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의 낙타들①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2. 11:05

< 칼빈의 낙타들 >

너희 눈먼 안내자들아, 너희가 모기에는 긴장하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24).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고 과거와 현대의 많은 칼빈주의 저작물을 연구해 본 결과 나는 칼빈이 모기에는 긴장하고 낙타는 삼키는 죄를 지었다고 확신한다. 어떤 형태라도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많은 성경기록들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성경기록의 전체적 목적을 부인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나는 칼빈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에 나온 많은 영향력 있는 칼빈주의 저작물을 공부하였고 내가 구원받은 이후로 47년 동안 칼빈주의를 연구해 왔다.

나는 최선을 다해 진리를 알고 그 진리가 어디로 나를 인도하든지 기꺼이 그 진리를 따르려는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독자들이 추천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칼빈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잘못 설명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옳은 것을 이야기해도 결국은, 항상 비(非)칼빈주의자가 이 주제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틀림없이 내가 칼빈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할것이다. 이것에 대해 나는 칼빈주의가 그렇게 복잡하다면 그것은 진리일 리가 없다고 대답한다. 40년 동안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성경 백과사전과 다른 많은 성경 연구 책들을 출판할 정도로 상당한 지성을 가진 설교자/선교사가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칼빈주의를 연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신학을 만들어 내는 장본인은 바로 마귀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렇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고후11:3).

물론 칼빈주의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로 칼빈주의는 엘리트 지성 세계를 생산해 낸다. 칼빈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립주의’(compatibilism), ‘[신] 단독설 대 [신인] 협력설’, ‘선택하시는 은혜 대 불가항력적 은혜’, ‘유효한 부르심 대 일반적 부르심’, ‘유효한 속죄 대 가설적 속죄’, ‘자유주의자의 자유 의지 대 의지의 속박’, ‘객관적 은혜 대 주관적 은혜’, ‘자연적 능력 대 도덕적 능력’, ‘아담의 죄의 중재적 전가 대 즉각적 전가’, ‘타락 이전 예정론’, ‘타락 이전 선택론’, ‘타락 후 선택론’, ‘소망적 의지 대 작정적 의지’, ‘선행적 가설 의지’ 등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는 성경에 없는 많은 것들을 가정해야만 이해가 가능한 철학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더 나아가서 내가 칼빈주의를 연구하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한결같이 비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비칼빈주의자인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히 믿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때는 언제든지 기뻐하시는 무슨 일도 하실 수 있다.

칼빈주의를 연구할 때마다 나는 이 교리 체계가 너무나 많은 성경기록들을 단순하게 반대하며 하나님의 명백한 가르침보다 인간의 논리와 철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교리이지만 결코 칼빈주의가 그것에 대해 내린 결론을 의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을 모기에는 긴장하게 하고 낙타는 삼키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기는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성경 밖의 논쟁들과 추론들이며 낙타는 문맥에서 분명하게 이해되는 성경기록들이다.

이제 칼빈주의자들이 긴장하는 여러 개의 모기들을 살펴보라. 칼빈주의자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시라면 인간은 의지를 가질 수도 없고 그분에게 반역할 수도 없다고 추론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죄인이 죽었다면 복음에 반응할 수 없으며, 그가 복음에 반응할 수 없다면 그리고 믿음 자체가 주권적으로 받은 선물이라면 - 에베소서 2장 8-9절에 대한 잘못된 주석에 근거하여 - 선택받은 사람은 스스로 믿음을 실행하기 전에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추론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그분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러한 모든 예들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논리를 성경기록에서 나오는 분명한 진술에 적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주장에만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이 자신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기록들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뒤집는 분명한 수많은 성경기록들은 삼키면서 미세한 모기들에만 긴장한다.

칼빈이 삼킨 낙타들

다음은 칼빈이 ‘로마 카롤릭교회 박사’인 어거스틴을 추종하면서 ‘주권적 선택’이라는 오류를 범하며 꿀꺽 삼킨 낙타들의 몇 가지 예이다. 이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절할 수 있다면 또 구원이 죄인에 의해 수용되거나 거절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 아니라고 추론하였다.

나는 완고한 칼빈주의자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깨달아 알고 있다. 그는 선택하는 은혜와 보편적 은혜의 차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의 차이, 소망적 의지와 작정적 의지 그리고 선행적 가설 의지 사이의 차이를 교묘하고 난해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견고한 성채 속으로 즉시 도피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지 않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경 신자들과 지적 명민함에 의해 위압을 받지 않고 인간의 신학으로 세뇌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1)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참으로 그들이 뒤돌아서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제한하였도다.[Yea, they turned back and tempted God, and limited the Holy One of Israel](시78:41).

