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칼빈주의의 주요 오류들①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1. 09:45

< 칼빈주의의 주요 오류들 > 

(1) 칼빈주의는 성경적 중생에 대한 간증이 전혀 없고 점진적 과정의 구원이라는 이단 교리를 가르친 칼빈에 의해 개발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복종해야 하며 이단자들을 표시해서 드러내고 피해야 한다(롬16:17; 딤후2:16). **어거스틴과 칼빈은 성경과 비교했을 때 매우 명백하게 이단자이다.

** 이것은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들릴지 모른다. 클라우드는 자신의 책에서 “Augustine and John Calvin were most definitely heretics.”라고 말하였는데 그가 이들을 이단자라고 한 것은 그들의 교리가 성경에 어긋남을 표현한 것이다. 성경에서 원래 ‘이단’이라는 말은 다른 파당 혹은 다른 파당의 사상을 말하며 클라우드는 이런 의미로 ‘heretics’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단 한 번도 유아 세례와 ‘세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천주교 이단 교리를 반박한 적이 없다. 그는 구원이란 점진적 과정이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하지만 구원 자체는 일순간에 태어나는 출생이다(요3:3). 구원은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며(엡2:1) 어둠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일순간에 옮겨지는 것이다(골1:13). 이렇게 일순간에 출생하는 구원 외에 다른 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적이 없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첫 번째 오순절 날에 3,000명이 구원받은 것(사도행전 2장),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의 전도에 의해 구원받은 것(사도행전 8장), 사울과 고넬료와 루디아와 빌립보 감옥 간수의 회심 등(사도행전 9, 10, 16장)이 모두 일순간에 구원이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

그런데 칼빈은 한 번도 이런 회심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는 “세례의 효력이 누가 세례를 주느냐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처럼 로마 카톨릭 시스템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가르쳤다(갈리아 신앙 고백 1559, 28항). 이로써 그는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물세례에 의한 중생을 계속해서 믿었는데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거짓 복음이다.

칼빈은 또한 어거스틴의 삶과 작품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에 구원이 점진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어거스틴은 소위 자기의 ‘동산 체험’이라 불리는 것과 물세례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점진적 회심의 시작 단계라고 말한다(「어거스틴: 그의 삶과 영향」, David Beale, Historical Theology In-Depth, 2013, 1:334-50). [‘동산 체험’에 대해서는 95쪽의 각주를 참조하기 바람.]

현존하는 칼빈의 작품 가운데 그의 회심을 기록한 것은 한 군데에서 발견되며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회심에 의해 내 생각을 누르시고 무언가를 가르치실 수 있는 형태로 내 생각을 이끄셨다(「시편 주석」 서문, 1557).

이에 대해 비일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볼 때 이런 회심은 단순히 지적으로 조명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은 회심, 회개, 중생을 모두 같은 것으로 여기면서 점진적 구원을 가르친다. 칼빈은 ‘회심의 시작’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는 이것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다고 기록한다(「기독교 강요」, 2권 3장 6항).… 칼빈은 ‘전적 회심이란 회개라는 말로 이해된다.’라고 말한다(「기독교 강요」, 3권 3장 5항).… ‘다시 말해 나는 회개가 회심이라고 이해한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목표로 지정하시는데 그들은 그들의 전 생애 동안 이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야만 한다’(「기독교 강요」, 3권 3장 9항).

칼빈은 늘 어거스틴에 의존하면서 “어거스틴이 내 속에 전적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내가 내 믿음의 고백을 쓰기 원한다면 나 자신이 완전히 만족해하면서 완벽히 충실하게 그의 책들에서 자료를 얻어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칼빈의 칼빈주의」(Calvin’s Calvinism), Henry Cole, Reformed Free Publishing, 1987, p. 38).

(2) 칼빈주의는 신학을 철학으로 바꾼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성경의 진술을 벗어난다. 칼빈은 훈련을 잘 받은 철학자였으며 그의 「기독교 강요」는 매우 철학적이다. 칼빈은 아주 젊었을 때 개신교로 새롭게 개종한 이후에 곧바로 그 책을 처음 저술하였는데 당시 그의 마음은 개종 전에 천주교 사제로서 배웠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참된 신학은 단순히 성경을 믿고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철학에 대해 또 그리스도의 단순함을 떠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다(골2:8; 고후11:3). 철학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떨어진 진리에 이르기 위해 인간의 지성과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경우, 칼빈이 성경기록의 실제 진술들을 넘어서서 인간의 추론에 의한 교리를 만들어낸 것,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핑크는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미리 정하셨다면 그분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서 영원히 불 호수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정하셨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일반 명제를 인정한다면 이 특별한 결론은 불가피하지 않은가?”(「하나님의 주권」, p. 84)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핑크의 명제는 옳지 않고 따라서 결론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진술을 넘어선 것이다. 성경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신다.”라고 말하는데(엡1:11) 이것은 실제로 그분께서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시는 것과 같지 않다. 그리고 핑크처럼 하나님께서 많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고 정하셨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잘못된 토대 위에 신학을 세우는 것은 인간의 논리가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떠맡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또다시 핑크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다면 그들에게 구원의 수단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 목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문제이다.”(동일 문서, p. 83)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추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정말로 원하시며(딤전2:2-6; 벧후3:9) 그 일을 위해 방책을 실제로 주셨지만(요일2:2) 동시에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사람에게 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요3:16).

