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동일하지는 않다 >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다양한 교리와 실행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결코 어떤 사람이 단지 칼빈주의 신학의 일부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를 진리의 원수로 생각하지 않는다. 머레이(Iain Murray)가 쓴 「스펄전과 극단적 칼빈주의자들: 복음 선포를 위한 전쟁」(Spurgeon vs. Hyper-Calvinists: The Battle for Gospel Preaching,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95)이라는 책은 칼빈주의자들 간의 차이를 탁월하게 설명한다. 영혼 구원에 힘쓰며 매우 복음적이고 선교적인 열정을 가진 칼빈주의자들이 있고 이러한 것들을 비난하는 칼빈주의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칼빈주의자들이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을 제공하거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칼빈주의를 그릇되게 해석한다. 머레이의 정의에 의하면 이들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다.
칼빈주의자였던 스펄전은 성경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을 거부하였고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만큼 지혜로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다는 것과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모순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판단력이 취약해서 생기는 일일 뿐이다. 이 두 개의 진리는 서로 모순될 수가 없다. 따라서 만일 내가 어떤 곳에서 모든 것이 미리 정해졌다고 말하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만일 내가 다른 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도 사실이다. 두 개의 진리가 서로 모순될 수 있다고 상상하도록 나를 유도하는 것은 나의 어리석음이다. 나는 이러한 두 개의 진리가 현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용접되어 붙여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원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들은 거의 평행으로 달리는 두 개의 철로이며 멀리서 그것들을 쫓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그것들이 합쳐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말로 합쳐지게 되어 하나님의 왕좌 근처에서 영원 안의 어딘가에서 만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모든 진리가 샘솟는다(스펄전, 「뉴파크스트리트 강단 설교」(New Park Street Pulpit), 4권, 1858, p. 337).
스펄전은 성경적 모든 난해 구절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신학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거의 병적으로 하나로 일치하는 신념, 즉 모든 것을 함께 모아 중국 퍼즐처럼 사각형을 만드는 신념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혼을 편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자기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만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많은 부분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성경에서 찾은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비록 그것들 모두를 일치시키는 하나의 이론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도 두 개든지 스무 개든지 이만 개든지 그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스펄전, ‘믿음’(Faith), The Sword and Trowel, 1872).
이런 문제에서 스펄전은 칼빈주의자였지만 사실 그는 칼빈주의자 이상이었다. 그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었다. 스펄전에 관하여는 당신이 그를 찌른다면 그의 피조차 ‘성경의 피’였을 것이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 그는 신학을 사랑했고 신학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아이같이 단순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스펄전은 칼빈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위대한 복음주의자였으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구원받도록 촉구해야 함을 믿었다. 스펄전은 복음이 선포된다면 더 많은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관점과 자신의 복음 선포를 일치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가능한 한 많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기도와 같은 도구가 영혼들을 더 많이 수확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설교 전에 또 매주 월요일 밤에 그리고 다른 일들이 있을 때에 기도 모임을 가졌다. 때때로 그가 시무하던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 교회의 강당이 다 차면 한 그룹은 아래층 기도실에 남아 그가 설교하는 동안 기도하곤 하였다. 이것은 그 교회의 사무 비서인 윈콜(Hannah Wyncoll) 부인으로부터 2000년 6월 2일에 받은 이메일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스펄전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가 지은 유명한 책 「영혼 구원자」(Soul Winner)는 지금도 인쇄되고 있다. 스펄전의 교회에는 ‘많은 회중들 가운데서 회심하는 영혼들을 찾아내고 말씀 선포로 감동을 받은 사람들을 바로 결단하게 만드는 것을 자신들의 특별한 일로 여겼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영혼 구원자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스펄전이 ‘결단’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주목하라. 이것은 사람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한 형제에게 나는 사냥개라는 명칭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상처 입은 새들을 집어 올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월요일 밤 기도 모임에서 그는 강단 위에 있는 나에게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사라졌고 나는 곧바로 그가 건물의 바로 다른 끝에 있는 것을 보았다. 모임이 끝난 뒤 나는 왜 그가 그렇게 급하게 나갔는지 묻자 그는 회중 속에 있던 한 여인의 얼굴에서 가스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주 슬프게 보였기에 그는 걸어가서 그녀에게 가까이 앉은 뒤 예배 후에 그녀에게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참이었다(스펄전, 「풍성한 수확」(The Full Harvest), p. 76).
이를 통해 우리는 스펄전이 영혼 구원과 전도에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칼빈주의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확신이 그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음을 본다.
한편, 그 시대의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설교나 잡지에서 스펄전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반대하였으며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오도록 초청하는 그의 목회를 비난하였다. 그는 오늘날 여러 교회들에서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예배 시간에 실제로 강단 앞으로 나오게 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들을 그리스도께 오도록 초청했으며 그 당시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 교회의 대형 강당의 모든 좌석에 앉아 있던 죄인들이 구원받았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스펄전 시대의 유명한 칼빈주의 신문 중 하나는 「토기」(Earthen Vessel)였다. 1857년에 거기에 실린 글에는 “구원받을 만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설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대담한 말이 있었다. 아마도 그 말은 스펄전이 선포했던 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 당시의 많은 칼빈주의자들에게 스펄전은 어리석은 친구였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여러 종류의 칼빈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들을 하나의 같은 틀로 묶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나는 신실하게 영혼 구원에 힘쓰는 여러 칼빈주의자들을 알고 멀리서 그들과 교류하는 특권을 누렸다. 나는 칼빈주의 신학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들과 강력하게 의견을 달리 하지만 그들을 원수나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나는 신학 면에서 우리의 차이는 우리가 같이 사역하거나 같은 교회에서 지체로 모이는 것을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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