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오도록 초청을 받는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며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할지니라(계22:17).
이 구절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칼빈주의 교리를 반박한다. ① 구원은 주권적으로 미리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아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주님께 가서 생명수를 취할 수 있다]. ② 하나님은 유효하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지 않으신다.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생명수를 주신다]. ③ 죄인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주님께 가서 생명수를 취할 수 있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노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으니 이는 만민에게 동일한 주께서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심이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롬10:8-13).
이것은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따라서 주권적으로 선택받고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만 주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신의 신학을 성경 속으로 집어넣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학은 성경기록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주권적 선택, 의지의 속박, 주권적 부르심이라는 칼빈주의 교리가 맞는다면, 이 구절들은 실제로 그 안의 단어들이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죄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복되고 영광스럽게 초청하는 것은 미리 선택된 일단의 죄인들만을 위해 예정된 것으로 바뀌게 된다.
믿음에 관한 한 이 구절들은 믿음이 모든 죄인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죄인들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그들은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전적으로 불의하고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그들이 복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15)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거나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어둠 속에 거하지 않게 하려함이라(요12:4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
성경은 구원이 ‘누구든지’를 위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으며, 성경을 믿는 성도들 - 대부분의 비신학자들, 보통 사람들 - 은 이런 구절을 읽고는 어떤 죄인이든 모든 죄인이 이 시간 그리스도께 오도록 초청을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 올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신약 성경의 말씀을 칼빈처럼 해석하는 것은 그 말들 자체를 아무 의미 없이 만드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누구든지’는 실제로 ‘누구든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의 ‘누구든지’가 ‘선택받은 자들 중에서 누구든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한 입으로는 구원이 실제로 ‘누구든지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제공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입으로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앞의 내용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는 실제 의미에서 여기의 ‘누구든지’가 ‘선택받은 자들 중에 누구든지’라는 주장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것을 우리는 궤변이라고 말한다.]
(16)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와서 생명수를 마시라고 초청하셨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기록이 말한 것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7-38).
여기의 초청 역시 우리가 다른 많은 구절에서 보았던 초청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이것 역시 ‘누구든지’를 위한 초청이다.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넘치게 베푸시며 구원의 필요를 깨닫는 모든 죄인들이 자기에게로 와서 만족을 누리라고 초청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요16:8).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일한 요구 조건은 사람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수에 목말라야 하고 그 물을 얻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예수님께로만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얼마나 쉽고도 간단한 일인가!
(17) 예수님께서는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안식하라고 초청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11:28-30).
아마도 이것보다 더 넓은 구원의 초청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누구든지 안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오도록 초청을 받았다. 이것은 주권적으로 미리 예정된 개인들, 즉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제한되는 초청이 아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 주시는 마음은 모든 죄인들에게 확대되고 그들 모두를 구원하시는 것이 진실로 그분 마음의 소원이다.
(18)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며 그분께서 자기 땅에 오셨어도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이나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느니라(요1:10-1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유다 민족에게 거절당하셨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받는다. 여기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구원은 ‘믿는 자들은 다’와 ‘누구든지’의 문제이다. 먼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이 믿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원인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칼빈이 가르쳤듯이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다시 태어나게 한 뒤에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또한 우리는 13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을 ‘사람의 뜻이나 의지’라고 정의할 수 없음에 주의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만일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구원이 사람의 뜻에서 나옴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러한 인간의 논리를 반박한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새로운 출생이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않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시 말해 13절은 새로운 출생은 인간 의지의 산물이 아님을 의미한다. 인간은 새로운 출생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인간은 구원이 일어나게 의지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믿는 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것은 은혜의 기적이다.
(19)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될 것을 정하셨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누구든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다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모든 죄인들에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멸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또한 ‘그분을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정죄 받는다는 것’을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게 선포하심으로써 그들을 조롱하시는가? 어떤 칼빈주의자들은 ‘극단적 칼빈주의자’와 ‘온전한 칼빈주의자’라는 두 부류로 칼빈주의자들을 나누지만 사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결코 자기들이 극단적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들이 ‘순전한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은 한 입으로는 하나님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요한복음 3장 16절의 ‘누구든지’가 ‘실제로 모든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가 다른 입으로는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하시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으며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받은 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분명하게 다르다고 말하는 것을 빼고는 매우 고무적으로 들린다. 이러한 논쟁을 들었을 때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확실하게 “이것이 대체 무슨 종류의 이상한 사랑인가? 하나님이 나를 놀리시나? 하나님이 고양이가 쥐에게 하듯이 나를 가지고 노시는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멸망받지 않는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만일 내가 선택받았다면 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시 태어날 것이고 그 뒤에 ‘믿음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지만 만일 내가 선택받지 않았다면 나는 범법들과 죄들 가운데 죽어 있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빛도 구원에 유효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무슨 사랑인가?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즉시 “하나님께 대항하며 그렇게 대답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자신이 정말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그분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도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 묻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비성경적인 것도 아니다.
