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비평

칼빈주의 비평 - 개혁주의 신학의 위험들⑧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4. 15. 16:02

< 성도들을 율법 아래 놓는 위험 >

개혁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 지켜야 할 규칙의 핵심을 공격합니다. 개혁신학은 성도를 신약의 갈보리산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약의 시내산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성화의 가르침 면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초점은 항상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는데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3:1)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개혁주의 신봉자들은 절대로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로 인해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칭의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바르게 주장합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실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칭의가 아니라 성화,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도들이 율법이라는 삶의 규정 아래 있다고 시종일관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개 그들은 성도들이 구약의 의식법(희생 제사 체제 등) 아래에 있지는 않지만 도덕법(십계명 등) 아래에는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개혁 신학자들의 압도적 특징은 성도들과 율법에 대한 관계의 교리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율법이라는 삶의 규정 아래에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완벽한 녹색 편지들」(The Complete Green Letters, 존더반 출판사의 클라리온 고전 시리즈에 속함)의 저자인 스탠포드(Miles Stanford)는 율법 준수를 옹호하는 칼빈주의자들이나 자기들의 신학을 수많은 성도들의 생각에 스며들게 하는 개혁신학 저자들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백스터(Baxter, R.), 벌코프(L. Berkhof), 뵈트너(L. Boettner), 보이스(J. Boice), 보나르(A. Bonar), 거쓰너(J. Gerstner), 길(J. Gill), 핫지(A. Hodge와 C. Hodge), 카이퍼(A. Kuyper), 로이드 존스(M. Lloyd-Jones), 마우로(P. Mauro), 오웬(J. Owen), 패커(J. Packer), 핑크(A. Pink), 라일(J. Ryle), 스토트(J. Stott), 밴틸(C. Van Til과 H. Van Til), 워필드(B. Warfield) 등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많은 사람들은 위대하고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분들이며 또 그렇게 여겨져야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려 한 것, 즉 그분의 대의를 위해 그들이 공헌한 것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성도가 구약의 율법이라는 삶의 척도 아래에서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할 때마다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성화를 위해서는 성도는 구약의 시내산이 아니라 신약의 갈보리산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가 있는 곳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헌팅턴(William Huntington)의 고전 「성도의 삶의 규칙」(The Believer’s Rule of Life)이란 책의 서문에서 베리(W. J. Berry)는 이 문제를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구속한 모든 자들을 구약의 모든 율법과 그에 따른 형벌 및 속박으로부터 완전하게 구출해 주셨다는 것은 신성한 사실입니다. 처음에 바리새인들과 일부 믿는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그 문제가 초기 사도들에 의해 곧바로 영원히 해결되지 않았더라면 이 진리를 거부한 일은 초대 교회에 만연했을 것입니다. 이 일의 핵심 문제들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다 논의되고 기록되었습니다(행15:1-35).
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를 책망하고 바로잡는 일을 통해 또 갈라디아에 있던 유대교 율법주의 주창자들을 책망하는 일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고 또 로마서와 히브리서에서도 최종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처럼 분명하게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로 들어와서 모세의 율법들을 끈질기게 가르쳤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 공회에서 그의 감독들은 유대주의와 기독교가 혼합된 법들을 갖춘 첫 번째 체계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교황들과 감독들의 계급 제도에 의해 중세 암흑시대 동안 확장되었고 그 뒤에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 의해 수정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독교계 안에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옳게 행하느냐, 그르게 행하느냐가 아니고 우리가 성도로서 섬길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이든 유대교/기독교 법이든 그런 법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정죄에 이르는 죄를 섬깁니다. 반면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운 아들들로서 의와 참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자유롭게 주님을 섬깁니다(롬6:15-23).

초기 세대주의자들도 이 문제를 잘 이해했습니다.