칼빈주의자들은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고 그분의 목적을 거역할 수 있다면, 즉 그분을 제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주권적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 주권적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면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즉 제한한다고] 말하며 이런 것은 역사의 가장 처음 시대부터 계속해서 그리되어 왔다고 증언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가인도 거역하였다. 노아의 세대도 거역하였다. 바벨탑에 모였던 사람들도 거역하였다. 시편 기자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그분의 법 안에서 걷기를 거절하는 자들’(시78:10), ‘완고하고 반역하는 세대’(시78:8)라고 묘사한다. 그런 다음 이렇게 놀라운 진술을 한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제한하였도다(시78:41).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이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주권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실 칼빈주의는 이 두 가지 주장 면에서 틀렸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의지가 있고 실제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다 해도 또 심지어 구원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그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주권은 약화되지 않는다. 그분께서 로봇을 창조하셔야만 그분의 주권이 강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모든 것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으나 오직 구원 문제에서는 그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절하며 어떤 면에서 그분을 제한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그분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실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이 분명하게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할지니라.”(계22:17)고 말하는 것처럼, 그분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셨을 때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절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실 수 있다.

(2)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원치 않았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야,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의지와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거부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원치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이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 꺾일 수 있음을 명백히 가르치는 증거이다.

그러나 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러한 눈물, 즉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흘리신 눈물]이 실망하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드러냈는가? 진실로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명의 완벽한 인간을 보여 주었다(「하나님의 주권」, p. 199).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마태복음 23장 3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진술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 꺾였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이 소유한 본성의 측면, 즉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간의 본성적 측면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실망하실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실망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주권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칼빈 자신이 내린 정의에 따르면). 그러나 이것은 글자 그대로 수많은 곳에 있는 성경기록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심지어 이단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또 여호와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대언자들을 보내시고 이스라엘에게 화평을 주길 바라셨으나 그들이 원치 않았던 바로 그 하나님으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3) 유대인들은 성령님을 거역하였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Ye stiffnecked and uncircumcised in heart and ears, ye do always resist the Holy Ghost: as your fathers did, so do ye](행7:51).

스데반은 유대인 박해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거역한 책임을 지웠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성령님께서 사람들과 다투시며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그분을 거역할 수 있음을 본다. 칼빈주의자들은 ‘의지의 속박’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작용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에 대한 답을 하는데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거절할 수 있으나 진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며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가 속박되어 있어서 믿을 수 없고 전적으로 부패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것을 가르치는 곳은 없다. 대신에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즉 가인부터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까지 사람은 다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부르심에 반응할 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사람은 명백하게 그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고 그리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에 어떤 사람은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반응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오직 일부만이 반응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위의 세 사례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제한하고 거역하고 거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경 역사와 인류 역사에서 모두에게 드러난 명백한 사실이다.]

(4)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이스라엘에게 내미셨으나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절하였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르기를, 내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토록 내 손을 내밀었노라, 하느니라(롬10:21).

내가 반역하는 백성을 향해 온종일 내 손을 펼쳤는데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 선하지 않은 길로 걸으며 동산에서 희생물을 드리고 벽돌제단위에서 분향하며 내 얼굴 앞에서 계속 내 분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65:2-3).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하셨던 것과 같은 형태의 진술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셨으며 그래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미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메시지와 구원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본다.

(5)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들에게 가져왔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고난 받은 것같이 너희도 너희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것들로 고난 받았기 때문이라.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자기들의 대언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핍박하였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어 이방인들이 구원 받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금함으로써 항상 자기 죄들을 가득 채웠나니 이로써 진노가 극도로 그들에게 닥쳤느니라(살전2:14-16).

이 구절에 의하면 주 예수님을 죽이고 초기 성도들을 박해했던 유대인들은 그런 악한 일을 하도록 주권적으로 버림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죄들을 쌓았고 자신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들에게 닥치게 했다. 또한 ‘이방인들이 구원받을까 봐’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복음 선포하는 것을 금했다고 바울이 말한 것에 주목하라. 따라서 우리는 그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방해가 없어서 복음 선포를 받을 수 있었다면 구원받았을 수도 있었음을 본다.

