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개혁주의 신학의 위험들⑤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5. 15:37

< 문자적 천년 왕국을 부정하는 위험 >

초기 종교 개혁자들은 오리겐의 비유 해석과 어거스틴의 교회/왕국 개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현시대의 대다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아직도 이런 접근 방식으로 인해 예언에 관한 한 덫에 걸려 있거나 불구가 되어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세대주의적 해석 방법은 성경의 예언들을 평범하고 분명하며 정상적인 감각으로 해석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또한 이 세상의 끝에 한 번의 부활이 있고 또 한 번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 구원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 마지막 날에 일으켜져서 모두 한 번에 심판받는다고 이해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심판들과 천년의 기간을 두고 분리된 두 개의 부활 (의로운 자들을 위한 부활과 불의한 자들을 위한 부활)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불테마(Harry Bultema, 1884-1952)는 아이오와주와 미시간주에서 크리스천 개혁 교회들을 목회하였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자였지만 예언을 연구하면서 구약과 신약 둘 다가 단 한 번의 일반적 부활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자신의 저서 「마라나타 - 성취되지 않은 예언 연구」(Maranatha - A Study of Unfulfilled Prophecy)를 통해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원래 처음에 네델란드어로 출판되었다가 1985년에 크레겔(Kregel) 출판사에 의해 재발행되었습니다. 첫째 부활에 대한 그의 논의는 매우 통찰력이 있으며 이런 주제를 다룬 세대주의자들의 대부분의 글보다 더 상세합니다. 불테마는 또한 ‘종교 개혁부터 오늘까지’라는 제목의 멋진 장을 썼으며 거기에서 많은 개혁자들을 포함하는 여러 명의 전천년주의자들을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성경을 문자적이고 정상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 위험 >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언어는 그런 방식으로 정상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우리는 성경 기록자들이 어떤 경우에는 문자적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 주는 비유적 언어를 종종 사용한 것을 인정합니다. 성경은 언어의 평범한 사용, 단어들의 사용법, 역사적 문화적 배경, 구절의 문맥 그리고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 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만 합니다(딤후2:15).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도가 진리의 영을 완전히 의지하면서 연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성도들의 마음과 중심에 환한 조명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요5:39; 16:13-15; 고전2:9-16). 본성에 속하여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들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 그는 그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고전2:14). 그의 마음은 마귀에 의해 가려졌습니다(롬3:11; 고후4:3-4).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의미하시며 친히 의미하시는 것을 문자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우리를 속이기 위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그분의 말씀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세 가지 중요한 부문에서 문자적 해석을 버렸습니다.

(1) 왕국의 예언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게 될 미래의 왕국 시대를 놀랍도록 자세히 설명해 놓은 성경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다니엘서, 에스겔서 그리고 다른 모든 대언서들에 나타나는 성경의 위대한 예언들을 읽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예언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런 예언들이 절대로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습니까? 대언자들이 실수를 범했습니까? 그들의 예언들이 어떤 식으로든 다 무효가 됐습니까? 개혁주의 신자들은 왜 성경이 평이하게 말하는 왕국의 이런 예언들을 정상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합니까?

(2) 환난기와 재림의 예언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 신자들은 재림과 관련된 성경의 예언이 과거에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고 믿는 자들의 캠프에 가입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혹은 모든 예언이 과거에 이미 성취됐다고 믿고 특히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이 곧 재림의 예언의 성취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7년 환난기와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런 위대한 예언들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이미 성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런 주요한 예언 사건들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7년 환난기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것이 이미 주후 70년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것이 이미 주후 70년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을 고려해 보고 그것들이 주후 70년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왕권을 가지고 이미 왔다는 개념과 얼마나 완전하게 모순되는지 보기 바랍니다.

