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창세기(1-11)

창세기 3장 6절 - 7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3. 28. 10:56

6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이브는 미끼를 물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만지지도 말라는 말 속에서 그녀의 숨겨진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합리적인 금지조치였는데 이브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하나님께서는 지나차게 엄격한 분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브는 롬1:21에 따르면 모든 죄들의 시작인(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숨겨진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사탄에게 보여주고 말았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며, 도리어 그들의 상상들이 허망하여지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겉으로 드러난 이브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시킨 것이었지만 이미 그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엄격한 주인으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린 불평하는 영이 이브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마25:24)

마25:24 그 다음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나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께서는 엄격한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것을 내가 알았나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적어도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으라는 학교규율에 반항하여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캠퍼스에서 행진을 하듯 걸어가는 여학생에게 ‘Good morning, Eve!’라고 인사를 한 적이 있다.

드디어 시험이 다가왔다. 죄론에 있어서 언제 죄가 성립되는가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죄는 원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행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마음속에서 따져보는 그 사이에 침투한다.

시험의 대상이 제거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시험 앞에 서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죄가 없으셨다.(히4:15)

히4:15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원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 역시 죄가 아니다. 이는 당신이 취할 행동의 결과와 도덕적 의미를 알가까지는 그것이 선한 행위인지 악한 행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논의(debate)라고 부르는 그 다음 단계에서는 죄인 안에서 양심과 육체, 혹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다. 이때 시험 당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가 가져올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따져보게 된다. 바로 여기서 죄는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는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한즉“(잠23:7) ”마음에서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모독이 나오느니라.“(마15:19)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의 결정은 그 다음이고 행동은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니 죄 그 자체는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벌써 시작되었다. 마음속의 논의가 시작되면 죄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원하는 대상인 선악과는 이미 이브 앞에 제시되었고 이브는 이 대상을 인식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이브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시험하는 사탄에게 답하는 대신 마음속으로 따져보기 시작했다.(창3:1) 대세는 이미 기운 셈이다.

시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3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시험은 우선 쳐다봄으로 시작된다. ”여자가 보니...“ 롯(창13:10), 다윗(삼하11:20 등도 눈의 시험에 빠졌다. 오늘날 사람들이 아침, 낮, 저녁 쉴새없이 광고 홍수로 인해 눈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똑같다.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의 온 평지를 바라보니 어느 곳이나 물이 넉넉하더라. 그곳은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으니, 주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아 마치 소알에 온 것 같더라.

삼하11:2 저녁 무렵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지붕에서 본지라, 그 여인이 보기에 심히 아름답더라.

누가복음 4장, 요일2:16 그리고 창3장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일2:16 창세기 3장 누가복음 4장
육신의 정욕 먹음직하고 이 돌에게 명하여 빵이 되게하라
안목의 정욕 보기에도 즐겁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
생의 자랑 현명하게 할만큼 탐스러운 뛰어내려 보라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이브의 시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시험에 들어있는 모든 요소가 전부 긍정적인 것이요,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성경의 이 기록이 영감받은 것이요,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이브가 취하려고 했던 행동은 그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가 최초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적용한 결과 인류 역사 6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 침대와 무덤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의 창조주를 만날 준비도 못한 채 영원 속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사물의 밝은 빛을 바라본 것 치고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룬 셈이다.

나는 사탄이 이브 앞에서 직접 산악과를 따서 먹어 보임으로써 포도나무가 아무것도 아니며 겁낼 것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유명한 입에 사과를 물고 있는 뱀은 나무와 너무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서 사탄은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 나무와 관계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실제 1970년대 군의 의무부대의 기장에도 동일한 표식이 달려있었다.

에스겔 31장을 공부해 보라. 기회가 닿는다면 히슬롭의 책 <두 개의 바빌론>을 읽어 보라. 크리스마스 트리, 토템나무, 물속 마녀의 마술지팽이, 부적판, table tapping(여러 사람이 테이블 위에 손을 얹으면 테이블이 움직이는 심령현상의 일종) 나무를 두드리며 주문외기 등은 단순히 민속에서 유래된 것들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과 이브 사이에 있었던 교제의 비밀의 장막을 성령님의 도움으로 알아 볼 수 있다.

*이브는 처녀였다.(고후11:1-4)

*그녀는 속임을 당했다.(혹을 미혹 당했다. 고후11:1-4)

*그녀의 첫 번째 아이는 초자연적인 아비를 갖고 있었다.(창4:1 요일3:12)

*그녀는 금지된 과일을 입으로 먹었다.(창3:6)

*그 과일은 씨를 가지고 있는 포도열매로 피를 예표한다.(창2:23)

고후11:3-4 나는 뱀이 그의 간계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너희의 마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부패하여 그같이 떨어져 나갈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너희가 받지 않은 또 다른 영을 받거나 너희가 영접치 않은 또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너희가 잘 용납하는도다.

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말하기를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요일3:12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그를 죽였겠느뇨? 이는 그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

창2:23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서 취해졌음이라." 하니라.