(6) 믿는 자들의 믿음이 세상을 정죄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두려움으로 움직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을 구원하였으며 그것에 의해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선포로 인해 회개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라, 요나 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 때에 남쪽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녀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의 맨 끝 지역에서 왔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41-42).

노아, 세바의 여왕, 니느웨 사람들은 믿지 않는 세상을 정죄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노아의 믿음과 세바의 여왕의 믿음, 니느웨의 회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예였다면 믿지 않는 자는 그것에 의해 정죄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라고 그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언약의 피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그것을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영께 무례히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보라(히10:29).

이 구절은 구원받은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나 혹은 사람이 실제로 다시 태어남이 없이 거의 구원에 이르렀다가 마지막에는 피의 유효성과 은혜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 이 둘 중에 하나를 의미한다.

네팔에서 선교사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많은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사며 그리스도에 대한 것들을 열심히 살펴보고 심지어 침례를 받기 원하며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복음을 믿었다고 간증하다가 결국에는 돌아서서 인간의 종교와 우상 숭배로 돌아가거나 그리스도의 피와 은혜로 받은 구원을 부인하는 것을 보아 왔다. 이 사람들은 구원의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받고 성령님에 의해 깨우침을 받으며 언약이나 은혜의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는 의미에서는 거룩하게 구별되었다. 이 구절은 제한 속죄와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칼빈주의 교리와 모순이 된다. 적어도 이런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을 위해서 그들에게 즉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했지만 그들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을 가르친다.

(8)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저주하셨다

그분께서 강력한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그분께서 그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시니라. 고라신아,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벳새다야,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 안에서 행한 강력한 일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오래 전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속에서 회개하였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여졌으나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내가 네 안에서 행한 강력한 일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곳이 이날까지 남아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마11:20-24).

예수님께서는 주권적 선택과 주권적 영벌(유기)에 기초해서 사람들을 다루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인간의 책임에 기초해서 사람들을 다루셨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할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하려고 한다면 회개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만일 그들이 회개할 수 없었다면 마치 그들이 회개할 수도 있었던 것처럼 왜 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들이 회개할 수 없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라고 명령을 받는가?(행17:30)

(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시고 아버지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그렇게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눅11:2).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현재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이란 그분의 뜻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물론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관한 한 최종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시대에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거역해 왔다.

(10)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끝들이 구원받도록 초청하신다.

땅의 모든 끝들이여, 나를 바라보고 이로써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자가 없느니라(사45:22).

하나님의 이 보편적 초청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진실히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11) 하나님께서는 모든 목마른 사람이 와서 값없이 마시도록 초청하신다.

오호 목마른 모든 자야, 너희는 물들로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라. 또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너희 혼자체가 기름진 것을 기뻐하게 할지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와서 들으라. 그러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긍휼이니라(사55:1-3).

칼빈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을 보여 주는 다른 많은 구절에서 하듯이, 이 구절의 대상을 역시 선택받은 사람들로 제한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특별한 초청은 ‘목마른 모든 자’를 향한 것이다. 이 초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 곧 땅을 만드시고 사람을 그 위에 창조하신 하나님(사45:12), 앞의 구절에서 “땅의 모든 끝들이여, 나를 바라보고 이로써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자가 없느니라.”(사45:22)고 말씀하셨던 그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러한 사람에게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런 초청의 수신자는 이스라엘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분의 아들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이로써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그 언약에 참여한다(행13:34-38).

(12)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누구든지 구원받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 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요3:14-18).

핑크는 이 구절의 ‘세상’은 ‘전 인류’를 의미하지 않으며 여기서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최종적으로 분석하자면 여기의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의 세상’을 가리킨다.”라고 전형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을 편다(「하나님의 주권」, pp. 203-204).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세상’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본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그것만이 가장 분명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첫째, 이 구절이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는 점은 이 구절에서 두 번 사용된 ‘누구든지’라는 단어에 의해 확증된다. 만일 ‘세상’이라는 단어가 전 인류가 아닌 다른 것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면 ‘누구든지’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만일 ‘누구든지’가 정말로 ‘누구든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단어들은 아무 의미도 갖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주권적으로 선택받은 사람들만 믿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므로 바로 그런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둘째, 이 구절에 나오는 ‘세상’이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여기서 사용된 예표로 볼 때 분명하다. 광야에서 모세에 의해 높이 들려진 이 놋뱀은 뱀에 물린 모든 유대인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했지만 믿음으로 그것을 쳐다 본 사람들만 구원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자신의 피로 이루신 그 구원 사역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는 데 충분하지만 오직 믿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