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 그분은 땅으로 돌아오실 것이고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마24:25-30; 계1:7).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후 70년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②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 유대인들은 이 땅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다시 모이고 자기들에게 약속된 땅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마24:31; 렘16:14-15; 사43:5-7; 렘23:7-8; 31:7-10; 겔11:14-18; 36:24).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모이지 않았고 오히려 핍박과 죽임을 당하며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이 땅에 전쟁이 없을 것입니다(사2:4; 미4:3; 시46:9; 스9:10).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후 70년에는 강력한 로마 군대에 의해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④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회복될 것이며(행1:6),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위치할 다윗의 왕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사9:7; 렘17:25; 23:5-6; 33:15; 호3:4-5; 암9:11-15; 눅1:32-33).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도 파괴되었으며 다윗의 계보에 따른 왕도 왕좌에서 통치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유대인들에게 큰 구출이 있을 것이고 그때는 복이 넘치는 때가 될 것입니다(렘30:7-9; 겔34:25-31).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40년 전에 자기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배반한 유대인들에게 큰 심판이 닥친 불행한 때였습니다(물론 몇몇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었습니다).

⑥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그분의 백성들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겔37:26-28; 겔40:5-43:27).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때에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성전도 없게 되었습니다.

⑦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성전 안에 제사장이 있을 것이고 짐승의 희생이 드려질 것입니다(겔44:1-46:24).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때에는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제사장 직분을 폐지하였으며 짐승의 희생 제도도 폐지하였습니다.

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소유하고 거기에 정착할 것이며 그 땅은 다시 12개의 지파의 몫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땅 분배는 여호수아서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31)

천년 왕국 시기에 12지파가 차지할 모든 지역에 대한 설명은 에스겔서 47장 13-48장 29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일곱 지파의 땅은 성전의 북쪽에 놓이게 될 것이고(겔48:1-7) 나머지 다섯 지파의 땅은 성전의 남쪽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겔48:23-29).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에 당시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고 1948년에야 소수의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고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되었습니다.

⑨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이 선포될 것입니다(사52:7-10). 이 메시지는 다음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화평의 기쁜 소식 * 메시아가 시온에서 통치하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 *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셨다는 기쁜 소식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셨다는(되찾았다는) 기쁜 소식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후 70년에는 유대인들에게 오직

나쁜 소식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로와 화평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심판과 파괴와 멸망과 죽음 등의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⑩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사35장). 그 기쁨과 즐거움은 다음의 일로 인해 생길 것입니다. * 사막이 비옥해 질 것이다(1-2, 6-7절). *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구해 주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3-4절). * 다리 저는 자들과 눈먼 자들과 귀먹은 자들이 치유될 것이다(5-6절). 4) 야생의 악한 동물들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9절). * 그래서 그것은 큰 기쁨의 때가 될 것이다(10절).

이것은 주후 70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후 70년에는 다행히 로마의 침략을 견뎌 낸 유대인들이 기쁨과 즐거움 대신 슬픔과 탄식만을 겪었습니다(사35:10과 비교).

(3) 우리 주 예수님의 속죄의 범위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

문자적 해석을 저버린 개혁주의 신자들의 또 다른 문제는 “누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나?”라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해석에서 발견됩니다.