러니까 여자들은 이브가 포도를 따먹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액체 립스틱을 개발했다고 선전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

우리는 이 구절의 속뜻을 살피면서 디모데후서 2장과 대비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딤전2:14에는 아담은 속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과 창세기에서 방금 읽은 구절을 대조해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숨은 내용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딤전2:14 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범죄하였음이라.

*아담은 이브가 속고 있을 때 없었다.

*아담은 이브가 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제공했을 때 그녀의 불순종이 야기한 결과를 보았었고 따라서 그 사실을 알고서 그 열매는 먹었다.(엡5:28-29) 아담은 이브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열매는 먹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아담과 이브의 관계가 갖는 독특한 보편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에 있어서 아무추어인 공자, 모하메드, 조로아스터, 부처, 노자 등이 보기에는 이 예표가 너무도 완벽한 것이다. 이 세상 여자치고 자기를 위해 죽을만큼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소유하고픈 꿈을 갖지 않은 자가 있는가?

엡5:28-29 그러므로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자신들의 몸처럼 사랑해야만 하리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사람마다 항상 자기 육신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육성하고 아끼기를 주께서 교회에게 하심같이 하나니

이 사실 이외에도 성경의 이 한 구절 속에는 또 다른 보편적인 진리가 숨어있다. 그가 먹더라는 부분을 주목하라. 위대한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이 시작하는 창3장에 먹는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사실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창3장에 여러 절에 걸쳐 먹는다는 말은 좀 불경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어째서 입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모세는 실로 프로이드보다 2000년 앞선 것이 아닌가? 사람의 모든 수고가 자기 입을 입한 것이라면(전6:7) 다른 모든 종교경전들이 이처럼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인 먹는 문제로부터 시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먹더라.』

전6:7 사람의 모든 수고는 자기 입을 위한 것이지만 식욕은 채워지지 않는도다.

아담은 눈처럼 하얗던 그녀의 신부가 더 이상 하얗지 않고 핑크빛 혹은 자기처럼 붉은 갈색을 띄고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브의 얼굴이 벌겋게 된 것은 하늘에서 주신 은혜의 꽃다발이 아니라 둘째 사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담은 그녀와 함께 죽기 위해 그 열매를 먹었다.

7 그러자 그들의 눈이 둘 다 열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의 치마를 만들더라.

드디어 이들은 눈이 열려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들은 죄 하나를 짓고서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낙원을 잃어버렸다. 오늘날도 이 부부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라. 죽음의 공포, 세금, 질병, 가난, 전쟁, 범죄, 이 모든 것이 하나도 없는 시장낙원,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진함, 하나님과의 교제, 완벽한 기상조건, 야외생활 이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이들은 문명과 태풍과 허리케인 홍수 지진 화산 현재는 지옥불 위에 놓여 있는 피조세계의 탄식(약3:6 롬8:21 눅21:10,11,25) 등을 그 대가로 물러 받게 되었다.

약3:6 혀는 불이요, 죄악의 세상이라. 그러므로 혀는 우리 지체들 가운데 있으면서 온 몸을 더럽히며 또 일생을 불태워 버리나니 곧 지옥의 불에서 태우느니라.

롬8:21 이는 피조물 자체도 그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눅21:10-11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리라. 큰 지진이 여러 곳에서 있을 것이며, 기근과 역병과 무서운 광경과 큰 표적들이 하늘로부터 있으리라.

눅21: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적들이 있을 것이며, 땅에는 민족들이 혼란 중에 괴로워하며 바다와 파도가 포효하리라.

다시 말해 이들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제시되는 유토피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버렸다. 다윈, 리엘, 헉슬리, 럿셀 등과 같은 사람들이 그 어딘가에서 플리나리아나 아메바 단계에서 벗어나 달을 향해 기도 있듯이 아담과 이브는 이들 단체를 벗어나 땅 속의 구렁과 지옥을 향해 치닫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둘다 열려“

이 표현은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도움없이도 KJV에 정확히 정의내려져 있다.(눅24:31 왕하6:17)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과 하나님께 대해 지은 죄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약중독자들은 분별할 수 없는 사실, 즉 자기들의 옷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눅24:31 그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주를 알아 보자 주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시더라.

왕하6:17 그때 엘리사가 기도하여 말하기를 "주여, 내가 청하오니 그의 눈을 여시어 그로 보게 하소서." 하자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어 그가 보니, 보라, 엘리사를 에워싼 말들과 불병거들이 산을 가득 채웠더라.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동물과 새들은 스스로 몸을 가리고 있는데 반해 그들은 가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다. 여기서 또 다른 충격적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인간이 입고 있는 옷은 땅이나 다른 짐승들로부터 나온 것이란 사실이다. 4,000년이 넘는 과학의 발전도 창세기 기록을 바꿀 수 없었다.

"내가 내 어미의 태에서 맨 몸으로 나왔으니 내가 맨 몸으로 그리 돌아가리이다.”(욥1:21)라고 선언한 욥의 고백은 기원 1400년 전에도 적절했으며 바울이 이 사실을 딤전6:7-8에서 다시 언급한 것도 참으로 합당한 일이었다. 과학이라고 해서 우리가 죽을 때 맨몸 말고 더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껏 죽어간 모든 과학자도 완전히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갖출 수 있는 덮을 것은 기껏해야 더러운 걸레에 불과할 뿐이다.(사64:6)

딤전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들로 만족할 것이니라.

