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의 낙타들③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2. 11:19

(27) 예수님께서는 정죄받을 교리들을 가르치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 즉 구원받지 못한 거짓 교사들도 자신의 피로 사셨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교사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은 정죄받을 이단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에게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벧후2:1).

만일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이 구원받지 못한 거짓 교사들을 사셨고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성경이 명백하게 말한다면 제한 속죄라는 칼빈주의 교리는 땅 밑으로 추락한다.

(28)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

[우리는] 오히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려하심이라(히2:9).

다시 말하지만 이 성경기록은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2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하신다

[나그네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을 통해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이르도록 선택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화평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벧전1:2).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으로 해석하여 그것의 참된 의미 자체를 없애 버린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그분이 미리 보시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베드로가 ‘미리 아심’이라는 말을 쓰며 사용한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한 그리스어는 ‘prognosis’인데 그것은 지금도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예지’ 혹은 ‘예후’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의사가 질병에 대한 예후를 말할 때 그는 그 질병에 대한 정상적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의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미래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리 아심’의 교리는, 칼빈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 뜻을 재정의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과 사람이 택하는 것의 신비를 거의 다 설명한다. 물론 미리 아심보다는 선택에 더 많은 신비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과정 속에 ‘그분의 미리 아심’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미리 정하심’으로 재정의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준다.

칼빈주의자들은 ‘미리 아심’을 ‘미리 정하심’이라고 재정의한 뒤 그 말을 ‘미리 정하심’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고 시도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하는 사도행전 2장 23절을 사용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 두 개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정하신 계획’이 ‘미리 아심’보다 선행한다고 지적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은 ‘과’(and)이다. 사도행전 2장 23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 즉 정하신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and) 미리 아심’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미리 아심에 따라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오직 자신의 정하신 계획에 따라서만 선택하신다는 뜻이 아니며 미리 아심의 과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열등한 하나님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30)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심판받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지 주의하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줄로 여기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8:18).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에게 듣는 책임을 부과하셨다. 만일 그들이 듣고 하나님을 찾으며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없다.

(31)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로 오지 않으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5:40).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전적 타락’ 때문에 자기에게 올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 그분께 오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오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의 문제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주권적으로 선택받지 않았거나 정죄받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빛을 받았지만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셨다. 이 구절이나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들도 죄인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행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지(뜻)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잠정적으로 이 현 세상에서는 ‘100%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주권적’인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32) 믿음은 사람의 마음에서 온다

한편 그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가에 있는 것들은 말씀을 듣지만 그때에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니라. 바위위에 있는 것들은 들을 때에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잠시 믿다가 시험의 때에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요, 가시나무들 사이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내지 못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나 좋은 땅에 있는 것은 말씀을 들은 뒤 정직하고 선한 마음속에 그것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눅8:11-15).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믿음이란 죄인들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사람의 마음과 복음에 반응하는 것 간의 차이는 주권적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지의 문제라고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친다.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다른 네 유형의 인간의 마음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다 죄인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는 않는다.

첫째 유형의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마귀가 와서 그가 마음속으로 믿고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것을 빼앗아간다. 마태복음 13장 19절은 ‘어떤 사람이 왕국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 사악한 자가 와서 그의 마음속에 뿌려진 것을 채어 가나니 이 사람은 길가에 씨를 받은 자’라고 이것을 설명한다.

첫째 유형의 사람은 복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채어 갈 수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복음이 차별 없이 죄인들에게 선포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들어 보려는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복음 전도지를 읽거나 예배에 참석하거나 복음적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마귀가 와서 그의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을 즉시 빼앗아 간다(막4:15).

둘째 유형의 죄인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과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아서 쉽게 뽑히기 때문에 ‘시험의 때’에 떨어져 나간다.

많은 죄인들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더 많이 배우기 원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열광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와 ‘믿음’은 매우 얕다. 그들은 복음을 온전히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따라서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러고 나서는 곧 친구나 친척으로부터 겪는 문제들로 인해 떨어져 나가거나 자기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실족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벌(유기)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것은 죄인 자신의 책임에 대한 것이다.

셋째 유형의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 등에 의해’ 그의 마음과 삶은 숨이 막힌다. 마가복음은 이것을 가리키며 이들은 ‘다른 것들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막4:19)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사례는 복음이 선포될 때 종종 일어난다. 복음에 관심을 보이고 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까지 하는 많은 죄인들이 영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자기들의 마음과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숨 막히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떨어져 나간다. 이 경우에도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영벌(유기)의 산물이라는 단서는 전혀 없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죄인 자신의 반응과 행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 유형의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고 지키며 인내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네 부류의 죄인들 중에서 진실로 구원을 받는 사람을 보여 준다.

(33)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다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들으시고 그로 인해 놀라사 돌아서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내가 결코 발견한 적이 없노라, 하시니라(눅7:9).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안에서 주권적 은혜라는 꾸러미의 일부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분명히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교리를 지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시며 이 믿음을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놀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믿음이 그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왜 예수님은 그 사람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는가?

(34)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엡2:8-9).

