 일이었다. 또 다른 순간에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처럼 기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도록 하여 이스라엘에게 더 많은 회개의 시간을 주었다.

민수기 23장 19절이나 사무엘기상 15장 29절 중 어느 것도,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기로 결심한 출애굽기 32장에서의 계획을 돌이키셨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이 놀라운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며 로봇이나 꼭두각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분께 ‘예스’나 ‘노’를 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 인간은 간절하게 간청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이 기도의 놀라운 신비이다.

성경기록에 있는 다른 기도의 장면을 살펴보라. 이사야 38장에서 우리는 히스기야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대언자 이사야에게 가서 “네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38:1)고 말하라고 하셨다. 이때에 히스기야는 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다시 왕에게 보내 “주 곧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네 날들에 십오 년을 더해 주리라”(사38:5)고 말하게 하셨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다.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다.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킨다!

선택할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 즉 하나님의 우주 장기판에서 겨우 졸에 불과한 자를 창조하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존재를 창조하는 것, 이 둘 중에 과연 어느 것이 더 큰 힘 즉 전능한 힘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후자가 더 큰 힘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불멸의 사람들이 영원한 고통을 피할 수 있도록 그 어떤 것도 예비하지 않고 단지 그들을 불멸의 존재로 정하시는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이 아닌가? 사람이 믿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구원받도록’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결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음에도 ‘불가항력적으로’ 부름을 받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사람의 무조건적 선택과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반영해 준다고 하는 데 의문을 가진다. 자신이 친히 선택한 구원자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권적으로 제공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권능과 사랑을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칼빈주의 5대 강령의 구원론적 의미들」(Soteriological Implications of Five-Point Calvinism), Philip F. Congdon, Journal of the Grace Evangelical Society, Autumn 1995; A Calvinist’s Honest Doubts Resolved, p.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