나는 율법에서 하나님께서 도둑질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배웠지만 내가 지금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내 것이고 나의 교육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 율법이 적용되는 육신(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율법을 향해 죽었습니다(롬7:4). [다비(John Darby), cited by Miles Stanford in the paper entitled, Arminius, To Calvin, To Paul-Man, Law, or Christ-Centered?]
통탄할 오류를 범하며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적용하는 어떤 선한 사람들은 좋은 의도로 그 일을 하지만 이 모든 원리는 거짓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율법이 삶의 규칙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 안에 죄를 가진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죽음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하는 능력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을 정죄할 뿐입니다. 율법은 결코 성화의 수단이 아니며 실상 죄의 힘입니다(고전15:56). [켈리(William Kelly), cited in 「The Complete Green Letters」 by Miles Stanford, p. 265]
율법이 지배하는 구약 시대는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끝났다!
우리는 참되고 실제적인 성화의 상부 구조가 율법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완전히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자들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굳게 믿고 그렇게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의’를 추구하는 문제(즉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율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 사람들이 ‘성화’를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하다고 하며 그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바로잡히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죄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율법이 성도의 삶의 규칙이 아니라는 것도 그와 동일하게 분명합니다.… 성도의 삶의 규칙을 말하면서 바울 사도는 “내게는 사는 것이 율법이요”라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라고 말합니다(빌1:21). 구원 이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규칙이고, 우리의 모델이고, 우리의 시금석이고,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하나님의 영감이 들어 있는 정경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율법(십계명)이 사람이 사는 동안 완전한 힘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저주한다고 믿습니다. 한 죄인이 율법(십계명)에 의해 생명을 얻으려 할 때 그것이 그를 어디에 놓는지 보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가 율법에 의해 자기의 길을 형성하려 할 때 그것이 그를 어떻게 만들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이 복음의 영을 따라 걸으면 그는 살인하거나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완전히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람이 모세의 율법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다면 복음의 영을 따르지 못하고 실족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매킨토시(C. H. Mackintosh), 「The Mackintosh Treasury-Miscellaneous Writings」, pp. 628, 653-654.]
우리들 대부분은 율법주의의 영향하에서 양육되었고 이제는 그것의 영향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대부분 철저하게 율법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체제 안에서는 율법이나 은혜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분리되어야 하듯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이 둘은 일관성이 없는 체제하에서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율법은 사망과 저주를 가져오는 일을 하지 못하고(고후3:7; 갈3:10) 사람을 유죄로 확증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롬3:19).
왜냐면 우리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은혜도 죄의 지배권에서 우리가 구출받는 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로마서 6장 14절의 평범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여기며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스코필드(C. I. Scofield), cited in 「The Complete Green Letters」 by Miles Stanford, p. 265]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율법을 필요로 합니까?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매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의롭다 함을 얻은 성도와 율법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는 여전히 율법의 지배하에 있습니까? 혹은 율법이나 그것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었습니까?
이 질문들의 답은 로마서 7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들의 활동들이 우리 지체들 속에서 일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였으나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않게 하려 함이라”(롬7:4-6). [개블린(Arno C. Gaebelein), 「Gaebelein’s Concise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p. 907]
오늘날 성도들은 칭의의 수단이나 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은혜 안에서 걷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7장 14-25절에서 우리는 율법을 삶의 규칙 혹은 규범으로 사용하여 성화를 추구하려고 애쓰며 자기의 옛 본성을 억지로 그것에 복종하도록 단호하게 시도하고 있는 한 유대인 성도를 봅니다. 그런데 현시대 기독교계에서 우리는 평범한 이방인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것들을 경험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율법 엄수가 일상적으로 거의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 사람이 회심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으므로 자신을 율법에 복종시키는 것은 이제 다만 결심과 끊임없는 노력의 문제이고 이로써 그가 거룩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어느 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그분의 백성이, 믿는 자의 육신이 불신자의 육신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율법 준수 같은 스스로의 노력을 중단할 때 그는 성령님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심으로 인한 율법에서의 구출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언사이드(H. A. Ironside), 「The Continual Burnt Offering」, see under September 18; and Romans, p. 89]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성도를 ‘율법 아래에’ 놓는 모든 시도를 가차 없이 정죄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이단 교리를 다루시려는 바로 그 목적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서를 주셨습니다. 이 서신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저자가 다루고 있는 바로 그 오류를 주의 깊게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완전히 거부하고 완전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단순한 믿음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뒤에는 율법 아래에서 혹은 그 일부분 아래에서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오류입니다(갈3:2-3). [매클레인(Alva McClain), 「Law and Grace」, pp. 51-52. This book in its entirety is highly recommended. It is published by BMH Books, Winona Lake, IN 46590]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열쇠 혹은 규칙은 구약 시대 율법의 속박을 가져온 시내산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유를 주는 ‘신약 시대 갈보리산’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나는 “내가 죽었고 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것을 배웠습니다(골3:3). 율법은 시내산에서 왔지만 은혜는 갈보리산으로부터 세차게 흘러나왔는데 이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딛2:11-12).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자기들 가운데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시내산을 택하고 은혜의 갈보리산을 버렸습니다(갈3:1).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개혁신학은 성화에 관한 가르침 면에서 부족합니다. 느웰(William Newell)은 다음과 같은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교리나 실행 면에서 16세기 종교 개혁은 초기 교회 시대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교리 면에서 그들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칭의를 가르쳤습니다(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많은 면에서 바울 이래로 믿음을 가장 강렬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개혁자들은 바울이 가르친 신자의 정체성 혹은 신원 문제 같은 교리를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아담과 연결되어 있는 신자의 역사가 갈보리산에서 끝났다는 것,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죄를 향해 죽었다는 것, 또 그가 죄에게 큰 힘을 주었던 율법을 향해서도 죽었다는 것 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종교 개혁 신조들은 한결같이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여기며 성도를 율법 아래 두었지만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성경기록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통한 완전한 양심과 완전하게 된 믿음,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된 것,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이루는 완전한 거룩함 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느웰(William Newell), 「Revelation - A Complete Commentary」, p. 63(계3:2에 대한 그의 주석 참조)]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떤 규칙하에서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미들타운성경교회 웹사이트의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 1. <New Testament Teaching on How to Live the Christian Life>, 2. 로마서 추천 도서: ①. 「Law and Grace」(Alva McClain)], ② 「The Complete Green Letters」(Miles Stanford)], ③ 「Romans」(William Newell, especially his discussion of Romans 6-7)], ④ 「There Really Is A Difference」(Renald Sho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