사64:6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또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여기서 무화과나무 잎을 주목하라. 이 무화과나무 잎은 오늘날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 장미십자회, 안식교, 공산주의, 무신론 등외에도 인간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을 가려 보려고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인 사사들이 바로 그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유일한 나무이며(마21:19) 이는 종교를 예표한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는 카인과 같이 입으로만 고백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으르 대변하고 있다. 카인은 자기자신의 힘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애를 썼다.(롬10:1-10 4:1-10을 비교하라)

마21:19 길가에 있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가셨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자 그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네게서 영원히 열매가 맺히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니,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리더라.

이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은 이래 인간에게 있어 남에게 자기 잘못을 전가시키는 것(창3:12-13)과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창3:8) 이외는 가리는 행위, 덮어버리는 행위야 말로 인간들이 가장 자주 취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에 의해 세워진 위대한 종교와 철학들은 전부 죄인들에게 자기자신의 의로움(무화과나무 잎)을 고수하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자신의 노력대신 하나님이 이룩한 피의 속죄(창3:21)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롬5:1-8 행20:28 골1:14)

창3:12-13 그 남자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도록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내게 주기에 내가 먹었나이다." 하더라. 주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행한 이 일이 어찌된 것이냐?" 하시니 그 여자가 말하기를 "그 뱀이 나를 속여, 내가 먹었나이다." 하더라.

창3:21 또 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으로 옷들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히시니라.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 간혹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

행20:28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골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이제 우리는 아담의 영적인 상태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셀주의자들은 (이 교리는 오늘날도 가너 테드 암스트롱에 의해 설교되고 있다) 창2장과 3장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당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집단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표현에서 먹는 날이 천년의 기간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담은 930세가 되어 죽었으니까 이 구절은 육체적인 죽음일 뿐이라고 억지 해석을 한다. 이런 엉터리 해석에 대해서는 35가지 정도의 반론을 성경으로부터 제시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5가지 정도만을 지적해도 그 부당성이 입증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 그렇다면 이 말이 당신은 기원전 4000년에 죽었다는 말인가?

고전15:22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

 모든 사람은 거듭나기 전에는 죽어있다.(엡2:1-8) 그렇다면 사람의 어느 부분이 죽어있다는 말인가? 그들의 육체가 죽었다는 말인가?(창1:27-28)

엡2:1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엡2:2-3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엡2:4-6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함께 앉히셨으니

 그렇다면 이브는 언제 죽었는가? 그녀도 역시 선악과를 먹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눅9:60)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수 있는가?

눅9:6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시니라.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육체적으로는 영원히 살 수도 있었다. 안식교의 메리 엘렌 화이트 여사와 찰스 럿셀, 그리고 암스트롱 등은 같은 장에서 22절을 읽을 줄 모르는 모양이다.

아담의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영이 죽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요3:6-7에 계시된 진리로 더욱 분명해진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러나 아담의 죽음이 무슨 죽음인가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담이 그 선악과를 입에 넣자 3가지 사실이 발생한다.

 그가 처음 창조시 가졌던 피가 독에 중독되었다. 그래서 향후 그의 모든 후손은 죽게 되었다.

 아담의 영은 죽었고 이로써 그의 모든 후손은 죄와 허물로 죽은 채로 태어난다.

 그의 혼은 육신의 몸에 둘러붙게 되었고 결국 아담은 벌거벗은 몸의 종이 되었으며, 죄의 포로가 되었다.(요8:34 롬7:17-24)

요8:3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니라.

롬7:17-24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이제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하여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내가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아담은 930년이 지나 심장이 멎었고, 그의 폐는 파열되었으며, 그의 몸은 그의 죽은 영을 따라 사망으로 들어갔다.(롬5:12)

롬5:12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3가지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이 아담에게 발생했으니 그것은 아담이 창조주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재앙은 얼마나 후유증이 컸던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기까지는 회복될 수 없었고 그것도 부분적인 회복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자신으로(고후4:3-4 히1:2-3 골3:9-10) 구원받은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아담으로부터 오순절까지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으로 지어졌다.(창5:3) 따라서 성경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게 되었다.

고후4:4 그들 가운데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

히1:2-3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를 통하여 그 분께서 세상들을 지으셨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골3:9-10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그 행위와 함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창5:3 아담이 일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습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더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모든 인간은 동물의 형상으로 원숭이로부터 나왔다.

이 두 가지 선언문은 모두 거짓이며 함흑시대의 유산물에 불과하며 대학 캠퍼스에서 유행하는 공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기 위해서 그 형상을 영접해야만 한다.(요1:12)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종교, 교회, 성사, 사상, 철학, 정부, 가르침, 실행, 믿음, 개혁 혹은 마약도 이 형상을 재생해 낼 수 없는 고로 현대인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다.(엡2:1-6 2:12) 따라서 인간은 거듭나야만 한다.

요1: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엡2:1-5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

엡2: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요 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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