개혁주의 신자들도 보편적 용어들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자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음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보편적 용어들을 이해해야 할까요? 제한 속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세상’(요3:16; 6:51; 고후5:19)이 실제로 ‘세상’을 의미하지 않고 ‘온 세상’(요일2:2)도 실제로 ‘온 세상’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모든’(딤전2:6)이 실제로 ‘모든’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딤전2:4)이 실제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 (히2:9)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모두’(사53:6)가 실제로 ‘우리 모두’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 1841-1918)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던 시기에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 요한일서 2장 2절, 디모데전서 2장 6절과 같은 성경기록들에 있는 평범하고도 단순한 단어들 - 세상, 모든, 모든 사람 등 - 이 어떤 신학에 입문한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이해하는 의미가 아니라면 다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때문에 상당히 당황했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는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진리를 흐리게 하는 일 [즉 칼빈주의 신학]이 그런 말들을 문자적으로 보지 못하게 했다고 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세기 전에 그 당시 내 친구였던 고 보나르 박사(Horatius Bonar, 1808-1889)가 당시에 만연되어 있던 이런 이상한 잘못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유한한 생각이 무한한 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들이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들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거룩한 성경기록의 단어들을 신뢰하는 믿음이 방해받는 일이 생기는 것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해석의 규칙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성경 구절의 평범한 의미가 상식적인 의미라면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 그러면 오히려 비상식적인 의미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기록의 어떤 부분에 이르게 될 때 문자적 접근 방법을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제한 속죄를 믿는 이들은 위에서 언급된 규칙과는 다른 규칙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의미가 우리의 신학 체계와 모순이 될 때에는 다른 의미를 찾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의 독특한 칼빈주의 브랜드와 모순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300년도 더 전에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하고 이를 위해 그 단어들의 평범한 의미를 뒤엎어 버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정죄하시는 것과 자신의 선택받은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 이 두 가지와 그 말씀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그들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에서 공평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일관성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복음의 두 가지 평범한 진리가 서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두 가지가 다 평범한 진리일 때 당신은 그 둘 중 하나를 거부할 것인가? 영감으로 성경기록을 주신 하나님의 영의 지혜보다 당신 자신의 명철을 앞세우는 것은 대단한 교만이 아닌가? 겸손한 사람이라면 내가 그것들을 조화시킬 수 없을지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둘 다 진실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평범한 진리들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은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분께서 대신 죽으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주신 사람들을 위해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믿는 믿음을 획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주신 사람들을 정당하게 징벌하실 수 없다 등등] 그러나 과연 성경기록이 이 같은 그들의 말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개개인을 위해 죽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기록이 대체 어디에서 그분께서 모두를 위해 죽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기록이 대체 어디에서 그리스도께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오직 나머지 모두를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기록이 대체 어디에서 그분께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들은 제외하고 오직 자신의 양들, 즉 선택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런 말은 없다. 그렇다면 분명한 진리들과 명백한 본문들이, 불확실한 점들과 희미한 본문들에 대한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Richard Baxter, 「Universal Redemption of Mankind」, pp. 282-283.

그러고 나서 백스터는 이런 경우에 맞는 원리들을 능숙하게 적용했습니다.

이제 나는 알고자 한다. 당신은 성경기록이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면 그것을 믿을 것인가? 그리하고자 하면 그리하라. 그러나 혹시 당신이 성경에 기록된 단어들보다 더 명확한 것을 원한다면 혹은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좋은 단어들을 고안할 수 있거든 내게 말해 주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world)의 구원자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요4:42) 당신은 “그러나 그분이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가요?”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이다. 그분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성경은 그분이 ‘온 세상’(whole world)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라고 기록한다(요일2:2).
그러면 당신은 “그러나 그분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화해 헌물은 아니죠?”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이다. 그분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자이시다. 성경은 그분께서 온 세상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사람’(all men)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딤전2:4-6). 그러나 당신은 “성경은 그분이 모든 사람 개개인을 위해 죽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이다. 그분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개개인을 위해 죽으셨다. 성경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 개개인(every man)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한다(히2:9).
그러나 당신은 “그것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만일 성경이 선택받지 않은 어떤 사람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면 저는 믿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이다. 그분은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성경은 주님을 부인한 자들 곧 자기들 위에 신속한 심판을 가져오는 자들을 위해서도 주님께서 죽으셨다고 말한다(벧후2:1). 이 모든 것을 보여 주어도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는 믿음을 확고히 갖지 못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것을 시인했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진정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나는 그것이 사실임을 지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보다 어떻게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맞는 말인지요! 바로 이 사람은 성경기록의 분명함과 평범함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제한적 속죄 교리를 나중에 받아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