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석 영접 기도 전도 신학을 주의하라 >
적어도 칼빈주의만큼 복음 선포에 해를 끼치는 것은 ‘쉽게 믿기’(Easy believism) 혹은 ‘즉석에서 영접 기도하기’(Quick prayerism)이다. 이것은 주로 근본주의 침례교인들과 여러 다른 집단에 만연되어 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요3:16)과 구원받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이런 위험을 ‘쉽게 믿기’(Easy believism)라 부르기보다는 ‘즉석에서 영접 기도하기’라 부르기를 원한다. ‘즉석에서 영접 기도하기’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① 그들은 얄팍하게 피상적으로 복음을 전하고도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는 무척 빠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릭 워렌(Rick Warren)의 새들백 교회가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살펴보라.
우리의 불순종하는 본성이 우리를 우리의 창조자와 영원히 분리시켰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깊이가 없고 피상적이어서 어디서부터가 구원에 대한 말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짧게 말해서 성경의 구원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모호하고도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결단 이상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복음에 대해 정의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부활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의 가르침에는 피에 대한 언급이 없다. 회개에 대한 언급도 없다. 복음에 대한 새들백 교회의 설명은 전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이 그들이 이해하는 복음의 모든 것이라고 할 때 이런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죄인의 영접 기도로 이끄는 것은 하나의 중범죄이며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치욕이다. 이런 유형의 복음 전도의 천박함 때문에 나는 작년에 새들백 교회에 가서 그 교회 신도 옆에 앉아 그가 언제 다시 태어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항상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했다.
② 그들은 사도 바울이 침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증거를 요구한 것과는 반대로 죄의 확증이나 다시 태어남의 증거가 없어도 사람들을 영접 기도로 이끄는 데 빠르다.
[내가] 먼저는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과 유대의 온 지방 전역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해야 함을 보이매(행26:20)
③ 그들은 회개를 무시하거나 또는 죄나 삶의 변화와 관계가 없는 회개를 말하는 데 빠르다
이들이 사용하는 ‘일반적 영혼 구원 계획’은 회개, 즉 방향을 180도 바꾸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가 ‘마음이 변하여 실제로 삶이 변화되는 것’이라는 전통적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에 단순히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재정의하였다. 그들이 회심시킨 사람들의 대부분이 삶의 변화의 조짐을 보여 주지 않아도 이것이 그들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회개란 항상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④ 그들은 구원의 증거가 없어도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데 빠르다
성경적 구원의 안전 보장은 진짜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단지 죄인의 영접 기도를 했거나 목사의 구원 초청에 반응하여 예배당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가면서 교회 직원에게 그리스도를 고백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특히 완전히 낯선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시 태어나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잘못된 희망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⑤ 그들은 자기들의 전도가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고 숫자들을 세는 데 빠르다
즉석 영접 기도를 실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상담한 사람들의 구원 고백 중 상당수가 구원의 증거를 주지 못해도 대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이러한 사역에서 나온 믿음 고백의 90%가 열매가 없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이러한 보고를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지난밤에 교도소에서 20명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접 기도를 했다.”거나 “500명이 작년에 우리 교회 사역을 통해 죄인의 영접 기도를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20명이 지난밤에 교도소에서 구원을 받았다.”거나 “500명이 작년에 우리 교회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특히 이런 보고를 하는 사람이 자기 경험을 통해, 자신이 회심시켰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회심하지 못했다는 점과 자기의 사역에서 나온 대부분의 믿음 고백들이 노숙자의 냉장고만큼이나 비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될 때 더욱더 확실한 사실이다.
결 론
결론적으로 나는 성경적 형태의 칼빈주의가 있다거나 비성경적인 좀 더 극단적 형태의 칼빈주의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스펄전은 우리가 칼빈의 칼빈주의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록 내가 스펄전을 존경하지만 - 그도 역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 멋지고 훌륭한 믿음의 전사의 말에 결코 동의할 수도 없고 또 동의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그의 견해에서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칼빈 자신은 어거스틴에게까지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충분하지는 않다. 사실 의지할 수 없는 썩은 나무에 불과한 어거스틴에 의지하는 것은 칼빈의 주요 오류 중 하나이다. 우리는 칼빈이나 어거스틴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성경기록에 완벽하고도 충분하게 기록되어 있듯이 ‘성도들에게 한 번 전달된 믿음’으로 항상 되돌아가야 한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조직 신학이 출발하고 끝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한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내가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가 생겼나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들어온 어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그들은 이 정죄를 받도록 옛적부터 미리 정해진 자들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니라(유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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