이 구절들은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믿음이 행위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친히 사신 구원의 선물을 죄인이 공짜로 받는 수단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려고 우리가 내미는 손’이다. 칼빈주의자들의 추론과는 다르게 선물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며 그 안에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선물은 100% 그것을 사서 주는 사람으로부터 온다. 받는 사람이 그것을 받는다고 해도 선물을 수용하는 그 일로 인해 자랑할 것이 그에게는 하나도 없다.

(35) 사람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한다

[그가 오는 것은]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여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이 다 정죄를 받게 하려하심이라(살후2:10-12).

7년 환난기에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주권적으로 영벌(유기)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개개인이 바르게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36) 믿는 자는 자신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열심을 내어 너희가 부름 받은 것과 선택 받은 것을 확고히 하라. 너희가 이것들을 행하면 결코 넘어지지 아니하리니(벧후1:10)

이 구절을 구원받은 사람에게 적용해야 하는지 혹은 거의 구원받은 사람에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관계없이 칼빈주의자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과 선택이 인간에 의해 확고히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한 선택은 하나님에 의해 단독으로 결정되고 그분은 그것을 불가항력적으로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함’과 ‘믿음의 선물’을 통해 죄인에게 주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37) 설교자는 자신의 삶과 사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많은 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

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으려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사람이라도 구원하려함이라(고전9:19, 22).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희생하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미리 예정되고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바울의 전도 행위가 더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그의 행위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게 하는가?

(38) 바울은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공포를 알고 있기에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밝히 드러났고 또 너희 양심에도 밝히 드러났음을 나는 또한 확신하노라(고후5:11).

바울이 칼빈주의자였다면 선택받은 자들은 설득할 필요가 전혀 없고 또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설득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죄인은 자신의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으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인 다시 태어남이나 ‘믿음의 선물’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설득을 이해하거나 거기에 반응할 수 없을 것이다.

(39) 구원은 소홀히 여겨질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인데(히2:3)

바울의 이런 권면은 칼빈주의 교리에 비추어 보면 말이 안 된다. 칼빈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선택이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선택받은 개인의 문제라면 어떻게 선택받은 사람이 구원을 소홀히 여길 수 있는가? 또한 선택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가?

(40)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고 권면을 받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 있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오히려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날마다 서로 권면하여 너희 중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이는 우리가 우리의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고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니라(히3:12-14).

선택받은 자가 이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선택은 죄인 자신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혹은 믿든 믿지 않든 그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리고 그가 분명히 보존되기 위해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고 주권적으로 신분이 유지된다면 이 권면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권적으로 선택받아 저항할 수 없도록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으며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41)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 간자도 자기 일들을 그쳤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지니 이것은 아무도불 신이라는 그 동일한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않게 하려함이라(히4:9-11).

과연 어떻게 이 권면이 칼빈주의 방식의 선택에 적용될 수 있을까? 이 구절에 따르면 구원의 안식이란 모든 사람이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며 성경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의 ‘주권적’ 선택 교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예정되며 그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선택권이 전혀 없고 확실히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42)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신다

그것은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었느니라(요1:9).

성경은 사람이 어둠 속에 있고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신다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이 말들의 의미를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이 보여 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빛으로 이끄시며 또 그들이 그 빛에 반응하면 그분께서 더 큰 빛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예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주신 빛이 다른 사람에게 주신 빛보다 더 유효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신다고 말한다.

(43) 성령님께서는 세상을 꾸짖으실 것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요16:8-11).

칼빈주의자들은 “죄로 인해 세상을 꾸짖는 것은 성령님께서 현재 이루시는 사역이 아니다.… 성령님은 주권적으로 운행하시며 그분의 사역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라고 주장한다(핑크, 「하나님의 주권」, pp. 75, 77).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도 명료하게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님께서 참으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즉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꾸짖으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령님은 이 시대에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 모두를 향해 특별한 일을 하고 계신다.

이 구절의 ‘세상’을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한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여기의 ‘세상’을 ‘선택받은 자들’로 바꾼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라.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선택받은 자들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함은 선택받은 자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물론 칼빈주의에 따르면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은 죄에 대한 확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구절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자들, 즉 영적으로 죽고 눈먼 상태에 있는 자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오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성령님께서 죄를 확증해 주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믿지 않는 이유는 오직 몇 사람만 믿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그분을 거역할 능력을 갖게 하셨고 그 결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창조 이래로 그러한 능력을 계속해서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4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내가 땅에서부터 들리면 모든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리라, 하시니라. 그분께서 이것을 말씀하사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지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시니(요12:32-33)

여기서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끝까지 이끄신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잘못도 아니고 그분의 의도도 아니다. 세상에 들어오는 사람은 100% 다 빛을 받으며 주님께로 이끌림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야,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 말씀들은 칼빈이 삼킨 낙타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나의 친구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이러한 큰 낙타들을 삼키지 말라. 성경기록들을 삼키거나 사전에 형성된 철학적 틀 안으로 억지로 그것들을 넣으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믿기 바란다. 하나님의 선택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지만 그것은 결코 칼빈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선택이 아니다. 칼빈주의의 주권적 선택을 받아들이면 결국 모기에는 긴장하고 낙타는 삼키게 되는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격렬히 미워하시고 정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