칼빈주의의 철학적 접근에 대한 또 다른 예가 있다. 핑크는 “세상이 창건된 때부터 하나님께서 누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확실히 미리 아시고 미리 보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거절할 것으로 자신이 미리 아신 사람들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시고 또 태어나게 하시면서 그분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영벌(유기)에 이르도록 창조하셨다.”라고 말한다.(동일 문서, p. 82).

이 진술에 대한 권위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 아니라 핑크라는 사람의 인간적 추론이다. 핑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foreknowledge)을 미리 의도하심(fore willing)으로 혼동하였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이 성장할수록 그들에게 많은 선택권과 더 큰 자유를 주며 그들이 실수할 것과 그러한 실수의 결과들이 무엇인지 미리 안다. 자녀들이 잘못하는 경우 그것은 부모가 그것을 미리 의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주의가 간단하지 않음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칼빈주의는 오히려 매우 복잡하다. 헌트는 칼빈주의에 대해 두꺼운 책을 써 가며 화이트와 논쟁을 벌였는데 화이트는 종종 헌트가 매우 지적이고 열심히 이 주제를 연구하긴 했지만 칼빈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칼빈주의의 복잡성과 철학적 특성을 강조해서 보여 준다. 그래서 결국 칼빈주의는 엘리트들의 우월주의가 되고 만다. 화이트가 헌트와 논쟁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살펴보라.

양립주의(compatibilism), 단독설(monergism) 대 협력설(synergism), 선택하시는 은혜(electing grace) 대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 대 일반적 부르심(general calling), 유효한 속죄(effective atonement) 대 가설적 속죄(hypothetical atonement), 자유주의자의 자유 의지 대 의지의 속박 등.

또 다른 칼빈주의자들은 객관적 은혜와 주관적 은혜,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 아담의 죄의 중재적 전가 대 즉각적 전가, 타락 이전 예정론, 타락 이전 선택론, 타락 이후 선택론, 소망적 의지 대 작정적 의지, 선행하는 가설적 의지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칼빈주의가 건전한 성경 신학이라기보다는 철학에 더 가깝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단순함을 떠난 ‘인간의 이론’이라고 믿는다.

(3) 칼빈주의 체제는 이 세상에서는 일치시킬 수 없는 것들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 사도행전 13장 48절과 13장 46절을 상고해 보자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칼빈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절이다.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

칼빈주의자들은 “보라, 믿는 자들은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예정된 사람들이라는 분명한 진술이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실제로 이 절이 말하고 있는 것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라는 말을 더하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단독으로 임의로 선택하신 자들은 다 믿더라.”가 되도록 이 절을 잘못 해석한다. 바로 이것이 칼빈주의의 문제이다. 이런 입장이 되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인간의 의지의 실행을 허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무시되며 그 결과 그러한 해석을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그 절 자체에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46절에서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본다.

그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되어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먼저 말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너희 자신을 영존하는 생명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판단하므로, 보라, 우리는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노라.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관련이 있음을 본다. 이 절의 분명한 가르침에 의하면, 여기의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자들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혹은 주권적으로 영벌(유기)에 이르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 믿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원한 형벌인 유기에 내주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이 이것을 거절했다고 단순하게 말했다.

■ 요한복음 6장 37절과 6장 40절을 상고해 보자

요한복음 6장 37절은 칼빈주의자들이 매우 좋아하는 증거 본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자는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를 찾는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만일 이 구절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 단지 구원받도록 주권적으로 미리 선택된 특별한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절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원받도록 몇 사람만을 미리 선택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바로 그 사람들만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 절은 단순히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올 것이라는 점을 말할 뿐이다.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백하게 3구절 뒤에 나오는 40절에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니 곧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 것이니라.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6:40).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아들을 볼 수 있는 자’는 선택받은 자라고 주장하지만 이것 역시 ‘선택받은 자’라는 그들의 말을 그 구절에 끼워 넣어야만 가능한 해석이다.

40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이 구원받는 것임을 본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인간이 구원을 선택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들도 이에 동의한다.

■ 요한복음 6장 44절과 12장 32절을 상고해 보자

요한복음 6장 44절은 칼빈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증거 본문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내가 일으키리라.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찾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 3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땅에서부터 들리면 모든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심을 본다.

이렇게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칼빈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너무나도 명백한 많은 성경기록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실제로 답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런 것들이 현 세상에서 적합하게 해결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단순히 이런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것들이 하나의 완벽한 신학 체계로 형성되도록 강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누군가를] 선택하시고(elect) 인간도 진실로 [무언가를] 택한다(choose). 하나님은 선택하시지만 또 동시에 모든 인간이 구원받도록 촉구하시므로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선택하시지만 또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게 하셨다. 하나님은 선택하시지만 그럼에도 어떤 죄인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런 진술은 모두가 똑같이 진실하며 성경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성경 자체가 하나로 풀어 주지 않으므로 현 세상에서 하나의 질서 정연한 신학적 패키지로 일치시킬 수 없는 것들을 일치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