(20)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이행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왜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늦추시는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아직까지 다시 오시지 않는가? 이 구절은 어떤 사람이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한다. 다른 성경기록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멸망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축하며 거절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주권적 하나님께서 이것이 가능하게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길 그만두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이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정의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정의를 옹호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은 선택받은 자들 중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해석한다. 핑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멸망시키기를 원치 않는 그 ‘아무도’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바로 앞 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 곧 우리를 가리킨다.”라고 말한다(「하나님의 주권」, p. 207).
이 해석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시키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 구절이 유일하게 이 한 구절뿐이라면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의 해석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사야서 45장 22절, 마태복음 11장 28절, 요한복음 3장 16절, 요한복음 6장 40절, 로마서 11장 23절, 디모데전서 1장 15-16절, 디모데전서 2장 3-4절과 요한계시록 22장 17절 등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고 말하는 성경기록들 중 일부이다. 따라서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나오는 ‘우리를 향해’의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일반적인 인간 모두’라고 믿는 것은 합당하고도 성경적이다.
둘째, 만일 베드로후서 3장 9절이 단순히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 중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심을 뜻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부르심이라는 칼빈주의 교리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상 이 구절에 매우 이상한 언어가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하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2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눈앞에서 선하며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니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3-4).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 구절이 단순하게 의미하는 바를 벗어나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을 이유가 있는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며 그분께서 바라시는 바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분명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분 자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게 정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베드로후서 3장 9절과 디모데전서 2장 3-4절의 분명한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물리치기 위한 온갖 종류의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열성적 칼빈주의자들만 그런 식으로 성경기록을 해석하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소망적 의지’와 ‘결정적 의지’라는 두 가지 유형의 의지(뜻)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지만(소망적 의지)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구원받도록 정하셨다고(결정적 의지) 주장한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3장 9절과 디모데전서 2장 3-4절에서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지 그분의 ‘소망적 의지’일 뿐이다. 반면에 그분의 ‘결정적 의지’의 범주 안에 들어간 선택받은 죄인들만 실제로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다시 태어난 뒤 ‘믿음의 선물’을 받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칼빈주의 교수에게 이것은 ‘마술적 주문’ 즉 궤변에 불과하다고 말하자 그는 매우 화를 냈지만 나는 이런 표현 외에 그것을 달리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물론 디모데전서 2장 3-4절과 베드로후서 3장 9절을 칼빈주의와 일치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는 실제로 문제를 풀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은 사실 하나님의 ‘소망적 의지’가 성취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 - 그분의 ‘결정적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소망적 의지’ - 는 인간에 의해 정말로 거부될 수 있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에게 ‘주권적이지 않은 의지’ 즉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원하시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의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22)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로다. 내가 죄인들 중의 우두머리니라. 그러나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안에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하심이라(딤전1:15-16).
이런 구절의 ‘죄인’을 선택받은 자로 한정하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은 다른 구절들을 자기들 뜻대로 해석하듯이 이 구절도 다른 방식으로 잘못 해석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구절의 단어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예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보통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절은 또한 죄인들 중의 우두머리인 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이 구원받기 위해 그분께로 가는 모든 죄인들에게 위로가 됨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의 우두머리인 바울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면 그분은 누구라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 데 가두어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하심이라(롬11:32).
이 구절 전반부에 나오는 ‘모두’가 정말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면 다른 어떤 의미로 이 구절의 후반부를 해석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을 믿지 않는 데 가두어 두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그분의 주권이며 그분의 확실한 뜻이다.
(24)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서 화해 헌물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 죄들로 인한 화해헌물이시며 우리 죄들 뿐만아니요 또한 온 세상죄들로 인한 화해헌물이시니라(요일2:2).
이 구절은 요한이 ‘내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른 사람들과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보내어진 글이다(요일2:1). 그러므로 분명히 이 구절은 구원받은 자들, 즉 다른 곳에서 ‘선택받은 자’(골2:12; 딤후2:10)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보내어졌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장 2절이 그리스도는 ‘우리 죄들뿐만 아니요 또한 온 세상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고 말할 때 성경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죄들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여기의 ‘온 세상’은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25)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는데 이것은 정해진 때에 확증될 것이며(딤전2:6)
성경에서 ‘모든’이라는 말은 앞뒤 문맥에 따라 정의되어야 하며 여기의 ‘모든’은 문맥상 ‘세상의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디모데전서 2장 3-5절을 보라.
이것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눈앞에서 선하며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니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는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다는 것은 분명히 그분의 속죄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26)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고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하시고 화해하게하는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하시며 그들의 범법들을 그들에게 책임지우지 아니하시고 화해하게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느니라(고후5:18-19).
이 구절은 대속의 교리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18절은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절은 하나님께서 이 화해의 일을 온 세상으로 확대하시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범법들을 그들에게 책임 지우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성경기록의 분명한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결코 칼빈주의자들이 논쟁하듯이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핑크는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논쟁한다.
속죄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면 모든 사람이 진 빚은 이미 취소된 것이다(「하나님의 주권」 p. 62).
그리스도의 속죄가 보편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는 것은 결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화해하게 하는 말씀’ 곧 복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구절은 또한 믿는 자들이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는 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막16:15-16; 벧후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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